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사막의 황제 (2)
호진은 왕좌 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갈리온을 바라봤다.
자신을 따르던 전사들이 모두 제압당했음에도 갈리온은 여전히 오만한 채였다.
‘믿는 구석이 있나.’
갈리온은 힘으로 사람을 거느리는 폭군이었다.
망해버린 제국의 후계자라는 것만으로는 이 정도의 세력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터.
그런 그가 믿는 건 아마 일신의 무력일 것이다.
“이만 사라져라. 소국의 왕.”
갈리온이 손을 휘적이자, 뒤에 놓여있던 여러 개의 창이 섬광처럼 날아들었다.
호진은 날아드는 창들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응시했다.
궤적이 읽힌다.
‘감시자의 눈’으로 단련된 시야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벗어났다.
─카강!
호진이 칼을 휘둘러 창의 날붙이 부분들을 정확히 맞받아쳤다.
쇠와 쇠가 부딪치며 붉은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금속음과 함께 비릿한 쇠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지막으로 날아든 창까지 쳐낸 호진은 조용히 갈리온을 바라봤다.
“…….”
공동에는 눅눅한 적막이 들어앉았다.
호진은 빛과 같은 속도로 날아든 창들을 모두 막아냈다.
그런 호진을 멍하니 바라보던 갈리온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허…….”
그는 이내 웃음을 멈추곤 싸늘하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진심으로 놀랐군. ‘12개의 창’을 막아낸 이는 그대가 처음이야.”
“그런가? 그리 대단치는 않던데. 하긴, 전사들 실력이 형편없더군.”
호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손에는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생각보다 더 빨라.’
사실 예상보다 훨씬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창은 비유가 아니라 정말 빛줄기 같은 속도로 쏘아졌다.
그런 공격이 하나도 아니라, 여러 개가 폭풍처럼 쏟아지는데 어찌 위협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호진은 이 공격을 이미 한 번 봤다.
예의 약탈자 대장을 죽일 때 말이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예상을 했고, 대비했기에 막아낼 수 있었다.
‘만약 몰랐다면 꽤나 애먹었을지도.’
호진은 긴장을 숨기며 손에 난 식은땀을 슬쩍 옷에 닦아냈다.
별거 아니라는 듯한 호진의 태도에, 갈리온의 표정은 빠르게 굳어갔다.
“……미안하게 됐군. 나도 제대로 해야겠어.”
‘옥새?’
갈리온이 왕좌의 손잡이에 뒀던 옥새를 비틀자 톱니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끼릭 달칵
그 순간, 왕좌로 이어지는 길 양쪽으로 바닥이 갈라지며 무수한 무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나 많은지 이곳이 대전이 아니라 무기 박물관이라 해도 믿을 수준.
‘저 옥새도 열쇠였나.’
어찌 된 게 이곳의 옥새들은 하나같이 열쇠의 역할을 겸하는 듯했다.
B급 블록버스터 영화에 나올법한 설정에 호진이 인상을 찌푸리기도 잠시.
왕좌에서 몸을 일으킨 갈리온이 무기들의 이름을 읊조렸다.
“당천, 비즈류, 단죄검, 이스톨로노, 스팅…….”
갈리온의 입이 움직일 때마다 화려한 무기들이 저절로 움직여 그의 주위를 둘러쌌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무기들은 한눈에 봐도 어설프게 만들어진 무구가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기이하면서도 뛰어난 기세를 뿜어내는 명기들.
순식간에 갈리온의 주위를 메운 날붙이들은 마치 한 무리의 군세와 같았다.
“그럼 계속하지.”
갈리온은 이전과 달리 굳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특유의 여유만큼은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런 갈리온을 보며 조급해진 것은 호진의 쪽이었다.
‘미치겠군, 분명 이 정도로 고전할 상대가 아닌데.’
갈리온의 경지 자체는 분명 높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지닌 무기들이다.
하나, 하나가 고유의 이름을 지닌 보물들로, 감시자의 눈에는 그 능력들이 보였다.
「적화(敵火) 이스톨로노」
「종류: 단창」
「제한: 아쉬나학 제국의 후예만이 사용 가능한 국보.」
「정보: 옛 제국의 명장 이스톨로노의 애병. 찌른 상대를 불태우는 복수의 창.」
「단죄검」
「종류: 검」
「제한: 아쉬나학 제국의 후예만이 사용 가능한 국보.」
「정보: 저주로 인해 이 검에 베인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검의 주인이 죽으면 저주가 취소된다.」
아무리 갈리온의 경지가 낮다고 한들, 한 번이라도 당하면 치명적인 무기를 온몸에 두르고 있었기에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갈리온의 손에 들린 옥새였다.
「아쉬나학의 옥새」
「종류: 아티팩트」
「제한: 아쉬나학 제국의 후예만이 사용 가능한 국보.」
「정보: 모든 국보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만들어주는 지고의 열쇠.」
「왕가의 정통성을 증명하며, 아쉬나학 제국에 한정해 절대적인 명령권을 지닌다. 추가적으로 위엄의 효과를 증폭한다.」
허공에 떠서 갈리온의 주위를 맴도는 무기들은 마치 소설 속 이기어검을 보는 듯했다.
아무리 호진이라도 이런 무기들을 동시에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젠장, 시리온의 옥새랑은 비교도 되지 않는군.’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더니.
망해버린 옛 제국의 후예가 지닌 보물들은 입이 벌어지기에 충분했다.
‘근데…….’
아까부터 거슬리는 게 하나 있다.
호진은 그런 감상을 숨기며 연기를 이어 나갔다.
“계속하자고? 좋지.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어.”
그런 호진의 대답에 갈리온이 표정을 구기는 순간이었다.
“근데, 그전에 말이지…….”
말을 하던 호진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모습을 감췄다.
“무슨…… 도망인가?”
이에 갈리온이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상대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음에도 갈리온은 두렵지 않았다.
은신으로 모습을 감췄든, 순간 이동처럼 접근해오든 자신의 무구를 피해 갈 순 없다.
만약 상대가 자신을 기습하려 한다면, 자신을 지키는 무구들이 상대를 꿰뚫을 터였다.
─서걱
그러나 순간 갈리온의 양옆에서 절삭음이 들려왔다.
왕좌의 옆에서 조용히 타오르던 푸른색의 불이 꺼질 듯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검은 안개에서 모습을 드러낸 호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제들의 목을 잘라낸 것이다.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사제의 머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와 동시에 호진은 아까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와 갈리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부터 주절주절거리는 게 너무 시끄럽더라고.”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느꼈던 불쾌한 감각의 근원.
그것은 다름 아닌 푸른색의 불꽃이었다.
왕좌 양쪽에 놓인 철제 화롯불에선 장작도 없이 끊임없이 불이 일렁였다.
사제들의 염과 같은 주문이 이어질수록 불쾌한 감각은 점점 극대화되었다.
호진은 본능적으로 이를 막아야 한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왕은 그들이 없는 듯 행동했다.
정확히는 호진이 그들을 신경 쓰지 않길 바라는 듯 보였다.
그렇기에 호진은 모래시계라는 비장의 수를 꺼내 들어 그들을 노렸다.
그리고 그 선택이 정답이었음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뿌드득
갈리온의 이가는 소리가 홀에 사납게 울렸다.
“……놈.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게다.”
갈리온은 처음으로 여유를 잃고 분노했다.
제대로 짚었다는 말이었다.
호진은 대답 대신 조용히 검에 묻은 피를 털었다.
더 이상 도발은 필요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진짜 싸움뿐.
‘지금 단기 결전을 노리는 건 무리다.’
놈이 몸에 두른 보물들은 호진의 어떤 기술도 흘려낼 터였다.
호진이 상대하는 것은 전사가 아닌, 요새다.
지금 놈에게 달려든다는 것은 맨몸으로 공성전을 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호진이 선택한 방법은…….
“죽어라.”
갈리온이 손을 휘두르자 수십의 창칼이 날아들었다.
그것들은 마치 자의식을 가진 듯, 호진을 찌르고 베기 위해 사방에서 휘둘러졌다.
마치 실체가 없는 적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호진의 검이 ‘이스톨로노’를 쳐내는 순간, 이름 모를 단검이 목덜미를 노리고 찔러왔다.
1척도 되지 않는 거리.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 순간 호진의 신형이 재차 흐릿해지며, 단검은 허공을 갈랐다.
다음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진 호진은 어느새 허공을 가른 무기 옆에 서 있었다.
호진은 곧장 검과 부딪치며 갈피를 잃은 이스톨로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직
그러자 마른 장작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이스톨로노의 창대가 반으로 쪼개졌다.
이스톨로노는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고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
이를 지켜보던 갈리온의 표정이 한층 더 사납게 일그러졌다.
반면 호진은 가볍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국보니 뭐니 해도 결국은 수백 년이나 된 무구들이다.
아무리 뛰어난 병기라도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내구도가 좋을 수가 없었다.
‘난공불락의 요새도 하나씩 파훼하면 그만이다.’
성을 공략하기 어렵게 하던 해자를, 높게 솟은 망루를 무너트린다.
그리고 끝내는 높디높은 성벽마저 허물어버린다면 힘없는 왕만이 남을 터.
생각을 마친 호진은 검을 꼬나쥐었다.
‘서둘러야겠어.’
말은 쉽지만 호진도 결코 여유롭지는 않았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수였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제한 없이 사용 가능한 이동기.
‘모래시계’, 즉 라멜의 성유물 덕분이었다.
‘모래시계’가 유지되는 시간은 180초다.
순간이동이 가능한 시간도 180초뿐이라는 말이다.
“시작해보자고.”
호진의 중얼거림과 함께, 수십의 날붙이가 호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호진은 아슬아슬하게 그 공격들을 피해가며 무기를 파훼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동하면 무구들이 따라 쇄도했다.
사방에서 금속음이 울려 퍼지고 무구들이 사정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호진은 물론 갈리온도 이를 악문 지 오래다.
여유롭고 오만하던 모습이 휘발되고 남은 건, 끓어 넘치는 투쟁의 열기였다.
그렇게 수십 점의 무구를 파괴한 시점이었다.
‘빈틈이다.’
호진은 드디어 갈리온의 몸을 뒤덮고 있던 무구들 사이에서 빈틈을 발견했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릴 스쳤지만, 더 시간을 끌기는 어려웠다.
모래시계의 사용 시간이 끝나가기 때문이었다.
‘함정이라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모래시계의 제한 시간을 알았다면, 놈이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호진은 도박을 걸었다.
지속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모래시계를 사용해 갈리온의 빈틈을 향해 이동했다.
그것을 확인한 갈리온의 입가엔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잡았다. 애송이!”
갈리온의 외침과 동시에, 호진은 심장을 꿰뚫을 기세로 날아드는 단검과 머리 위로 떨어지는 워해머를 볼 수 있었다.
‘역시 함정이었군.’
검을 휘두르면 갈리온을 벨 수 있는 거리.
그러나 갈리온을 베기 전에 호진이 먼저 죽을 터였다.
운이 좋아도 동귀어진이다.
상식적으로 수비를 택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
‘그런 심리를 이용한 함정이다 이거지? 머리 좀 썼네.’
호진은 피식 웃으며 날아드는 단검을 맨손으로 낚아채고, 워해머는 무시한 채 검을 휘둘렀다.
예상대로 검이 갈리온을 베기 전, 워해머가 호진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서걱
반대로 호진이 휘두른 검은 옥새를 쥐고 있던 갈리온의 팔을 잘라냈다.
잘려 나간 팔과 함께 갈리온의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무기들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갈리온은 피가 솟는 팔을 부여잡은 채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잠시 입을 닫고 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호진을 응시하던 녀석은 씹어뱉듯이 말했다.
“어떻게 안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