145화. 망나니 왕자의 귀환 (3)
통로는 어두웠지만 정비가 잘되어 있었다.
간간이 설치된 횃불에서 송진 타는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그렇게 얼마나 통로를 걸었을까.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후웅
통로를 벗어나자 상쾌한 바람이 얼굴을 휩쓸며 지나갔다.
“……산맥 안에 이런 곳이 숨겨져 있었군요.”
바위로 된 도시.
산을 통째로 깎아 만든 정교하고 웅장한 성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높고 단단한 외벽은 마치 들어오는 입구를 둘러싼 형세다.
이곳에 쳐들어올 적들을 생각하면 절로 연민의 감정이 솟아날 지경이다.
호진이 그 위압감에 전율하며 감탄하자 수비대장이 뿌듯해하면 말을 꺼냈다.
“이곳이 관문의 수호자 쉴드락 가문의 영지 ‘카잣 둠’입니다.”
“풀어 말하면 ‘전쟁의 무덤’이라고 하지. 전쟁은 늘 이곳에서 종결됐으니까.”
구르드의 말에도 은근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단 한 번도 적의 침입을 허락한 적이 없단 말입니까?”
“수천 년 역사 중, 단 한 번도 없었지.”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아르바흐가 씁쓸하게 답했다.
“우리 적이 밖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게 문제지요.”
울그렉 이후트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삼촌을 가리키는 말일까.
호진은 알 수 없었다.
하나, 수비대장은 몸을 흠칫 떨었다.
반응으로 보아 후자로 이해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곧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표정으로 삐걱거리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자, 거의 다 왔습니다! 서두르시죠.”
하지만 호진의 눈에는 그의 거칠어진 호흡과 경직된 목덜미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지금쯤 수비대장도 어렴풋이 깨달았으리라.
자신이 왕국을 뒤엎을 폭풍을 몰고 왔다는 사실을.
***
“왕자님! 어서 오십시오!”
영주 관에 들어가자 한 난쟁이가 두 팔을 벌려 일행들을 환영했다.
예상치 못한 환대에 놀란 것은 호진뿐이 아니었다.
아르바흐 역시 예상치 못했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쿠라그 쉴드락.”
“왕자님도 무사해 보이셔서 천만다행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게…….”
“아니, 이럴 게 아니라 따라오시지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쿠라그라고 불린 사내.
회색빛의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의 난쟁이는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그는 왕자에게 걱정 섞인 말을 쏟아내다가 호진과 일행들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이런 구르드 어르신도 계셨군요!”
“오랜만이군.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구르드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어르신도 사라지셨다는 말에 어찌나 놀랐던지. 천만다행입니다.”
“그래. 얘기가 길어지겠어. 그전에 인사부터 나누지. 이쪽은 우리들의 은인이자 시리온의 국왕인 이호진 님이시다.”
자신을 소개받은 호진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예? 아니 그게 무슨.”
놀란 듯 눈을 끔뻑이던 쿠라그는 이내 입을 떡 벌렸다.
“정말입니까? 갑자기 공왕이라니……?”
“천운이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구르드는 호탕하게 웃음을 흘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나눈 쿠라그는 호진들을 위한 만찬회를 열었다.
만찬회라고 해봐야 기다란 식탁에 갖가지 음식들을 차려놓은 것뿐이었지만, 허기진 일행들에겐 호화스러운 파티 같은 것보다도 훌륭한 대접이었다.
호진은 부드러운 빵을 찢어 입에 넣으며 주변을 살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난쟁이가 일행들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영주쯤 되면 수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이렇게 환대하는 이유가 어떤 것인지 호진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나 짐작해 볼 만한 게 있다면…….
‘반란을 일으키기엔 최고의 명분이긴 하지.’
아르바흐에겐 정당한 승계권이 있었다.
그를 내세운다면 반란의 명분은 차고 넘칠 터다.
왕국의 상황에 따라서 어쩌면 아르바흐가 쉽게 왕위를 차지할지도 모르는 일.
호진은 쿠라그의 속내를 살피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은 곧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다.
“왕이요? 지금 바룩크툼에 왕은 없습니다.”
쿠라그는 껄껄 웃으며 미드를 들이켜고는 이어 말했다.
“선대에 이어 왕자님까지 사라지고 난 후, 왕좌에 오른 울그바흐 님이 스스로 왕위를 포기했으니까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쿠라그의 말을 듣던 아르바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의 자리를 찬탈하여 얻은 왕위다.
삼촌이 그것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쿠라그는 그런 아르바흐의 눈치를 보며 아까보다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정말입니다. 울그바흐 님은 왕위에서 내려와 여섯 가문에게 권력을 양분했습니다.”
호진은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쿠라그가 아르바흐를 환대한 것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가 눈치를 봐야 할 존재, 즉 울그바흐가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난쟁이 왕국은 쉽게 말해 공화정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지금은 여섯 가문이 원탁회의에서 국정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가주들끼리 싸우느라 그리 잘 진행되지는 않지만요.”
쿠라그는 굳어버린 아르바흐를 보며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곤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마, 지금 왕자님이 나타나셔서 왕위를 주장하셔도 힘드실 겁니다. 권력을 얻은 영주들이 그것을 포기하려 할 리가 없으니까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영주들이 나서서 자신의 권력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하물며 그들이 아무런 이득 없이 아르바흐를 위해 움직여줄 리는 더더욱 없었다.
명분만 갖춘 아르바흐의 승계권 주장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심지어 그 명분마저 왕위가 사라진 지금, 그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다.
아르바흐는 순간 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세운 계획이 하나부터 열까지 와르르 무너졌다.
그의 계획 중 어디에도 삼촌이 왕위를 포기했으리라는 가정은 없었다.
‘어디부터 잘못된 거지.’
이대로라면 자신은 호진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호진이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도 붙잡을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울그렉 이후트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왕국은 속에서부터 천천히 곪아가다가 순식간에 무너질 터.
수천 년 이어진 왕국은 돌이킬 수 없는 최후를 맞을 것이다.
흘깃 바라본 호진의 표정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구토감이 올라왔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습니다. 조금 피곤한가 보네요.”
“이런, 제가 또 눈치 없이 왕자님을 붙잡고 있었군요. 가서 쉬시지요.”
“아닙니다. 잠깐 화장실만 다녀오겠습니다.”
아르바흐는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최대한 덤덤한 척 몸을 일으켰다.
최대한 당당한 걸음걸이로 회장에서 빠져나온 아르바흐는 아무도 보이지 않자, 벽에 등을 기대고 스르륵 무너졌다.
입에서는 거친 숨이 토해져 나왔다.
‘진정하자. 그동안 배운 것들을 떠올려.’
아르바흐는 짝 소리 나게 자신의 볼을 두들겼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였다.
상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중에 자신이 가진 것은 무엇인지 말이다.
‘삼촌은 왜 기껏 얻은 왕위를 포기했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울그바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생각을 이어나가려던 아르바흐는 멈칫했다.
자신은 이미 삼촌의 목표를 알고 있다.
지구에서 만났던 울그렉 이후트의 자식, 단탈렉트가 말해주지 않았는가.
‘놈은 어머니에게 굴종한 꼬리 만 개다. 왕인 형을 배신하고 조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배신자이자 패배자. 그것이 너희 난쟁이들이 이곳까지 도망 온 이유 아닌가.’
그는 울그렉 이후트에게 복종했다.
울그바흐가 원하는 것은 울그렉 이후트가 왕국을 집어삼키는 것이고, 그 이후의 왕국에서 한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왕위를 포기한 것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답은 의외로 간단하게 나왔다.
“왕이 없는 게 더 유리하니까.”
바룩크툼은 대대로 왕의 권력이 강한 전제국가였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바꾼다?
엄청난 혼란이 발생할 터였다.
당장 방금 전 쿠라그 영주가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여섯 가문이 원탁회의에서 국정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가주들끼리 싸우느라 그리 잘 진행되지는 않지만요.’
여섯 가문의 가주들은 이해관계에 부딪혀 제대로 된 국정운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왕국의 가장 강력한 무력집단인 왕실 근위대는 어떨까?
여섯 가문 중 브론즈비어 가문이 담당중인 왕실 근위대는 왕국의 세금으로 돌아간다.
강력한 왕권이 없다면 왕실 근위대는 유지하기가 힘들 것이다.
‘다른 가문들이 브론즈비어 가문을 깎아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겠지.’
왕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바룩크툼은 이미 많은 힘을 잃었다.
문제는 여섯 가문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까 쿠라그의 반응을 보니 여섯 가문의 가주들은 침공이 끝났다고 알고 있다.
그들은 울그렉 이후트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녀의 자식들이 수백 년에 한 번씩 왕성으로 기어 올라왔기에, 이번에도 침공이 그렇게 끝났다고 믿고 있었다.
삼촌 울그바흐가 돌아가신 선대의 희생으로 침공을 막아냈다고 선전한 까닭이었다.
‘이런 상황에 침공이 시작된다면…….’
조금도 버티지 못하리라.
아르바흐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렇다고 지금 가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봤자, 의심할 것이 뻔했다.
‘왕국이 위험에 처했으니까 일단 왕의 자리를 달라고?’
분명 자신이었어도 믿지 않았을 이야기였다.
다만, 왕위를 되찾을 방법은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원탁회의에서 4개의 가문의 지지만 받는다면 왕위를 되찾는 것도 가능하다.’
문제는 그 결과를 어떻게 끌어내냐는 것이다.
“젠장, 어떻게 끌어내긴.”
아르바흐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머리를 싸맨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가주 하나하나를 붙잡고 포섭해야 하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을 꿰뚫고 있는 인물이었다.
“스승님이 필요해.”
“나 말이냐?”
“네?!”
구르드가 바로 옆에 있는 줄 몰랐던 아르바흐가 화들짝 놀라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달바흐의 아들 아르바흐. 항상 침착하도록. 그렇게 경박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셈이냐.”
오랜만의 잔소리에도 아르바흐는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 반응에 의아해하기도 잠시, 구르드는 아르바흐의 이야기를 듣고 표정을 굳혔다.
구르드는 솔직히 아르바흐의 통찰력에 내심 놀랐다.
자신도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기에.
“큼큼.”
자랑스러운 감정을 숨긴 구르드는 아르바흐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잠시 후.
구르드와 아르바흐가 회장으로 돌아왔다.
“왕자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쿠라그.”
아르바흐는 고개를 끄덕인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보다 우리가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됐는지 말하고자 합니다.”
“안 그래도 언제 말씀해주시나 몸이 근질근질했습니다! 어서 말씀해주시지요.”
쿠르그가 반색하자 아르바흐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간의 이야기를.
하나도 숨김 없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