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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40화 (140/241)

140화. 시칸의 은둔자 (2)

‘어떻게 안 거지?’

본신의 힘을 되찾으며 꿰뚫어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놈이 자신에게서 울타 이외의 신격을 느꼈다는 거다.

짐작되는 것은 두 가지인데…….

문제는 어느 것 하나 밝히기가 어렵다는 거였다.

하나는 선신이자 인간들의 주신 ‘여신 릴리’의 가호.

또 다른 하나는 검으로 쌓아 올린 자신만의 ‘격’이다.

‘릴리’는 고대 신들을 죽이고 봉인시킨 존재이니 이름을 꺼내기가 당연히 껄끄러웠다.

또한 자신이 ‘신격’을 지닌 존재라는 것은 말하기 껄끄러운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귀공의 신격(神格)은 가능한 숨기도록 하게나. 아무리 사자라 할지라도 갓 태어난 새끼 사자는 하이에나에게 물려 죽는 법이라네.’

과거 에우리우스가 헤어질 때 했던 말이다.

그 말의 의미는 간단했다.

새로운 신격의 등장.

그것은 이미 ‘격’을 지닌 존재들에게 새로운 위험요소가 생겨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격’을 지녔다고 말한다면 라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호진이 답을 망설이자, 라멜은 불쾌하다는 듯 꼬리로 바닥을 탁탁 내리치며 날카로운 기세를 흘렸다.

고작 그런 위협만으로도 호진은 섬찟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대답 안 해? 내가 그냥 물러나 준 건 알지?]

“…….”

알고 있다.

호진이 한 것은 거래가 아닌 협박이었다.

라멜은 얻는 것 하나 없었기에.

그 말 그대로 라멜이 그냥 져준 것이었다.

녀석이 공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호진은 높은 확률로 죽었을 것이다.

만약 놈의 기분이 틀어지면 일이 어떻게 될지 몰랐기에, 지금은 놈이 원하는 대로 해 줄 필요가 있었다.

호진이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여신 릴리란다. 그녀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나와 다시 계약을 맺었지. 이제 됐느냐?]

울타가 앞으로 나서며 대신 답했다.

이에 라멜은 뱀이 위협하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 번만 더 대화에 끼어들면 그땐 다 죽이겠어.]

놈이 기세를 끌어올리자 털이 올올이 서는 기분이었다.

이에 울타도 로브를 눌러쓰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울타는 내 신격을 언급하지 않았다. 역시 그건 숨겨야 하는 부분이 맞는 거야.’

호진은 침을 삼키며 울타의 대답을 이어 했다.

“여신 릴리와 반강제적으로 계약을 맺었고, 그 뒤에 울타와 재계약을 했다. 그 결과 지금처럼 가호가 섞여버렸지.”

[신기하네.]

라멜은 호진을 뚫어져라 응시하기도 잠시, 재차 질문해왔다.

[왜 재계약을 한 거지?]

그 물음에 호진은 지체 없이 답했다.

이번 답은 숨길 필요도 없는 진심이었으니까.

“여신을 죽이기 위해서다.”

[……?]

정적이 흘렀다.

라멜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몸을 비틀어 울타를 바라봤다.

물러나 있던 울타는 인상을 찡그렸다.

‘끼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라며 작게 중얼거린 울타는, 한숨을 쉬고는 답했다.

[정말이다. 내 계약자의 목적은 신살(神殺). 나는 그것을 돕고 있지.]

울타의 답을 들은 라멜은 한동안 정지하듯 그대로 굳었다.

그러더니 이내 부들부들 몸을 떨기 시작하더니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여신을 죽여? 인간이? 미치겠군! 크크큭.]

소년 같기도 하고 소녀 같기도 한, 라멜의 숨넘어가는 웃음소리가 한참이나 울려 퍼졌다.

실컷 웃은 라멜은 미끈거리는 몸을 끌고 뒤돌아섰다.

[안 죽이길 잘했네. 재밌을 것 같아.]

그러더니, 눈이 바닥에 내린 후 천천히 땅으로 녹아내리듯 그 신형이 점차 사라져갔다.

[허물은 선물이다. 가져가라, 벌레.]

마지막 말과 함께 라멜은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췄다.

주변을 가득 짓누르던 위압감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췄다.

이것을 멍하니 지켜보던 호진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끝인가요?”

[끝이구나. 놈은 완전히 이곳에서 사라졌다. 다시 잠에 들 생각이겠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다행스러움과 동시에 일이 허무하게 끝났다는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이렇게 끝나서 다행이구나. 나도 이만 물러가마.]

울타는 호진에게 넘겨줬던 힘을 회수하여 갈무리하고는 떠날 채비를 했다.

이에 호진은 다급히 물었다.

“아, 울타 님, 제 ‘격’은 숨겨야 하는 것이 맞죠?”

호진의 물음에 울타는 호진의 이마를 톡 하고 치며 답했다.

[물론이란다. 이전엔 별 볼 일 없는 정도라 경고도 안 했건만, 언제 그렇게 키운 게냐.]

울타는 한숨을 섞어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이 가장 위험하겠구나. 숨기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다른 신격들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이길 수도 없으니.]

“조심하겠습니다.”

호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심하고 다음에 또 보자꾸나.]

울타가 인사말과 동시에 로브를 펄럭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곳엔 이카루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신들은 등장이나 퇴장이나 다들 화려하구만.”

호진이 낮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우선 바닥에 떨어진 라멜의 허물을 집어 들었다.

‘쓸 데가 있으려나…….’

방금까지 꾸물거리던 녀석을 들고 있자니 어딘가 찝찝했다.

지금은 미동조차 않지만, 생리적인 혐오감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건 고대신의 신체의 일부다.

분명 어딘가 쓸 데가 있을 터였다.

그것을 인벤토리에 쑤셔 박은 호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도 왕의 옥새로 열 수 있었던 비밀 공간.

혹시 다른 물건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방 한가운데 놓인 제단을 살피던 그때였다.

허물이 있던 자리 아래에 희미하지만 어떤 문양이 보였다.

눈에 익은 육망성의 흔적.

‘이건 설마……?’

호진은 조심스레 시리온 왕국의 옥새를 꺼내 들었다.

비슷하지만 약간의 크기가 달랐다.

‘어쩌면 이곳에도 검의 교단이 남긴 흔적이 있을지 모른다.’

전직이 코앞에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

호진은 다급히 다른 대체재를 떠올렸다.

다른 옥새라면 아쉬나학의 옥새뿐인데…….

아쉬나학의 옥새는 정사각형 모양이다,

즉 이건 열쇠로 부적합하다는 말이다.

‘하다못해 능력이라도 쓸 수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호진은 문에 꽂혀 있을 옥새를 떠올리면서 입맛을 다셨다.

수십 개의 무구를 자유자재로 다루게 해주는 뛰어난 성능을 지녔지만, 문제는 아쉬나학 제국의 후예만이 사용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시리온 때와는 다르게 호진은 이곳에서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기 힘들었다.

자신은 이미 일국의 왕이니까.

“쯧.”

호진이 혀를 차던 그때였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쉬나학 제국의 왕, 시마르 아누 갈리온을 처치했습니다.」

「시칸의 은둔자 라멜과 조우해 살아남았습니다.」

「플레이어의 격이 상승합니다.」

「보상이 인벤토리에 수납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다.

갈리온을 직접적으로 죽인 것은 라멜이지만, 호진이 입힌 피해도 시스템이 인정해준 모양이다.

‘그나저나.’

라멜과 마주치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격이 올랐다.

그 위압감을 떠올리면 충분히 납득이 가기는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보상이 들어온 모양.

호진은 인벤토리에서 새로 들어온 보상을 꺼내들기도 잠시, 손을 떨며 중얼거렸다.

“……미쳤군.”

「고대 아쉬나학 제국의 옥새」

「종류: 아티팩트」

「정보: 사라진 고대 아쉬나학 왕가의 정통성을 증명한다. 오늘날엔 어떤 영향력도 지니지 못하지만, 신들의 전쟁이 벌어지던 시절의 유물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보상은 다름 아닌 옥새.

아니, 옥새라고 불리는 열쇠였다.

갈리온이 가지고 있던 것과 달리, 육망성의 모양을 한 그것은 열쇠구멍에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호진은 망설임 없이 옥새를 제단에 꽂아 넣었다.

─달칵 끼릭

옥새를 돌리자 태엽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태엽 소리가 멈추더니 돌연 덜커덕 소리를 내며 서랍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곳엔 부러진 검 한 자루가 들어있었다.

「게일의 부러진 검」

「종류: 아티팩트」

「정보: 검의 교단의 성유물. 신을 동경하여 모방했던 최초의 신도의 검이다. 사라진 반쪽 검신의 행방은 알 수 없다.」

검은 롱소드의 형태였다.

은백색으로 은은하게 빛을 뿌리는 검신은 방금 벼려낸 것처럼 예리했다.

검신에 파인 홈을 따라서 룬 문자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고, 크로스가드는 흔들림 없이 견고했다.

부러진 흔적만을 제외한다면 새것과 같은 모습.

그 아름다운 형태의 검에는 분명 신비가 담겨 있었다.

호진은 검을 들어 올렸다.

다시 한번 감탄하기도 잠시, 새로운 알림이 울렸다.

─띠링

「전직에 성공하였습니다.」

「검의 교단 사제(Priest)로 전직합니다.」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심득(心得) LV.1」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심검(心劍) LV.1」

「획득된 장비가 인벤토리에 수납되었습니다.」

「스킬 레벨이 증가합니다. 정신 내성 LV10→ 중급 정신 내성 LV1」

“좋았어!”

호진은 기쁜 나머지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르며, 공중에 손을 마구 휘저었다.

고생은 많이 했지만, 얻은 것도 무척 많았다.

그간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모두 받은 느낌이었다.

‘그럼 얻은 스킬을 살펴볼까? 아참, 스탯 분배도 해야 하는데.’

즐거운 고민을 하려던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호진 님?”

아르바흐에 이어 구르드와 예은이 계단을 내려왔다.

공간 전체를 짓누르던 위압감이 사라진 데다가, 호진의 목소리가 들렸기에 내려온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던 아르바흐가 완전히 으스러진 갈리온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르바흐가 질문했고, 다른 두 사람도 궁금한 듯 호진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에 호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라멜과 만났습니다.”

“…….”

“그리고 협박해서 쫓아냈고요.”

“…….”

일행들은 호진의 말을 들으면서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고요한 정적이 흐르던 그때 구르드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르바흐. 이번에야말로 내 귀가 이상해진 것 같다.”

“……저도 이번에는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예은이 물었다.

“뭔가요? 그 라멜이라는 건?”

“고대신이라고 하는 존재입니다. 흠, 설명하자면 조금 긴데……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모두에게 말해줘야겠네요.”

“저, 정말 그 라멜과 만났다는 말인가?”

구르드의 물음에 호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신과 만난 건 아닙니다. 단지, 그 화신과 조우했을 뿐.”

“……!”

호진의 답에 구르드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뒷걸음을 쳤고, 아르바흐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지켜보던 예은만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용재와 도훈 씨가 오면 마저 하죠. 우선은 이곳에서 나가는 게 먼저입니다.”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밖에 상황이 어떨지 모른다.

아쉬나학의 병자들과 수현, 그리고 시리온의 국민들.

용재와 도훈을 비롯해 망루를 지키던 기사단까지.

누가 죽거나 다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모두가 무사하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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