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시칸의 은둔자 (3)
“────!”
성 밖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건물의 안에서는 각종 비명과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거리에는 시체들이 셀 수 없이 쓰러져 있었다.
가까이 있는 시체를 살핀 호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생기를 잃은 피부와 자글자글해진 주름.
검게 핀 얼룩까지.
예의 뱀 문신이 몸에서 빠져나갔던 이들과 같은 증상이었다.
“이딴 게…… 신이라고?”
녀석의 가벼운 태도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의 본질을.
호진은 화를 참지 못하고 어금니를 까득 깨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그래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새삼 신이라는 족속에 대한 환멸이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 미친놈이 자기 신도들의 목숨을 앗아갔어.’
라멜은 자신의 신도들, 즉 역병에 침식된 이들의 생명을 빼앗아 자신의 힘으로 삼았다.
마치 갈리온이 자신의 전사들의 생명을 흡수한 것처럼 말이다.
녀석에게 신도란 양식이자 장난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수현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호진의 말에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수현이 있던 곳으로 빠르게 이동한 호진은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유독 적막했는데,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전부 죽었군.’
이곳은 수현이 완전히 감염된 사람들을 모아둔 장소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을 격리했던 장소.
그들은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 적막함은 호진의 불안감을 더욱 부추겼다.
“수현아! 김수현!”
목청 높여 이름을 부르기도 잠시, 호진은 초감각을 활성화해서 기감을 퍼트렸다.
그러자 어렵지 않게 한 건물 안에서 익숙한 기운을 찾을 수 있었다.
호진은 안도의 한숨을 토하며 그곳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불렀는데 왜 대답을 안…….”
문을 열며 한 소리 하려던 호진은 입을 다물었다.
“헉, 허억…….”
그곳에는 수십의 인형들이 쓰러진 사람들의 가슴을 기계적으로 누르고 있었다.
수현 또한 이름 모를 노인의 가슴을 쉬지 않고 누르며 숫자를 세고 있었다.
“72, 73, 74…….”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진은 천천히 수현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수현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손은 계속해서 노인의 가슴을 누르면서 말이다.
“아저씨? 아아, 다행이다. 저 좀 도와주세요! 사람들이 갑자기 숨을 안 쉬어요!”
호진을 보고 눈을 크게 뜬 수현은 다급하게 말했다.
하얗게 질린 수현의 얼굴에는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호진은 그런 수현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아저씨? 멈추면 안 돼요. 심폐소생술을 해야…….”
“그만해도 돼.”
“……네?”
“잘 봐. 단순히 심장이 멎은 게 아니야.”
시체들은 죽은 지 며칠은 지난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코와 벌어진 입에서는 악취가 풍겼다.
무슨 일을 해도 이들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다.
호진의 말에 수현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저은 수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살아 있었어요. 사람들이 갑자기 쓰러져서, 저는…… 전 이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자신이 격리해둔 사람들이 모두 죽어버렸다.
안 그래도 사람들의 목숨을 지키는 데 병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던 아이다.
‘마을 사람들이 몰살당했기 때문이겠지.’
그런 아이의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목숨을 잃었다.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울 터였다.
“미안하다. 네 잘못이 아니야.”
“…….”
호진은 수현을 마주 보며 그의 잘못이 아니라 여러 번 되뇌었지만, 수현의 탁해진 눈동자는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수현을 안아 든 호진은 다시 숙소가 있는 제비궁 쪽으로 이동했다.
만약 용재와 도훈이 멀쩡하다면 숙소 안에 설치해둔 게이트를 통해 돌아올 거다.
지금은 모두의 안전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호진과 일행들은 게이트로 이동하며 주위 상황을 살폈다.
쓰러진 사람들의 수나 상황으로 보아 역병에 완전히 침식된 이들만이 목숨을 잃은 듯했다.
당장 수현도 안색은 파리했지만, 역병의 증상은 없었다.
‘역병은 자취를 감췄군.’
이것으로 더 이상 역병이 퍼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일행들은 빠르게 숙소에 도착했지만, 아직 둘이 돌아온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기다려보죠. 게이트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시간이 걸릴 겁니다.”
호진은 최대한 덤덤히 말했지만,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게이트로 들어가 둘을 찾으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잘못 움직였다가는 서로 어긋날 터다.
일행들은 다들 초조함을 감추며 각자 휴식을 취했다.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했다.
마음이 불편하더라도 억지로 휴식을 취해야 했다.
‘언제 또 다른 싸움이 있을지 모르니까.’
호진도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상태창을 점검했다.
「상태창」
「이호진」
「나이: 25」
「레벨:59」
「근력:70 민첩:73 지구력:40」
「스킬: 감시자의 눈 LV.2 절(切)베기 LV.6 파(波)베기 LV.1 투구 가르기 LV.9 체력 회복 LV.10 확신 LV.2 검술의 묘리 LV.1 검의 정수 LV.2 정신 내성 LV.10 초감각 LV.6 출혈 내성 LV.10 화염 내성 LV.6 중독 내성 LV.8 냉기 내성 LV.5 중급 기(氣) 검술 LV.2 투검 LV.5 기승 전투 LV.4 파마의 검식 목엽참(木葉斬) LV.4 이화접목(移花接木) LV.2 차원이동문 LV.1 강신무(降神巫) LV.2 심득(心得) LV.1 심검(心劍) LV.1」
「직업: 검의 교단 사제(Priest)」
「가호: 감시하는 자 울타의 가호, 여신 릴리의 가호」
「칭호: 패왕(覇王)의 길을 걷는 자」
「잔여 포인트: 18」
잔여 포인트가 많이 쌓였다.
최근 단탈렉트에 이어, 갈리온까지.
그리 벅찬 상대가 아니었다 보니 굳이 포인트를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위험할 때 쓰려고 했는데.’
더 이상 아껴뒀다가는 한 번에 올렸을 때 몸이 적응하지 못할 듯했다.
호진은 잔여 포인트를 모두 근력과 민첩에 나눠서 분배했다.
근력은 80, 민첩은 81이 됐다.
몸에 흐르는 기운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신격과 ‘기’를 얻은 이후로 스탯에 크게 의존하지 않게 되긴 했지만…….
‘이렇게 한 번에 투자하니까 알겠어.’
스탯이 주는 힘은 결코 적지 않다.
아니, 사실 호진의 힘의 근간은 스탯이라 봐도 틀리지 않을 정도다.
‘신격이나 기를 얻은 후 스탯의 힘을 너무 간과했었어.’
호진은 넘치는 힘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러곤 시선을 돌려 바뀐 직업을 바라봤다.
광신도가 아닌, 사제(Priest).
‘이걸 좋아해야 하나…….’
미묘한 기분이었다.
평생을 무교로 살아왔는데, 신도에 이어 사제라 불리는 직업을 얻었다.
그뿐이랴.
이 세계에서 활동하다 보니, 신이니 왕이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호진은 찜찜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버렸다.
더 이상 과거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볼 필요는 없었다.
호진에게는 이 세상의 혼란을 바로잡겠다는 목표가 있었고, 그렇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 불려도 상관없었다.
‘새로 얻은 스킬은 심득과 심검.’
설명에 따르면 심득은 스킬들을 통합하고 발전시키는 기능이 있었고, 심검은 검에 의념을 담을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이었다.
한결같이 불친절한 시스템 창은 이번에도 사용 방법은 알려주지 않았지만 이젠 얼추 짐작이 갔다.
심득은 스킬들을 이것저것 조합해보고 비교하다 보면 발동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호진은 자신의 내성 스킬들을 곱씹었다.
지금은 여러 개로 나뉘어있지만, 결국 모두 상태 이상을 막아주는 스킬들이다.
자신의 몸을 더 단단하고 질기게 한다.
외부의 열기와 냉기, 스트레스와 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세부적으로 나뉘어 있지만 그 결은 하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스킬이 발동했다.
─띠링
「심득(心得)이 발동합니다.」
「중급 정신 내성 LV.1 출혈 내성 LV.10 화염 내성 LV.6 중독 내성 LV.8 냉기 내성 LV.5이 통합됩니다.」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중급 내성 LV.1」
‘예상대로네.’
심득 스킬의 발동조건은 깨달음.
비슷한 스킬을 몇 번 겪었더니 어렵지 않게 발동 방법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다른 스킬들도 같은 방식으로 조합이 가능하겠지만, 당장 떠오르는 것은 마땅히 없었기에 호진은 심검 스킬을 살펴보기로 했다.
심검은 검에 의념을 담는 것으로, 이것 또한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호진이 자신의 격을 각성했을 때 느꼈던 그 감각.
‘벤다’는 개념을 검에 담았던 그 감각과 비슷한 이치일 듯싶다.
하지만, 호진도 시리온 왕성에서 ‘굴라’를 상대한 이후로 다시 써본 적이 없는 기술이기에 활용이 가능할지는 애매했다.
그렇다고 당장 숙소에서 검을 휘두를 수도 없다.
‘심검은 천천히 알아보자.’
호진은 눈을 감고 내공심법 운용을 시작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빠짐없이 하고 있었는데, 오늘 저녁은 빼먹었기에 보충해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우웅
게이트가 일렁이며 기운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게이트를 활성화한 것이다.
호진은 심법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눈을 떴다.
그러자 마침 누군가 게이트를 넘어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를 보던 일행들은 다들 안도하며 긴장을 풀었다.
“용재야. 수고했다.”
“호진이 형…….”
호진은 용재를 보고 웃으며 다가가기도 잠시.
멈칫하며 물었다.
“도훈 씨는?”
“아저씨는…… 그게.”
용재는 시선을 피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에 예은은 비틀거리며 등을 벽에 기댔고, 아르바흐와 구르드도 망연자실했다.
호진은 어지러움을 간신히 견디며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아저씨는…… 사실 병에 걸려버렸어.”
“……그래서?”
“그래서 묶어두고 왔지.”
머리를 짚은 채 이야기를 듣던 호진이 미묘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침 예은과 두 난쟁이도 비슷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호진과 시선을 교환했다.
묶어두고 왔다면 그 말은 즉…….
“용재 네가 출발할 때까지는 살아 있었다는 거네.”
“당연하지.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다가 갑자기 다시 좋아졌어. 이건 완전히 발병한 거겠지?”
“뱀 문신은?”
호진의 다급한 물음에 용재는 침울하게 답했다.
“없었어. 이상하지? 증상은 듣던 대로인데, 뱀 문신만 없는 걸 보면 변종일지도 몰라.”
용재의 답에 일행들은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하나둘 웃음을 터트렸다.
도훈은 다행히 목숨을 건진 모양이다.
호진도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용재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뭐야. 뭔 상황인데?”
“됐고, 시리온은 어때?”
“멀쩡해. 기사단이 본인들을 탑에 가뒀거든.”
용재는 그 후의 이야기를 목으로 삼키며 답했다.
하나, 그것을 눈치챈 호진은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랬군. 너는 빨리 가서 도훈 씨나 풀어주고 와라. 힘드시겠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용재를 게이트로 다시 밀어 넣는 호진.
“아니, 그게 뭔 소린데? 나도 알려…….”
─우웅
게이트로 들어간 용재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무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호진이 예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호진은 어느덧 자신이 누군가의 희생에 덤덤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오늘따라 그 사실이 씁쓸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