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시칸의 은둔자 (4)
“전부 모였습니다. 호진 님!”
“……빠르네요.”
호진은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꼬박 밤을 새운 탓에 눈 밑이 퀭했다.
지금부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문을 나와 잠시 걷다 보니 광장이 나왔다.
끔찍했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광장엔 횃불 대신, 지상의 빛이 지하 도시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이 호진을 내리쬐자 조금이지만 기분이 나아지는 듯했다.
그런 호진의 귀에 여러 소음이 들려왔다.
아기 우는 소리, 신음과 탄식 그리고 깊은 한숨 소리까지.
절망과 비탄이 뒤섞인 소리는 마치 거대한 장례식장을 연상케 했다.
“……이것뿐인가.”
호진은 모인 인원들을 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광장을 빼곡하게 채우긴 했지만, 원래였다면 이곳에 다 수용할 수 있는 인원들이 아니었다.
아쉬나학의 광장, 그곳엔 지금 아쉬나학 시민 전부가 모여있었으니까.
이들을 모으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궁에 있던 전사들은 일련의 사태로 전부 목숨을 잃었으나, 관리들을 비롯한 일반 군사들은 무사했다.
호진은 그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우선 일행들과 함께 군대를 빠르게 포섭했다.
그들은 갈리온의 죽음에 당황했지만, 예상보다 쉽게 호진에게 복종했다.
옥새라는 명분과 압도적인 무력은 좋은 설득 수단이었다.
애당초 사람들이 갈리온을 묵묵히 따랐던 것은 그의 정통성 때문이 아니었다.
오직 그가 지닌 힘.
그것 때문이었기에.
더 강한 자가 그들의 위에 서는 것에 불만을 품는 이는 없었다.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그동안 겪어온 고난이 오롯이 느껴졌다.
호진은 군대와 관리들을 포섭해 처음으로 내린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
‘모든 시민들을 한곳에 모을 것.’
─저벅 저벅
호진은 수많은 시민들 사이로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
호진을 발견한 시민들이 눈을 크게 뜨며 비켜서자 군중들 사이로 길이 생겨났다.
호진과 일행들은 그 길을 따라 걸었다.
고작 다섯 명이 흘리는 기운에 사람들이 헛숨을 삼켰다.
하나둘 소음이 사라져 간다.
숨소리밖에 흐르지 않는 적막함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시민들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어떤 이는 혼란과 두려움을, 또 어떤 이는 적의를 내뿜었다.
고작 한나절이 흘렀을 뿐이다.
당연히 시민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지난 밤의 이별이 서럽고 슬플 뿐이었다.
‘이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아직도 확신이 안 서지만…….’
호진은 천천히 광장 앞에 마련된 단상으로 올라섰다.
단상 주위엔 이미 포섭된 수백의 군대가 무장한 채 호진을 지키고 섰다.
또한 그 뒤로 수십의 관리가 호진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 사이에 한 차례 술렁임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호진이 말없이 그들을 내려 보자 소음은 금세 잦아들었다.
수천여 명이 모인 광장이라곤 믿을 수 없이 고요하다.
호진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리온의 국왕, 이호진이라고 합니다.”
시민들의 시선이 호진을 향해 집중된다.
수천의 사람이 호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런 자리는 몇 번을 서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솔직히 질색이었다.
그래도 필요한 일이었기에.
호진은 계속해 말을 이어나갔다.
“지난날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갑작스럽고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호진은 고민했다.
이들에게 모든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었다.
갈리온이 시민들을 모두 광신도로 만들려는 계략을 꾸몄다고.
라멜이 병에 걸린 이들의 숨을 걷어갔다고.
하지만 과연 몇이나 그것을 믿을까.
‘내 말을 믿기는 어렵겠지.’
진상을 알 수 없는 시민들 입장에선 낯선 이방인의 말을 신뢰할 턱이 없었다.
호진이 이상한 술수를 부려 사람들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찬탈했다는 쪽이 더 그럴듯할 테니까.
그렇기에 호진은…….
“안타깝게도 여러분들의 왕조차 그 죽음을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
호진의 말을 들은 시민들 사이로 거대한 술렁임이 일어났다.
소문으로 어느 정도 접했음에도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여러분들의 왕은 마지막 순간까지 시민들을 걱정했습니다.”
호진은 갈리온을 좋은 왕으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와 적대했다는 사실을 말해봤자 시민들의 의혹만 키울 테니.
“전하가 우리를…….”
호진의 말에 시민들은 침통해했다.
갈리온은 성군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왕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시민들은 그를 우러러보고 존경을 표했다.
몇몇은 감정이 격해졌는지 울음을 터트리는 이들도 있었다.
“어젯밤 죽은 이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모두 도시에 유행했던 역병에 걸렸던 이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기침과 고열을 앓다 뱀 모양의 문신과 함께 쾌차했던 이들.
호진이 자신의 말에 진실을 섞어 넣자 시민들은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 사교도의 소행이었습니다. 광신도들이 도시에 주술을 퍼트리고, 도시를 좀먹고 있었던 겁니다.”
호진의 말에 시민들이 격분했다.
이때까지 듣고만 있던 이들이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 소리쳤다.
“그게 누굽니까!”
“어느 개잡놈들이……!”
호진이 손짓하자 관리 하나가 면포에 가려진 무엇인가를 들고 단상으로 올랐다.
호진은 그것을 받아 면포를 걷고,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시민들의 얼굴 위로 경악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건…… 설마 신관님?”
누군가가 외치자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진이 들어 올린 것은 다름 아닌, 아쉬나학의 신관의 머리였다.
신관을 상징하는 특유의 장신구는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수급의 정체가 신관이기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시민들이 경악한 이유는 신관이라 믿었던 자가 지금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늘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렸던 신관들의 얼굴.
불로 지져버린 눈과 잘려 나간 코는 괴이하기 짝이 없었고, 무엇보다 뱀 문신이 얼굴에 가득했다.
아쉬나학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국가다.
즉, 그들은 여신 릴리를 주신으로 여기는 선신들의 세력이라는 말이다.
선신들 중 뱀을 상징으로 내세우는 신은 아난타뿐.
그러나 사막인 이곳에서 늪의 여신인 아난타의 영향력은 지극히 미미하다.
“검은색 뱀 문신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바로 옛 아쉬나학 제국을 무너트렸던 사도의 주인이자, 이곳 시칸에 잠든 고대의 악신 라멜입니다.”
호진의 말에 시민들은 모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된 고대의 신 라멜.
사막에서 나고 자란 그들에게 라멜의 형상은 너무나 익숙했다.
그와 관련된 신화나 구전만 수십 개는 될 테니까.
옛이야기에서나 나오는 존재인 만큼, 당장 작금의 사태와 연관 짓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 떠올린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래, 그랬군. 이 개 같은 사교도 새끼들!”
“국왕 전하의 복수를……!”
한번 타오른 분노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퍼져나갔다.
호진이 제기한 의혹은 이미 사실로 받아들여진 지 오래였다.
‘됐군.’
호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호진의 말은 대부분 사실을 바탕으로 한 만큼 충분한 논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듣고 싶어 하던 이야기를 해줬고, 원한을 퍼부을 수 있는 대상까지 제공했다.
이제 이 이야기를 끝맺을 때였다.
“저와 일행들이 그들의 음모를 처단하고 징벌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사교도의 세력들이 이곳을 노리고 있고, 그 이유는 이 땅 아래에 바로 그 고대의 신 라멜이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호진의 말에 시민들은 걱정스러운 표정들을 지었다.
많은 이들이 죽었고 왕도 잃었다.
왕의 명령에 모였던 이들의 식량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언제 또다시 이런 테러가 발생할지 몰랐다.
이 땅에는 희망이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호진이 말했다.
“저는 고민 끝에 결정했습니다. 여러분들을 돕기로. 저와 함께 이곳을 떠나 시리온으로 가시죠.”
대부분의 시민들이 그 말에 환호를 터트렸다.
어둡기만 하던 미래에 한 줄기 빛이 내리는 기분이었다.
하나, 그들 중 한 노인이 불만스럽게 소리쳤다.
“우리는 아쉬나학의 국민들이오! 시리온의 노예가 되지는 않겠소이다!”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진 광장.
사람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호진을 살폈다.
이에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이어나갔다.
“여러분들은 시리온의 노예도, 백성도 되지 않습니다. 땅도 시리온과 접경지인 아쉬나학의 영토에서 머물게 될 겁니다. 그곳에서 새롭게 시작하시면 됩니다.”
말을 잠시 멈춘 호진이 자신에게 목소리를 높였던 노인에게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신(新) 아쉬나학을 말입니다.”
─화악
다음 순간 호진의 주위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운이 일렁였다.
이번 일을 겪으며 한층 더 커진 호진의 격이 광장에 흘러넘친 것이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그것은 분명 존재했다.
사람들은 말조차 잊고, 홀린 듯 호진을 바라보았다.
호진의 격은 다른 신들의 그것처럼 위압적이진 않다.
그저 고고하게 존재할 뿐.
그것은 호진이 쌓아 올린 격이자 힘이었다.
호진의 격을 대하는 이들은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도 잠시, 호진에게 불만을 토했던 노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왕을 뵙나이다.”
“……!”
호진을 멍하니 바라보던 다른 시민들도 하나둘 자연스럽게 몸을 낮췄다.
어느새 광장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건 호진과 그 일행들뿐이었다.
새로운 왕의 탄생이었다.
***
‘이것이…… 왕.’
아르바흐는 호진을 보면서 전율했다.
그의 눈빛, 호흡, 말투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았다.
호진은 마치 왕의 품격을 타고난 듯했다.
사람들은 마치 홀리듯 호진을 따랐다.
감탄과 존경이 우러나왔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호진 님처럼은 될 수 없다.’
언젠가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할 시기.
아르바흐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호진의 모습들을 눈에 담았다.
그런 아르바흐를 지켜보며 구르드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성장하고 계시군.’
서 있는 자세부터가 다르다.
굽었던 어깨를 펴고 시선은 정면을 향한다.
굳건한 그 눈은 마주친 이들에게 신뢰를 심어준다.
무엇보다 열의로 반짝이는 두 눈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탐구하고 나아가는 자의 얼굴이었다.
이전의 아르바흐와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구르드는 그런 아르바흐의 변화를 느끼곤 마음속 깊이 호진에게 감사를 표했다.
반면, 용재와 도훈은 피곤함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교도라니. 이게 다 사교도가 벌인 일이었단 말이야?”
“다음에 만나면 죽인다. 사교도.”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예은은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짚었다.
설명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듯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