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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34화 (134/241)

134화. 사막의 황제 (1)

호진이 문을 열며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지독한 악취였다.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호진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린 채 문을 마저 열었다.

어둑한 실내에는 왕좌의 좌우로 푸른색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왕궁보다는 신전에 가까운 분위기.

호진이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공기가 달라졌다.’

한층 더 무겁고 끈적거리며 불쾌한 감각이 온몸을 짓눌렀다.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움직임에 저항이 느껴진다.

호진은 그 감각을 몸에 익히며 왕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우선 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푸른색 불꽃이다.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사제 둘이 각각 불꽃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언어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이전의 샴이 내뱉었던 주문과도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

“음?”

왕좌에 앉아 있던 갈리온은 마침내 호진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호진을 뚫어져라 바라본 갈리온은 그제야 호진을 떠올렸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도 잠시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는 무슨 일인가? 시리온의 국왕이여.”

“물어볼 게 있다.”

“그런가? 그런데 지금은 곤란하군. 보다시피 중요한 의식을 치르는 중이라서 말이지.”

─스륵

어느새 호진의 뒤를 제외한 주위를 전사들이 둘러쌌다.

‘대략 50명인가.’

상당한 수준의 전사들이다.

주변을 훑던 호진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한 명은 용재 이상인가.’

복장으로 보나 서 있는 위치로 보나 분명 높은 직책일 터다.

그래도 어렵지 않게 제압이 가능할 터.

걱정은 없다.

다만.

‘문신이군.’

놈들의 목에 새겨진 검은색의 뱀들이 눈에 들어온다.

의심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호진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협박하는 건가?”

“충고하는 게지. 그러니 그만 지껄이고 물러가도록. 더 이상의 무례는 용서치 않아.”

“나야말로 더 이상 참지 않는다. 묻는 말에 대답해라.”

호진의 대답에 주변이 싸늘하게 식었다.

호진을 둘러싼 전사들은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게 자세를 취했다.

그들이 쥔 시미터의 끝부분이 살짝 모습을 드러내 빛났다.

“그거 조금이라도 더 뽑으면 죽는다.”

호진은 차갑게 읊조리며 전사들을 바라봤다.

그 시선과 맞닿은 전사들은 흠칫하며 몸을 굳혔다.

긴장되는 분위기 속.

갈리온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못 참겠다는 듯 한참이나 끅끅거리고 웃던 녀석이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그래. 뭘 믿고 그리 당당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물어보게. 답해주도록 하지.”

“……좋아.”

예상치 못한 전개에 호진은 떨떠름하게 답했다.

‘차라리 전사들을 제압한 후 답해줬다면 더 신뢰가 갔을 텐데.’

호진은 갈리온의 기행에 찝찝해하면서도 이어서 물었다.

“내 사람 한 명이 이곳에 잡혀 왔다. 어찌 된 일이지?”

“고작 그건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오다 보니 누군지 짐작도 안 가지만…… 그 사람은 죽었나, 살았나?”

“살아있다.”

“그럼, 간단하군. 자네가 데리고 돌아가게. 보상은 넉넉히 챙겨주지. 이제 됐나?”

갈리온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에 호진은 무덤덤하게 답했다.

“살아있지만 병에 걸렸지. 이곳에 유행하는 병인 듯한데. 치료법이 필요하다.”

“…….”

귀찮아하던 갈리온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하지만 호진은 멈추지 않았다.

“목에 뱀 문양 문신. 병에 걸린 후 사람들은 그런 문신이 생기더군. 그런 병은 처음 봤어.”

호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

두 눈에는 푸른색의 예기가.

목소리에는 확신이 깃들었다.

“이 병은 고대신과 관련이 있나?”

병처럼 보이지만 병이라기엔 그 증상이나 형태가 기이하다.

앓다가 어느 순간 나아버리는 병.

그 후에 몸에 새겨지는 뱀 모양의 각인.

언행이 꼭두각시처럼 변해버린 인간들.

만약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틀림없이 고대신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특히 ‘불사의 신의 봉사자’들과 유사한 점이 걸렸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호진의 뒤에 열려있던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전사들은 어느새 호진의 뒤까지 둘러쌌고.

이에 호진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런 호진을 보며 갈리온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짐은 정말 자네를 보내주려 했네.”

“지금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네 허락 따윈 필요하지 않아.”

호진의 말에 갈리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젠 아니네. 자네는 선을 넘었어. 고작 자네 하나로 무슨 문제가 생길까 싶긴 하지만, 오랜 기간 준비해온 일에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되겠지.”

하지만 못내 아쉽다는 듯 갈리온은 혼자 중얼거렸다.

“자네가 북쪽의 난쟁이 왕국까지 병을 퍼트려준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역시 너였군.”

예상대로였다.

이곳의 지도자 갈리온, 그가 이 사태의 배후에 있었다.

갈리온이 손짓하자 전사들이 호진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오며 시미터를 뽑아 들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호진은 망설임 없이 ‘위엄’ 스킬을 발동시켰다.

─띠링

「스킬 ‘위엄’이 발동됩니다. 주변 500m 안의 중립, 혹은 적들이 상태 이상에 빠집니다. 본인이 지닌 격에 따라 저항할 수 있습니다.」

「‘위엄’을 상쇄하는 것이 근처에 존재합니다. 스킬이 약화됩니다.」

‘……?’

다가오던 전사들은 멈춰 섰지만, 쓰러지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호진이 의아해하던 순간이었다.

왕좌에 앉은 갈리온이 비실비실 웃음을 터트렸다.

“어떤가? 자네가 믿어온 힘이 통하지 않는 기분은?”

“뭘 한 거지?”

호진의 물음에 갈리온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자네가 짐의 중기병들을 제압했을 땐, 꽤 놀랐다. 그런 무용을 지닌 자를 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으니까. 하지만 자네가 옥새를 보여준 순간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지.”

갈리온은 무언가를 집어 들어 흔들어 보였다.

주먹만 한 크기의 금덩어리가 허공에서 반짝였다.

‘아쉬나학 제국의 옥새인가.’

갈리온은 여전히 만족스러운 웃음을 한 채 말을 이었다.

“‘위엄’이라. 어째서 시리온 같이 자그마한 공국의 왕이 그 힘을 쓸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원래 ‘패왕의 길을 걷는 자’들의 것이네. 우리 아쉬나학 제국과 같은.”

“너도 ‘패왕의 길을 걷는 자’라는 건가.”

익숙한 단어에 호진은 인상을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패왕의 길을 걷는 자.

여러 가지 추가 효과와 스킬 ‘위엄’을 사용 가능하게 하는 칭호다.

아마 두 칭호를 지닌 이들이 만나면, 효과가 상쇄되는 모양.

일이 귀찮게 됐다.

그런 호진의 반응을 즐겁다는 듯 지켜보던 갈리온이 냉소하며 말했다.

“소국의 왕이라는 지위와 알량한 능력에 취해 설치던 모습은 아주 볼 만했다. 이제 그만 죽도록.”

갈리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사들은 재차 호진을 향해 검을 휘둘러왔다.

전사들은 승리를 확신하며 입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정작 호진은 날아드는 칼들을 귀찮다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캉!

“……?”

“……이게 무슨?”

전사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칼이 호진의 몸을 파고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몸은커녕 천으로 된 옷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마치 통짜로 된 철을 친 듯 전사들의 검이 불꽃을 내며 허공에서 튕겨났다.

“절정에 이른 기사!”

갈리온을 지키던 근위대장이 놀라 소리쳤다.

호진이 몸에 은은하게 두른 ‘기’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근위대장은 경악을 감추기 어려웠다.

이처럼 흔들림 없이 완벽한 기의 운용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전사들이 황급히 몸을 빼려던 순간이었다.

“늦었어.”

호진은 피식 웃으며 칼자루를 꼬나쥐었다.

─서걱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번의 절삭음이 실내에 울려 퍼졌다.

집중해서 듣지 않았다면 분명 한 번의 절삭음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 순간 호진을 둘러싼 이들의 몸에서 피들이 솟구쳐 올랐다.

붉은 피 안개가 연무와 같이 주변을 축축하게 적셨다.

“끄아아아악.”

사방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피를 흩뿌린 전사들은 팔다리의 힘줄이 잘려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 수만 두 자리에 이르렀다.

“……!”

호진이 선보인 신위에 남은 전사들은 쉬이 움직이지 못했다.

마른침을 삼킨 근위대장이 자신의 왕을 바라봤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표정의 갈리온.

그는 대답 대신 손을 까딱였다.

“존명.”

근위대장은 대답과 동시에 검을 뽑으며 호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른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이 마치 불에 달려드는 나방을 보는 듯해, 미련해 보이면서도 안타까웠다.

‘죽일 필요는 없겠지.’

호진은 그런 전사들의 팔다리의 힘줄을 어렵지 않게 끊어냈다.

재차 사방에 피가 솟구쳤다.

다만, 근위대장만큼은 어쩔 수 없이 양쪽 팔을 전부 베어야 했다.

그만큼 위협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툭

근위대장의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킨 호진은 갈리온을 향해 다가갔다.

더 이상 둘 사이를 가로막는 방해물은 없었다.

“미안하게 됐어. 기대와는 달라서.”

호진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젠 더 이상 자신의 손패를 숨길 필요가 없었다.

“나에겐 국왕의 지위도, ‘위엄’도 가진 것들 중 지극히 일부일 뿐이거든.”

“……확실히 이건 예상하지 못했군.”

갈리온은 최대한 담담하게 답했지만 불쾌한 감정을 전부 숨기진 못했다.

갈리온의 그런 반응은 솔직히 말해 아주 유쾌했다.

‘이걸 일행들이랑 같이 봤어야 하는데.’

특히 아르바흐가 본다면 아주 좋아했을 거다.

저번 만남 때는 상당히 분해 보였으니까.

문뜩 그런 생각을 하던 호진은 감정을 갈무리하며 질문했다.

“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말해. 그러면 살려줄 수도 있어.”

호진의 말에 갈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 반응을 본 호진이 인상을 썼다.

“그깟 게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아니면, 내 말이 우습게 들렸나?”

“아니.”

갈리온은 재차 고개를 젓더니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자네는 짐을 안 죽이는 게 아니라 못 죽인다.”

“……왜?”

호진은 되물으며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어둠 속에서도 호진의 검이 은은하게 빛을 흩뿌렸다.

“치료법 때문에 못 죽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난 내 사람들에게 약속했거든.”

지켜주진 못할 수 있어도 복수만큼은 꼭 해주겠다.

그것이 호진의 약속이었다.

호진을 따르는 모든 이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수현에게는 미안하지만…….’

호진은 정치나 거래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자신이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켰다.

그렇기에 호진의 말에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이 있었다.

호진은 갈리온의 대답에 따라 정말 그를 벨 생각이었다.

“팔 한쪽이라도 날아가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지.”

시간은 충분히 줬다.

잠시 갈리온을 바라보던 호진이 검을 치켜드는 그 순간이었다.

갈리온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짐이 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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