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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37화 (137/241)

137화. 사막의 황제 (4)

─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호진이 휘두른 검이 뒤로 튕겨 나왔다.

호진은 시큰거리는 손목을 쓰다듬으며 갈리온을 노려봤다.

“무슨 짓을 한 거냐.”

갈리온의 주변을 감도는 무형의 기운.

그것은 일찍이 호진이 경험해본 것이었다.

‘이 기운은 마치…….’

“힘을 더 모아서 신을 부르려 했지만 어쩔 수 없지.”

갈리온의 새하얗던 피부가 거뭇하게 물들어갔다.

회색으로 변한 피부 위에 검은색의 물결이 문신처럼 몸에 번져나갔다.

그는 호진을 바라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신이 우리의 목소리에 응하지 않는다면, 내가 신이 되면 그만이다.”

무언가 빠르게 바닥을 기어 호진의 옆을 지나쳤다.

꿈틀거리며 나아간 검은 물체는 갈리온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는가 싶더니 몸으로 흡수됐다.

그와 동시에 옆에서 들려오는 숨넘어가는 소리.

호진은 그제야 바닥에 널브러진 전사들을 바라봤다.

방금 숨이 끊긴 이의 목에서 뱀 문신이 유유하게 빠져나오고 있었다.

뱀 문신은 마치 주인들의 생명을 앗아가듯 몸에서 빠져나와 갈리온에게 향했다.

“꺽, 꺼어억…….”

“왕…… 이시여.”

호진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쓰러져있던 또 다른 전사들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살아 숨 쉬는 그들의 목에는 검은색의 뱀 문양이 목을 꽉 옥죄고 있었다.

어찌나 강하게 조였는지 움푹 팬 목 주변에는 푸른색 핏줄들이 툭 튀어나와 있다.

눈에는 핏발이 서고 입에는 거품이 인다.

일부는 그 힘을 견디지 목하고 목이 부러져 축 몸을 늘어트렸다.

하나둘 꺼져가는 생명들.

눈 깜짝할 사이에 홀에 있던 수많은 전사들이 모두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끝까지 왕에게 충성한 신하들의 말로인가.”

“아니, 그들은 새로 새워질 왕국의 주춧돌이 된 거다. 그들의 희생은 건국 역사로 기록되어 길이길이 전해지겠지.”

“끝내 미쳤군. 그렇게 얻은 힘으로 뭘 하겠다는 거지? 백성들의 시체 위에서 왕 놀음이라도 할 셈인가?”

“그럴 리가. 희생은 여기 있는 이들로 충분하다. 다른 이들은 나와 함께 새롭게 세워질 천년 제국의 첫 국민들이 될 게다.”

갈리온은 초월자다운 오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몸에서 힘이 느껴지는구나. 이것이 신이 된 감각인가?”

“…….”

호진은 대답 없이 조용히 그를 살폈다.

확실히 그에게선 이전에 없던 신과 그 사도들 특유의 ‘격’이 느껴졌다.

마치 ‘샴’이나 다른 신격들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막지 못했어.’

푸른색 불꽃에서 느껴지던 불쾌하고 위험한 감각.

사제들을 죽임으로 그것을 막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작금의 갈리온에겐 그것보다 몇 배는 위험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으니까.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로군.”

갈리온은 호진을 보더니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 걸려있던 여유로운 미소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갈리온은 필요하다면 거침없이 사람들을 희생하는 폭군이었지만, 그렇다고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신과 거래를 하려고 했다. 조금 더 시간을 들였다면 가능했겠지. 역병, 아니 축복이 퍼져나갈수록 신의 힘도 커질 테니.”

“…….”

“하지만 네놈이 방해한 덕에 이렇게 되었다. 신의 힘을 내가 직접 받아들여 신격을 얻었지.”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갈리온의 얼굴에 약간의 두려움이 스친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순서가 바뀌었을 뿐. 신과의 거래를 통해 내가 정당하게 얻었을 힘이다.”

갈리온에게선 익숙한 신격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착각이라 여겨졌지만, 틀림없다.

이 기운은…….

“라멜인가?”

그 이름에 갈리온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았지?”

“대답해줄 이유는 없지.”

호진은 대답에 잠시 노려보던 갈리온은 어느 순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하긴, 역병 형태의 화신을 지닌 것은 그분뿐이니.”

“역병?”

호진이 인상을 찡그리며 묻자 갈리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명 때문에 그분이라고 추측한 게 아닌가?”

“……내가 아는 녀석의 이명은 ‘시칸의 은둔자’다.”

“아, 그쪽인가? 꽤나 고리타분한 이명이군. 그분의 또 다른 이명은 ‘세상을 침식하는 역병’이지. 이것 하나하나가 모두 그분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갈리온이 내민 손에서 뱀 형태의 문신이 피부를 타고 스르륵 움직였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이곳까지 와서 또다시 라멜의 이름을 듣게 되다니.

자신은 라멜의 사도 ‘샴’을 죽였다.

‘딱히 나를 적대한다는 메시지가 뜬 적은 없지만…….’

결코 좋게 보지는 않을 터였다.

호진은 침착하게 갈리온의 힘을 살폈다.

‘느낌은 샴과 비슷하지만…….’

아직 그 격에는 한참이나 못 미친다.

사실 아직까지는 그리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호진에겐 ‘강신무’와 ‘강신’이라는 최후의 수단도 남아있었다.

‘문제는…….’

아직 그가 흡수할 수 있는 뱀의 형상이 저 왕궁밖에 수백, 수천이 남았다는 것이다.

가능한지는 둘째치더라도, 만약 그가 수천에 이르는 사람들의 힘을 전부 흡수한다면?

그때는 정말 신과 같은 힘을 얻을지도 몰랐다.

죽인다면 지금 빨리 죽여야 했다.

하지만 그전에 묻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이 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했지?”

“무엇을 말인가?”

“그 뱀 문신들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것 말이다.”

녀석의 말대로면 뱀 문신은 라멜을 상징하는 징표이자 화신이다.

그렇다면 역병에 걸린 사람들은 갈리온이 아닌 라멜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갈리온은 라멜의 사도도 뭣도 아니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갈리온의 명령을 따랐다.

심지어 지금은 갈리온의 몸에 들어가 힘을 빌려주고 있지 않은가.

그 힘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이런 일이 반복될 위험이 있었다.

이에 갈리온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만. 답해주다 보니 한도 끝도 없군. 슬슬 끝내도록 하지.”

“좋을 대로.”

호진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답했다.

최대한 정보를 끌어내려고 했지만, 이 이상 묻는 것도 모양새가 웃기기는 했다.

답을 듣지 못한 건 아쉽지만, 대화하는 동안 호흡은 가다듬었다.

‘단숨에 쓰러트려야 한다.’

호진은 인벤토리에서 황금색의 검을 꺼내 들었다.

검의 날이 조금 나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신을 부르기 위한 무구(巫具)로는 아직 쓸 만했다.

‘잘돼야 할 텐데.’

호진이 하는 강신무는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다.

신을 몸에 빙의시키는 대신, 힘만을 끌어오는 이질적인 형태.

저번에 강신무 이후 호진은 약간의 변형을 거쳐, 몸에 새긴 신당을 수정했다.

울타는 이카루스에게로 좌정시키고, 그 힘을 나눠 받는 것이다.

“스읍.”

호진이 들숨을 들이켜고 천천히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러곤 발로 바닥을 쓸 듯 미끄러지며 움직였다.

검을 어깨에 들쳐 멘 채, 통통 뛰어올랐다.

작은 진동이 주변으로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이를 지켜보던 갈리온이 괴이한 것을 봤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검무? 갑자기 미치기라도 한…….”

그때였다.

호진의 양팔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푸른색으로 빛을 쏟아냈다.

홀린 듯 호진의 팔에 새겨진 문양을 지켜보던 갈리온의 눈이 커졌다.

그것도 잠시 그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몸에 신당을 새겨 넣었구나. 어리석고 오만하다. 신의 소모품이 될 뿐이다.”

“네 걱정이나 해라.”

갈리온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신당을 제대로 갖추고 빙의를 해도 신을 받아들인 육체는 수명이 크게 줄어든다.

일반적으론 신의 격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진은 전혀 상황이 달랐다.

오히려 울타의 격과 힘을 호진이 끌어다 쓸 뿐이니, 소모품 취급을 당하고 있는 건 울타 쪽이라고 할 수 있다.

‘울타 님이 들었으면 많이 억울해했겠군.’

호진은 옅게 웃으며 계속해 검무를 이어갔다.

이에 갈리온도 더 말하는 대신 검 한 자루를 쥐어 들었다.

한쪽 팔도 없고, 수많은 무구를 몸에 두르지도 않았지만 위압감은 아까보다 더 강했다.

“시리온의 새로운 왕이 어떤 신을 모시는지 궁금하지만, 더 시간을 끌 수는 없지.”

검은색의 안개가 갈리온을 감싼다.

라멜 특유의 권능이 사방에 흩뿌려진다.

‘온다.’

호진은 튕기듯 뛰어올라 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붉은색 불티가 튀기며 두 형체가 뒤로 물러났다.

잠깐이지만 갈리온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진은 밀려나면서도 계속해서 검무를 이어갔고, 이를 방해하듯 갈리온은 계속해서 안개를 타고 이동하며 검을 부딪쳐왔다.

강신무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위험할 정도의 힘과 속도로 호진을 압박하는 갈리온.

하지만 강신무에 들어가며 호진의 신체 능력도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강해졌군. 하지만 오히려 이쪽이 편해.’

─서걱

호진이 휘두른 검이 갈리온의 가슴팍을 길게 갈랐다.

이에 갈리온이 비틀거리며 뒤로 크게 물러났다.

양쪽의 신체 능력이 비슷하기에, 검술 차이가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다.

물러난 갈리온이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호진을 응시했다.

갈라진 가슴의 살이 벌어져 붉은 선혈을 주룩주룩 쏟아냈다.

‘젠장, 얕았나.’

명백한 치명상이지만 상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가능하면 방금 기회에 팔 하나 정도는 더 가져가고자 했다.

“……어째서지?”

“뭐가 어째서냐는 거지? 네 검술이 나보다 못한 이유를 묻는 거냐?”

호진의 물음에 갈리온이 이를 부드득 갈며 답했다.

“……그게 아니라, 어째서 라멜 님의 권능을 네놈이 쓸 수 있었는지를 묻는 거다.”

“아. 그거.”

호진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모래시계’를 이용해 호진은 라멜의 권능을 사용했었다.

아까만 해도 갈리온은 호진이 사용하는 힘이 라멜의 권능인지조차 몰랐지만, 라멜의 신격을 얻어 사용하며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호진은 갈리온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자신이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일에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녀석은 처음으로 평정을 잃었다.

‘좋았어.’

이렇게 되면 싸움은 쉬워진다.

위기에 몰린 사람들은 늘 그것을 타파하고자 도박을 하기 마련이다.

호진이 할 것은 그것을 잡아채는 것뿐.

‘놈을 더 흔든다.’

호진은 비실거리며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글세,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답해줄 이유가 있나?”

“…….”

“농담이고, 말해주지. 내가 라멜의 권능을 사용하는 이유는 간단해.”

갈리온은 마른침을 삼키며 호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에게 호진과 라멜의 관계성은 정말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부하들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바친 이상, 이제 라멜은 그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니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놈의 질문에 답했다.

“그건 바로 라멜의 사도 ‘샴’을 죽이고 뺏었기 때문이다.”

“……?”

“……?”

호진의 선언에 갈리온도, 전투를 지켜보던 아르바흐와 구르드도 눈을 껌뻑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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