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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39화 (139/241)

139화. 시칸의 은둔자 (1)

터져나간 갈리온의 몸뚱어리는 엎질러진 토마토 수프처럼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곤죽이 되어버린 탓에 시체라기보단 누군가 씹다가 토한 토사물처럼 보였다.

[너무 오만했구나. 신이란 애시당초 거래의 대상이 아니거늘…….]

울타는 씁쓸한 말투로 중얼거린 후 혀를 찼다.

그러나 호진은 이에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갈리온이 곤죽이 된 곳에는 검은색의 뱀이 자리하고 있었다.

뱀은 스르륵 미끄러지듯 허물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자신의 절반의 절반도 되지 않을 허물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스스슥

마지막 꼬리까지 모두 빨려 들어가듯 허물 안으로 들어가자, 방 안에 적막함이 내려앉았다.

호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손에 땀이 축축하게 묻어났다.

허물은 아직 호진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숨이 막힐 듯한 존재감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이미 그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견뎠다.

호진은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기세를 끌어올리며 놈을 바라봤다.

그러기도 잠시, 허물이 스륵 움직이더니 꽈리를 틀고 고개를 치켜세웠다.

머리 부분이 뜯겨 나간 허물.

허물의 안쪽엔 칠흑 같은 어둠이 들어차 있었다.

일렁이는 횃불의 빛은 허물의 안쪽을 조금도 비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 어둠은 명백히 호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띠링

[정신 내성이 ‘■■’에 일정 수치 저항을 시도합니다.]

[정신 내성이 ‘■■’에 저항을 실패했습니다.]

[일부 상태 이상에 빠집니다.]

호진은 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숨이 고르지 못했다.

‘또 이건가?’

샴을 처음 봤을 때와, 강신한 아난타와 조우했을 때.

자신보다 압도적인 ‘격’을 지닌 존재를 맞닥트렸을 때는 늘 이렇게 몸이 굳어왔다.

눈앞의 허물이 지닌 ‘격’은 명백히 지금껏 만나왔던 무엇보다 위협적이고 강력했다.

하지만.

‘하지만 나도 이전과는 다르다.’

호진은 이를 악물고 허물을 마주했다.

빳빳하게 몸을 치켜세운 허물에게서 속삭이듯이 낮은, 동시에 벌레가 몸을 기듯 소름 끼치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 ■?]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귀를 통해 흘러 들어온다.

고막이 울린다.

귀에 벌레가 들어가 날갯짓을 하는 듯하다.

“귀 가려운데. 사람 말로 하지.”

호진은 무표정하게 울타에게 전해 받은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쉴 새 없이 귀에서 사그락거리며 속삭이던 소음이 사라져갔다.

이를 지켜보던 허물은 의외라는 듯 몸을 흔들었다.

그러곤 이내 킥킥거리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냥 벌레는 아니네. 재밌어.]

허물은 스르륵 몸통을 비틀어 호진의 어깨에 앉은 울타를 바라봤다.

[그건?]

“내가 봉사 중인 신이다.”

잠시 멈칫한 허물은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부엉이 하면 떠오르는 놈은 하나뿐인데…….]

그때였다.

[네 예상대로다, 시칸의 은둔자.]

울타가 호진의 어깨에서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내려왔다.

부엉이의 형태를 한 몸에서 깃털들이 흩날리는가 싶더니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진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신비함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이를 지켜보던 허물의 기세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똬리를 튼 녀석의 온몸에서 뱀이 쉬익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울타. 방관자를 자칭하는 배신자.]

녀석의 날 선 목소리를 들은 울타는 후후 낮게 웃어 보였다.

[배신이라……. 재밌구나. 우리들이 그런 사이였다니.]

[넌 신들의 전쟁에서 도망쳤다. 난 이전부터 너를 죽이고 싶었다고.]

허물은 한층 더 살기를 끌어올렸다.

호진은 둘의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이 깎여나감을 느꼈다.

울타에게 받은 힘을 끌어올려도 허물이 내뿜는 기세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와 중에 호진은 한 가지 사실에 안도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울타의 말은 사실이었나 보군.’

어둠을 숭배하는 고대신들과 빛을 숭배하는 선신들의 전쟁.

울타는 그곳에서 방관자를 자처했다.

비록 그녀는 어둠을 숭배하지만, 인간에게도, 빛을 숭배하는 신들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했다.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그저 고요히 바라볼 뿐.

그러나 어둠을 섬기는 다른 고대신들에게 그녀의 행동은 배신과 다름없었으리라.

[그 모습은 강신인가?]

허물은 아쉽다는 듯 입을 다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호진을 바라보고는 킥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서 너를 죽이진 못 하겠지만, 네 사도는 이곳에서 죽을 거야.]

흉흉한 기운을 흘리는 허물.

허물 안에서 칠흑 같은 어둠이 일렁인다.

끔찍한 힘이 당장이라도 흘러나올 듯했다.

이에 맞받아치듯 울타도 비웃으며 말했다.

[일단 정정하지. 이 사내는 내 사도가 아니다. 봉사자일 뿐. 그리고…….]

말을 멈춘 울타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듯했다.

[어디 한번 해 보거라. 이곳에 직접 강림해서라도 네놈의 살가죽을 뜯어내 주마.]

[헛소리. 이곳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다고? 자멸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럴 리가.]

[나의 진명을 걸고 그리하지.]

[…….]

울타의 말에 라멜은 잠시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것도 잠시, 분노가 치밀었는지 몸을 잘게 떨었다.

[……해봐.]

─쿠궁

성이 요동치듯 흔들렸다.

[나도 잠든 지 오래되긴 했지.]

저 땅 아래 깊은 곳에서 땅이 갈라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올라왔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의 기운이 발아래에서 느껴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

저 둘이 싸우면, 호진은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나갈 방법을 떠올려야 했다.

고민 끝에 호진이 고른 방법은 간단했다.

“잠시만. 할 말이 있다.”

[벌레가 어딜 감히…….]

호진의 말에 자극을 받은 건지 진동이 더욱 커졌다.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가 굴러떨어졌다.

둘은 조금도 기세를 거두지 않았고, 성의 진동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데니토.”

[…….]

호진의 말을 들은 라멜이 잠시 멈칫하며 진동이 멎어갔다.

“같은 고대 신이니 너도 놈을 잘 알고 있겠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벌레.]

“그 불사의 신은 지금도 자신의 영향력을 꾸준히 넓히고 있다. 이미 이쪽 세상의 왕국들은 물론 저쪽 차원에도 손을 뻗었지.”

불사의 신의 봉사자, 하얀 가면.

녀석은 차원을 넘나들며 각종 일들을 벌여왔다.

시리온 공국에서는 ‘굴라’를, 김포에서는 ‘이어 붙인 왕’을 만들어냈다.

그나마 호진이 막아낸 것만 해도 그 정도이다.

다른 일들을 얼마나 벌였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이름 없는 책’을 이용해 세력을 퍼트리거나 강력한 존재들을 만들고 있는 불사의 신은, 지금 두 세상을 통틀어 가장 위협적인 존재다.

즉, 그 말은…….

‘고대 신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으로 잘 나가고 있다는 말이지.’

듣기로는 고대 신들이라 해서 서로 사이가 좋은 게 아니었다.

선신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으니까.

“그런데 네가 이러고 있어도 될까? 당장 울타와의 싸움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힘을 소진한 네 운명은 뻔하겠지.”

지금은 어둠이 도래하고 빛이 물러나는 격동의 시기.

만약 지금 힘을 모으지 못하고, 오히려 소모해 약해진다면?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다.

이를 부정하듯 라멜은 더더욱 뱀같이 쉭쉭거리는 소리를 끌어올렸다.

[나도 사도가 있다. 지금쯤 저쪽 세상에서…….]

“미안하지만, 네 사도는 이제 없어.”

[……?]

호진에게 말이 끊긴 라멜은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침묵했다.

잠시 뒤, 라멜의 기세가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진짜 없……어?]

신이 자신의 사도의 기운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호진은 라멜이 자신의 사도가 사라진 걸 이제야 알았다는 걸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꽤 됐다. 왜 몰랐지?”

호진의 물음에 라멜은 짜증 내듯 툭툭 말을 내뱉었다.

[내가 왜 알아야 하지?]

“……너의 사도지 않나?”

라멜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사도? 결국 다 똑같은 벌레들이다.]

오만하다.

라멜의 시선에선 세상 모든 게 하찮은 미물들.

그것이 자신의 사도라 할지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것이 신……인가.’

호진은 경멸의 시선을 숨겨야 했다.

짜증 내듯 툴툴거리던 라멜은 김이 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간만에 일어났는데 거지 같은 상황이네. 아무래도 더 자야겠어.]

‘……!’

됐다.

협박이 먹혀들어 갔다.

반쯤은 운이었다.

만약 울타가 진심으로 목숨을 걸고 리스크를 얹어주지 않았다면, 라멜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으리라.

“퍼진 역병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호진의 물음에 라멜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내버려 두려고 했지만, 그랬다간 그쪽의 부엉이가 내 화신들을 모조리 잡아먹겠지. 모두 거둘 거야.]

‘남은 거라도 건져가야지’라며 중얼거린 라멜이 꼬리를 빳빳하게 하더니 가볍게 흔들었다.

─딸랑 딸랑

탁한 방울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는 장애물에 막히지 않고 그대로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그러자…….

─스스스슥

멀리서부터 무엇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소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마치 바람이 강하게 부는 갈대밭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이윽고 수천 마리의 검은 뱀의 형상을 한 것들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열린 문뿐만이 아닌.

벽 틈에서, 바닥에서, 천장에서.

라멜은 그런 녀석들을 지체 없이 모조리 집어삼켰다.

마치 고래가 작은 물고기들을 삼키듯 빨려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방 안에는 적막함만이 짙게 내렸다.

─우지직

그 순간 허물에서 검은색의 형체가 스르륵 기어 나왔다.

세모꼴의 머리를 가진 팔뚝만 한 뱀처럼 생겼지만, 눈도 코도 입도 없는 그것은 도저히 생명체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울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크기는 작지만…… 본래 모습과 닮았구나. 진짜 화신을 만들어냈어.]

“원래 저런 모습이라는 겁니까?”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다만 크기는 이 도시보다 거대하지.]

“도시…….”

호진은 숨을 삼켰다.

‘샴’조차 한눈에 담기 버거웠는데, 도시만 한 괴물은 어떨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신이란 모두 그렇게 거대한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호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혹시…… 울타 님도?”

[……그럴 리가 있겠느냐.]

울타는 어이없다는 듯이 답하며 호진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그때 라멜이 재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덧 허물을 완전히 빠져나온 녀석은 몸을 꿈틀거리다가 세모꼴의 머리를 벌름거렸다.

[깨어나자마자 다시 잠들어야겠군. 뭐 나쁘진 않지만.]

몸을 한차례 턴 녀석은 호진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나저나 벌레. 넌 정체가 뭐냐?]

대뜸 질문을 받은 호진은 의아해하며 답했다.

“이미 답한 것 같은데, 여기 울타 님의 봉사자…….”

[그것 말고. 네게서 다른 신격이 느껴진다.]

라멜의 세모꼴의 머리가 호진을 꿰뚫어 보듯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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