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망나니 왕자의 귀환 (1)
“촉촉하고…… 부드러워요.”
한 아이가 땅을 손에 퍼 올리며 냄새를 맡으며 중얼거렸다.
땅에서는 처음 맡아보는 냄새가 코를 간질거렸다.
이를 지켜보던 중년의 사내가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답했다.
“으하하하! 그래, 그걸 기름지다고 한단다. 여기라면 충분히 씨를 뿌릴 만하구나.”
시리온 공국의 접경지에 위치한 옛 아쉬나학 제국의 도시 중 하나, 시마르칸.
사람들은 호진이 만들어낸 게이트를 따라 이곳까지 따라왔다.
“이거, 너무 오랜만이라 기억이나 날는지…….”
노인들조차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농기구를 쥐고 바라봤다.
수십 년 만에 쥐어보는 농기구지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는 쓰지 못하리라 여겨 머리 한편에 묻어뒀던 지식들이 범람하며 머릿속에 흘러넘쳤다.
그 시절은 다신 돌아오지 않겠지만, 그들은 잠시나마 그 평화로웠던 추억에 젖어들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아르바흐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진심으로 기뻐 보입니다.”
옛 아쉬나학 제국의 수도에 있을 때, 시민들에겐 미래가 없었다.
그들의 웃음은 공허했고 자포자기적이었으며 무력해 보였다.
하나, 지금 사람들의 표정엔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내일을, 다가올 미래를 기다리는 자들의 얼굴이었다.
아르바흐는 그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며 중얼거렸다.
“호진 님이 저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 말에 대답하듯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시민들이 이곳 신전에 신상(神像)을 세우겠다고 하더군.”
그 말을 들은 호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신상이라니.
무교인 호진에겐 생소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살면서 본 신상이라곤 수학여행에서 봤던 불국사의 석굴암 정도밖에 없었다.
자신의 얼굴을 본뜬 동상이 세워진다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다.
그렇기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경전이 구체화되기 전의 신들은 주로 형태를 지녔다.
태양, 짐승, 달.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도 인간들은 신의 형상을 조각하고 그려냈다.
그리스 로마의 신들부터 이집트의 벽화까지.
그렇기에 종교적 상징물이란 그만큼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은 동상을 보며 호진이 자신들에게 베풀었던 오늘날의 기억을 상기하고 감사할 것이다.
그것이 비록 돌로 깎여진 조각상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실체화된 신의 형상은 그들의 믿음을 더욱 증폭시킬 게 분명했다.
거절하기에는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망설이던 호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하라고 하십시오. 필요하다면 난쟁이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시고요.”
“넵. 여기 기술자와 얘기해보겠습니다.”
아르바흐가 힘차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용재가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후후, 호진이 형. 아닌 척하지만 은근히 즐긴다니까.”
“인정한다.”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
호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를 지켜보던 도훈은 주억이던 머리를 멈추고, 조용히 입을 닫았다.
반면 용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저씨가 봐도 그렇죠? 우리는 그걸 관종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
“…….”
아르바흐는 슬쩍 뒤로 몸을 뺐고, 도훈도 그만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채지 못한 용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그럴 거면 평소에 무게나 잡지 말지. 예전에 안 저랬다니까요? 이럴 때 보면 형도 연예인 병이 분명…… 다들 어디 가요?”
용재는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한참이나 떨어진 도훈은 미안하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용재의 뒤에는 어느새 호진이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연예인이 뭐?”
호진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용재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답했다.
“아, 그…… 형이 연예인 닮았다고.”
“아, 그래? 누구?”
호진의 물음에 용재는 눈을 돌리면서 답했다.
“왜, 그 누구더라. 그 영화 ‘괴물’인가에 나왔던.”
“오, 용재 그런 영화도 알아? 옛날 영화인데.”
“그럼. 알지.”
“근데 왜 나에 대해선 아직도 모르냐.”
“으, 응?”
─따악
호진은 순식간에 용재의 이마에 딱밤을 꽂았다.
오러를 두른 딱밤을 맞은 용재의 고개가 휘청거리며 꺾였다.
“커, 커억…….”
용재의 눈동자가 뒤집히며 흰자위를 드러냈고, 그대로 넘어져 침을 흘리며 기절했다.
잠시 주변에 정적이 흘렀다.
이에 어느새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예은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시민들도 다 보고 있는데.”
“…….”
호진은 예은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예은은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보고했다.
“아쉬나학의 군대 및 시리온에 있던 일부 헌터들을 동원해 주변 괴물들을 처치했어요. 이 지도에 표시한 대로 경비 배치도 완료했고요.”
“고생하셨습니다.”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돌아섰다.
어느새 시민들의 시선이 호진을 향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모습.
새로운 희망을 품은 그들의 얼굴에는 약간의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
이전까지 반복되어온 좌절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탓이었다.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작은 격려의 한마디.
그들을 둘러보던 호진은 입을 열었다.
“부족한 게 많습니다. 식량도, 물도, 안전조차도요.”
낮고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는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호진의 말을 듣던 시민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아름답지만은 않다.
사막보다는 낫다지만 이곳도 살아가기에는 꽤 열악하다.
이곳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선 수많은 피와 땀이 필요할 것이다.
시민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호진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곳엔 미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이상 아쉬나학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쉬나학이며 아쉬나학이 곧 여러분입니다.”
호진이 말을 마치자 사람들의 눈에 빛이 깃들었다.
그것은 분명 희망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띠링
「신(新) 아쉬나학을 건국하였습니다.」
「실질적으로 지배 중인 지역에 성역이 선포됩니다.」
「신(新) 아쉬나학 실질적 지배 100%」
「아쉬나학의 시민 7037/ 7037」
「수복한 영토 100%」
도시 시마르칸 상공에 희미한 빛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그 기운이 도시 전체를 감쌌다.
‘이건……?’
호진은 눈을 크게 떴다.
땅을 어느 정도 더 수복해야 가능할 줄 알았던 성역이 벌써 가동됐다.
‘내가 아예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고 판단한 거군.’
아쉬나학이라는 나라는 갈리온이 죽으며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작금의 아쉬나학은 호진이 새롭게 세운 국가라는 것이 시스템의 판단이었다.
‘수복한 영토도 100%인가.’
호진은 성역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을 보며 옅게 웃었다.
성역을 선포한 이상, 땅을 황폐하게 만드는 라멜의 신격은 이 근처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비옥한 땅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들도 점차 늘어날 거고, 신 아쉬나학의 영토 역시 늘어날 것이다.
그때였다.
“비다!”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땅을 적셨다.
비를 오랜만에 만난 시민들은 비를 온몸으로 받으며 즐겁게 웃음 지었다.
비는 땅을 한층 더 촉촉하게 하고 기름지게 만들 것이다.
사막의 사람들에게 비란 행운이자 생명을 상징했다.
“신(新) 아쉬나학 만세! 국왕 폐하 만세!”
사람들이 새로운 왕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열렬한 칭송은 한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
“도착했습니다. 저 앞에 있는 것이 ‘바람이 머무는 협곡’입니다!”
아쉬나학에서 오랜 기간 방랑 생활을 해온 길잡이가 손을 뻗어 가리켰다.
호진과 일행들은 그 손가락을 따라 사구(砂丘)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끝도 없이 솟아오른 바위산 사이로 길게 뻗은 협곡이 보였다.
“저곳이 그…….”
호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소모되지는 않았다.
일행들은 신(新) 아쉬나학의 정착을 돕고 곧장 사막으로 돌아와 횡단을 시작했다.
새 정착지에서 일주일가량 시간을 소모했음에도, 아쉬나학의 길잡이들이 길을 안내해준 덕분에 협곡까지는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전하께 도움이 되었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길잡이들은 호진의 감사에 손사래를 쳤다.
이 앞부터는 이제 일행들의 몫.
호진은 한사코 거절하는 길잡이들에게 보상을 쥐여주고 돌려보냈다.
“가시죠.”
호진은 천천히 말을 몰며 앞으로 나아갔다.
점점 더 뚜렷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협곡은 보는 것만으로 웅장한 느낌이 들었다.
협곡의 입구 양옆으로는 거대한 난쟁이 동상 두 개가 조각되어 있었으니.
이에 가장 격하게 반응한 것은 아르바흐와 구르드였다.
“그쉬 나학. 내가 살아서 다시 이곳에 오게 될 줄이야…….”
“드디어 돌아왔군요.”
구르드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아르바흐는 긴장과 흥분이 뒤섞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괴물들에게 쫓겨 도망 다니던 그들로서는 이곳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 믿었을 테니.
호진은 그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 앞으로의 일은 아르바흐에게 달렸다.
─다각 다각
협곡으로 들어서자 말발굽 소리가 협곡에 낮게 울려 퍼졌다.
빛이 협곡 안을 비추지 않아서인지 서늘한 바람이 머리를 헝클었다.
“왠지 느낌이 묘한데.”
용재가 갑자기 떨어진 온도 탓인지 닭살 돋은 팔뚝을 쓰다듬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도훈도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말 그대로 천연의 요새로군. 여기서 기습이라도 받는다면 꼼짝없이 당하겠어.”
협곡이라지만 경사가 심하고 길이 험했다.
폭도 좁아 말이 3필 이상 나란히 서지 못하니, 적들이 이곳에 들어왔다가는 뼈도 못 추릴 만했다.
“아쉬나학 군대가 엄두도 못 낼 만해.”
호진도 도훈의 말에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얼마나 더 이동했을까.
일행들의 앞에는 거대한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협곡을 틀어막은 20m도 넘는 굳게 닫힌 거대한 성문은 마치 댐을 보는 느낌이었다.
“대단하네.”
호진은 견고하면서도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운 성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구르드는 아닌 척하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자부심이 담긴 목소리로 답했다.
“그쉬 나학에선 한 명의 병사가 10명의 적을 능히 막아낸다는 말이 있다네. 실제로도 단 한 번도 전투에서 뚫린 적이 없지.”
“오호, 대단합니다. 그런데…….”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옅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문제는 저희가 그 ‘적’인 것 같습니다.”
─철컥 척
호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쇠뇌가 장전되는 기계음이 협곡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건 수십의 병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