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36화 (136/241)

136화. 사막의 황제 (3)

“뭐를?”

“시치미 떼지 마라. 내 무구의 능력을 미리 알고 있지 않고서야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지 않느냐.”

호진이 판단을 내린 근거는 간단했다.

‘실제로 무구들의 능력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호진은 무구들에게 쫓기면서 단순히 그것들을 쳐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무구들의 능력을 ‘감시자의 눈’으로 확인하고 외운 것이다.

호진의 심장을 노리던 ‘항마검’은 ‘마력’과 ‘기’를 모두 무력화하는 무구다.

만약 호진이 호신강기를 믿고 막지 않았다면 심장까지 파고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진은 ‘기’를 두르지 않은 맨손으로 잡아채 공격을 파훼했다.

물론 보물이라 불리는 날붙이인 만큼 예기도 뛰어나기에 호진의 손은 찢어지고 피가 쏟아졌지만, 달리 말하면 그것뿐이었다.

호진에겐 잠깐이면 회복될 아주 가벼운 상처다.

반면 호진의 머리를 으깨버릴 기세로 휘둘러진 워해머의 이름은 ‘탐식의 망치’.

자신과 맞부딪친 상대의 무기를 크게 상하게 하거나 부숴버리는 무구다.

그러나 정작 가로막는 무기가 없다면, ‘탐식의 망치’는 평범한 철망치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 공격은 ‘항마검’과 달리 호진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했다.

‘공략 패턴을 파악한 셈이지.’

만약 호진이 ‘항마검’을 호신강기로 막으려 했더라면.

혹은 ‘탐식의 망치’를 검으로 쳐냈더라면.

어느 쪽을 택했던 죽거나 그에 준하는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

하나, 호진은 둘 다 택하지 않고 공격들을 파훼했다.

그것은 모든 무기의 특성을 외운 호진만이 가능한 기예였다.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제와 감출 수도, 필요도 없는 정보였으니까.

“그랬군. 무구들의 능력을 알고 있었던 게야. 그래, 그렇지 않으면 그리 쉽게 짐의 무구들을 파괴할 수 있었을 리가 없지.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갈리온이 자조하며 설핏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는 허망함과 어이없음이 묻어났다.

그때였다.

─쿵! 우지끈

무언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홀의 문이 활짝 열렸다.

자신의 병사들의 증원이라도 기대한 것일까.

갈리온의 표정에 희미하게나마 빛이 깃들었다.

“호진 님! 저희가 왔습니다!”

워해머로 문을 부순 아르바흐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해라. 아르바흐!”

“이쪽도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된 것 같군요.”

그 뒤를 구르드와 예은이 이어서 들어왔다.

그들의 몸은 피칠갑이 되어있었다.

일찍이 왕성에 도착했지만, 몰려든 지원군들을 처치하다가 늦은 것이었다.

갈리온은 한참이나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서 있다가 중얼거렸다.

“……짐이 이렇게까지 몰릴 줄이야.”

그러곤 비틀거리며 왕좌로 가 앉았다.

이를 묵묵히 지켜보던 호진이 입을 열었다.

“이제 치료법을 말할 마음이 좀 들었나?”

“치료법이라…….”

잠시 호진을 말을 곱씹던 갈리온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가 웃기지?”

호진은 가볍게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병에 걸려 고통받는 자들이 늘어가는 중이다.

용재의 말에 의하면 ‘대망루’의 푸른 늑대 기사단조차 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시리온의 국민들까지 말이다.

수현도 걸렸으니, 어쩌면 게이트 너머의 캠프의 사람들도 감염될 가능성을 열어둬야 했다.

현재의 사태는 어쩌면 예상보다 더 위험한 상황일지도 몰랐다.

‘한데…….’

갈리온의 태도가 자꾸 거슬렸다.

자조적으로 웃던 것도 잠시, 갈리온은 여전히 당당한 표정으로 호진을 응시했다.

“치료란 병을 낫게 하는 행위가 아닌가? 그러니 웃길 수밖에. 이건 축복이다. 시리온의 왕.”

“헛소리군.”

호진은 일말의 여지도 없이 답했다.

병에 걸린 후, 뱀 문신이 목에 새겨진 이들을 봤다.

이지를 잃고, 그저 무언가에 홀린 듯 명령을 수행하는 이들.

“그런 괴물이 되는 게 축복이라고? 저주를 잘못 말한 거겠지.”

“너는 모른다. 우리 아쉬나학 제국 사람들의 삶을……!”

호진을 바라보던 갈리온의 눈동자에 붉은 실핏줄이 섰다.

목에는 푸른 핏줄이 돋아나고 악문 이에서는 뿌드득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샴의 등장 이후로 시칸은 점점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이 됐다. 오아시스와 강줄기는 메마르고, 비옥하던 땅은 모래밭이 됐지. 심지어 점점 몬스터들의 습격이 잦아지고, 낮에는 사람의 피부를 익히는 열풍과 밤에서는 동사할 수준의 추위가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

가리온의 말에 호진은 입을 다물었다.

듣고 싶던 답은 아니었지만, 지금 가리온의 말이 현재의 상황과 관련이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호진은 궁금했었다.

이 사막에서 어떻게 이런 규모의 사람들이 모여 살아갈 수 있을까.

풀도 열매도 고기도 없는 이 지하에 수천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밖에는 황폐한 도시와 사막뿐.

애초에 시칸은 인간이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이었다.

갈리온의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선조들이 자고 나란 땅이었지만, 이곳에서 더 이상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디로든 가야 했지. 하지만 북쪽으로는 협곡이 있고, 서쪽으로는 시리온, 네놈의 왕국이 있었다.”

시칸의 남쪽과 동쪽은 전부 망망대해.

제국의 비호를 받는 시리온도 난쟁이들이 지키는 협곡도, 약해진 아쉬나학의 국력으로는 어쩌지 못했으리라.

즉, 그들은…….

“우리는 이곳에 버려졌다.”

갈리온은 씹어뱉듯이 말했다.

핏발서고 번들거리는 눈동자에선 더 이상 이전의 여유로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굶어 죽고, 몬스터에게 찢겨 죽고, 부족한 자원을 두고 서로 싸워 죽였다. 그런 우리에게 남겨진 미래는 오로지 죽음뿐. 그게 진짜 저주라는 거다. 시리온의 왕.”

“…….”

“그래서 나는 결정했다. 신의 힘을 빌려 사람들을 살리겠다고.”

갈리온이 일렁이는 푸른 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이 덤덤하게 물었다.

“그게 병을 퍼트린 이유라고?”

“축복을 받은 자들은 더 이상 먹거나 자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 오직 나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일꾼이 되지. 축복에 걸린 자들은 모두 새로운 아쉬나학 제국의 국민이 되는 것이다. 아쉬나학은 이전보다도 더 거대하고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겠지.”

갈리온은 이미 호진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꿈을 꾸듯 황홀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상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의 생각은 잘못됐습니다!”

호진과 갈리온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아르바흐였다.

아르바흐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국의 사람들을 위해서라 했지만, 정작 그들한테 물어본 적은 있습니까? 사람들이 꼭두각시가 되는 것도, 아쉬나학의 번성도. 모두 당신의 욕망 아닙니까!”

아르바흐가 보기 드물게 흥분했다.

이에 갈리온은 우습다는 듯 냉소했다.

“바룩크툼의 지도자라 하여 기대했건만…… 기대 이하로군.”

“……무슨!”

“지도자란 신민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 그들의 삶과 운명을 걸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자를 말한다.”

갈리온이 아르바흐를 차갑게 식은 눈으로 응시했다.

건조하게 마른 그 시선은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 시선에 아르바흐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어떤 모습이 되더라도 나의 신민들이 살아남는 것을 선택했다. 네게 내 결정을 비웃을 자격이 있나? 답해봐라, 아울레의 후예여.”

“나는…… 그러니까…….”

아르바흐는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대안이 없는 비판은 쉬웠다.

갈리온의 선택은 독선적이고 반인륜적이며 부도덕하다.

사람들의 동의 없이 그들의 자유를 억제했고, 자신의 신민과 나라를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강요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모두 같이 서서히 죽어갈 뿐.’

자신이 지도자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만 하다가 시기를 놓치지 않았을까.

사람들의 원한 섞인 한탄을 들으면서 말이다.

그에 비하면 갈리온은 지도자의 역할에 나름대로 충실했다.

그는 적어도 문제를 해결한 방법을 찾아 헤맸고, 그 끝에 결단을 내렸다.

자신에게 주어질 불명예와 죄책감을 모두 감내하면서.

아르바흐가 입술을 세게 물자 입에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부끄러웠다.

그러던 그때, 호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갈리온의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아르바흐.”

“……예.”

아르바흐는 부끄러움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어진 호진의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틀린 말입니다.”

“……?”

아르바흐가 되묻기도 전, 반응한 것은 다름 아닌 갈리온이었다.

“무엇이 틀렸다는 거지?”

“네 입장에서 너의 계획을 방해하는 우리는 ‘악’일 거다. 하지만 반대로 묻지. 죄 없는 시리온의 국민들과 내 사람들을 이성도 없는 괴물로 만들려고 하는 너는, 나에게 뭘까?”

“…….”

잠깐의 정적 후 호진은 말을 이었다.

“‘악’이다.”

결국 정의라는 것은, 선과 악이라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시선과 판단의 결과였다.

자신의 신념과 정의는 타인에게 불행일 수 있었다.

절대적인 ‘정의’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갈리온. 너는 지도자로서 선택을 내렸다. 그것이 옳다 그르다 판단하진 않겠다. 다만, 네 선택은 나에게 있어서 ‘악’이다. 그건 너도 부정할 수 없겠지.”

호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나의 신념과 너의 신념은 맞부딪쳤고, 너는 너의 신념을 관철하지 못했다.”

갈리온은 탁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호진의 눈을 마주 볼 뿐이었다.

갈리온은 패배했다.

신념이라는 것은 관철해낼 힘이 있어야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지금 너를 포함해 아쉬나학 사람 전부를 몰살해도 너는 저항할 수 없다.”

“…….”

갈리온이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그것을 지켜보던 호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러고 싶진 않으니 새로운 선택지를 주마. 아쉬나학의 난민들을 시리온으로 수용하겠다. 대신 치료법을 말해.”

“…….”

“거절한다면 너를 베고, 이곳의 병자들을 모두 죽이겠다.”

이것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담이었다.

호진은 이외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호진의 제안에 갈리온의 동공이 가볍게 떨렸다.

한번 떨어졌던 입술은 다시 다물어져 한참이나 정적이 흘렀다.

“그건 마음에 드는구나.”

“그래, 그러면 어서…….”

“다만 거절하도록 하지.”

갈리온은 피를 많이 흘린 까닭에 온몸이 하얗게 질린 채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언뜻 보면 시체가 말을 하는 듯했다.

“……이유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사제들이 키워나가던 푸른색의 불꽃은 불쾌한 감각과 함께 잦아들고 있었다.

그를 지키던 전사들은 모두 죽거나 다쳤고, 본인이 자신하던 무구들도 모두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

다른 방법이 남았다는 걸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갈리온이 내뱉은 말의 의미는 명백히 거절이었다.

그렇다면 호진이 할 일은 하나.

갈리온을, 이곳의 모든 병자들을 베어내는 것뿐이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자신이 뱉은 말은 지켜져야 했다.

호진은 거침없이 갈리온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