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대사막 시칸 (3)
호진은 사절을 따라 유적지로 들어섰다.
멀리서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실제론 메마르고 황폐해서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무언가에 파괴된 듯 거칠게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생활하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맞나?”
호진이 의아해하며 묻자 사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다만, 지상에 있지 않을 뿐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지하로 향하는 입구가 나타났다.
터널처럼 넓은 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유적지 전체를 빙 두르듯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길은 완만한 경사로 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횃불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터널 안은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했다.
‘기습하기 좋은 곳이네.’
호진은 기감을 넓히며 사절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 수를 쓰지는 않은 듯 주변에서 별다른 낌새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렇게 내려가기를 한참.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지하라고는 믿기 힘든 거대한 공동.
그곳엔 또 다른 도시가 존재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지상의 빛이 지하 도시를 꽤나 밝게 비췄고, 그 밑으로 수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외곽지역은 낡은 텐트와 천막밖에 없었지만, 중심부에는 화려한 건물들이 있었다.
특히 정중앙에 높이 솟은 거대한 탑은 분명 위에 지어진 왕성과 이어진 것으로 보였다.
왕성이 있던 위치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옛 아쉬나학이 지은 도시로군,”
호진의 중얼거림에 사절이 답했다.
“정확합니다. 멸망한 아쉬나학 제국의 지하 도시죠. 제국은 사도 ‘샴’의 손에 수도가 무너지고도 이 지하에서 수백 년간 연명했습니다.”
“…….”
샴이라니.
익숙한 이름에 호진은 살짝 놀랐다.
‘하긴, 이곳은 ’샴‘이 수천 년간 활동했던 시칸이지.’
문명이 있는 곳이라면 그 이름이 들려야 정상이었다.
수천 년간 샴이 활동했다는 말은 녀석을 제지할 실력자가 없었다는 말이다.
이들에게 샴은 재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터다.
“샴이 두렵진 않았나? 왜 옛 슈리카인들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거지?”
호진의 의문에 사절은 고개를 저었다.
“아쉬나학 제국이 번성할 시기까지만 해도 샴은 전설 속의 동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 목격담이 자주 들려오더니 끝내 수도를 무너트렸지만요.”
사절이 말하는 동안 호진은 계속 주변을 살폈다.
지하의 사람들은 호진들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호기심보다는 두려움과 경계하는 모습이 이들의 상황을 말해주는 듯했다.
─쿨럭 쿨럭
“……?”
한참을 가던 호진은 슈리카인들을 유심히 지켜봤다.
이곳저곳에서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중심지로 향할수록 병색이 짙은 자들이 보였다.
“기침을 하는 사람들이 많군.”
“지하다 보니 공기가 좋지 않습니다.”
“그런가.”
호진은 수긍하며 이곳에 대해 질문을 더 던졌지만 사절은 말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왕성의 지하인 거대한 탑에 도착했다.
그곳엔 수백에 이르는 병사들이 무장한 채 모여 있었다.
하지만 경계만 할 뿐 호진들에게 다가오진 않았다.
사절은 탑의 문 앞에서 말했다.
“이곳부터는 대표분만 들어오시겠습니다.”
호진은 잠시 고민하더니 아르바흐와 약탈자 대장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다른 분들은 이곳에 계셔 주세요. 아르바흐 님과 당신은 저를 따라오시죠.”
“제 말을 못 들으신 겁니까?”
사절이 표정을 구기자 호진이 무심하게 말했다.
“우린 동등한 거래관계다. 불만이라면 거래는 없던 거로 하지.”
“……주의하겠습니다.”
사절은 분을 삼키며 호진을 안내했다.
그 뒤로 아르바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호진을 따라왔다.
“왜 저만 부르신 겁니까?”
아르바흐의 물음에 호진은 옅게 웃으며 답했다.
“상대는 ‘왕’을 자칭하는 상대입니다.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아…… 궁금합니다!”
“다른 지도자와의 협상은 분명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호진이 인자하게 말하자, 이를 옆에서 듣고 있던 용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형도 협상을 한 적은 많이 없지 않아? 아니 애초에 형이 다른 지도자를 만난 적은 있던가?”
“…….”
호진은 오랜만에 용재의 머리를 쪼개놓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맞는 말이었기에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보니까 정부나 다른 캠프와 협상도 죄다 박 순경 아저씨가 하던…….”
호진은 뭔가 더 말하려는 용재의 명치를 툭 쳤다.
그러자 용재의 몸이 익힌 새우처럼 구부러졌다.
“커헉.”
“용재야. 헛소리 말고 여기나 잘 지키고 있어라. 금방 다녀올 테니까. 그럼 우리는 이제 갈까요?”
호진은 아르바흐를 향해 인자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아르바흐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탑의 내부는 화려했다.
한때 제국이라 불린 명성에 걸맞게, 독특하고 발달한 고유의 문화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제법, 실력자들도 있네.’
제국의 푸른 늑대 기사들과 엇비슷한 수준의 전사들이 호진을 경계하며 따라왔다.
그렇게 도착한 홀에는 왕좌에 앉은 한 남자가 있었다.
짙은 금발과 금안.
황금색 장식구로 치장한 아쉬나학의 왕은 거만한 자세로 호진을 맞이했다.
“반갑네. 이방인이여. 아쉬나학에 온 걸 환영하네.”
“환영에 감사하지.”
호진의 짧은 대답에 일순 홀에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전사들은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게 검 자루에 손을 올렸다.
그 분위기를 깬 것은 왕이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전사들이 기세를 풀며 뒤로 물러났다.
왕은 은은한 기세를 풍기며 호진에게 말했다.
“나는 아쉬나학 제국의 전통한 후계자. 시마르 아누 갈리온이다. 이방인인 자네가 말을 짧게 할 사람이 아니지.”
“그런가?”
고개를 갸웃한 호진은 말을 이었다.
“나는 시리온 공국의 새로운 왕이고 옆에 있는 이는 바룩크툼의 국왕 대리. 아울레 아누 아르바흐다. 내게 존중을 원한다면 그쪽부터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게 좋겠군.”
호진의 말이 끝나자 갈리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거만해 보이던 표정은 불쾌한 듯 약간 일그러졌다.
“장난하는 건가?”
“그럴 리가.”
호진은 품에 손을 넣는척하며 인벤토리에서 옥새를 꺼내 들었다.
“알아볼지 모르겠지만 시리온의 옥새다. 그리고 이 친구가 들고 있는 것은 황금 망치로 유명한 ‘크잣티라엘’이지. 못 알아본다면 유감이군.”
“……거짓말 같지는 않군.”
갈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멸망한 제국이지만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유적을 보고 자랐다.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호진과 아르바흐가 들고 있는 물건들은 왕가의 보물이라 불리기 충분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알아보지 못한 점을 사과하지. 말을 편하게 하시게.”
“고맙군.”
갈리온의 태도가 다소 누그러들었다.
이를 지켜보던 아르바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호진이 처음부터 갈리온에게 존대를 했으면,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래하기에 적당한 분위기가 갖추어졌다.
“그래서 무슨 일로 이곳을 찾은 건가? 시리온의 왕이여.”
“원래라면 올 생각이 없었지. 그런데 이곳의 병사들이 우리를 다짜고짜 공격하더군.”
호진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다가, 이내 진정한 듯 이어 말했다.
“하지만 난 싸움을 원치 않아. 단지 이들에게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고, 이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거래를 하고 싶다.”
“그런가? 이거 실례가 많았군.”
호진의 말이 끝나자 갈리온은 손가락으로 왕좌를 툭툭 두들겼다.
그러곤 재차 말을 이었다.
“사과를 해야겠지. 보상으로 무얼 원하는가?”
“충분한 양의 물. 여섯 명의 사람들이 한 달 정도 마실 수 있는 물과 이틀 정도 쉴 공간이면 충분하다.”
“소박하군. 더 원하는 게 있으면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말하게.”
호진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갈리온은 손뼉을 치며 궁내관에게 말했다.
“저들을 제비궁으로 안내하고 가장 질 좋은 물을 넉넉하게 주도록 하라.”
“예, 폐하!”
갈리온의 명이 떨어지자 몇몇 사람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이를 지켜보던 갈리온은 환하게 웃으며 호진에게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내 사람들을 놓아주게나.”
“물론이지.”
호진은 약탈자 대장을 놓아주었다.
포박에서 풀려난 대장은 비틀거리며 나아가 갈리온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합니다!”
“무얼, 자네는 내 사람이다. 다른 이에게 내줄 수는 없지.”
갈리온은 싱긋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푹
붉은 선혈이 튀었다.
약탈자 대장을 꿰뚫은 황금색의 창이 홀의 바닥에 박히며 돌도 약간 튀었다.
“……커헉.”
그의 입에서 내장 조각이 섞인 피가 흘러나왔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의 왕을 올려다보다 툭 하니 머리를 떨궜다.
“무슨……?”
“…….”
아르바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왕을 자처하는 지도라는 자가 자신의 국민을 웃으며 죽였다.
아르바흐에겐 그것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반면 호진도 다른 의미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한 거지?’
왕좌 뒤에 도열한 12개의 황금 창 중 하나가 저절로 떠오르더니 섬광 같은 속도로 약탈자 대장의 내장을 꿰뚫었다.
분명 왕의 무력을 ‘감시자의 눈’으로 확인했다.
강자임은 분명했지만 방금 같은 신기를 부릴 수준은 아니었다.
기껏 해봐야 용재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못한 수준인데.
그런 호진의 의문을 눈치챈 걸까.
갈리온은 웃으며 호진에게 말했다.
“아쉬나학 제국에 전해 내려오는 보구들 중 하나지. 이 12개의 창은 나의 의지에 따라 상대를 쫓아 꿰뚫는다네. 멋지지 않은가?”
“그렇군. 그런데 그자는 왜 죽인 거지?”
호진은 무덤덤하게 물었다.
실제로 놀라긴 했지만, 그건 이해할 수 없는 현상 때문이었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러나 갈리온은 호진의 표정을 착각한 듯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한 비웃음이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참았다.
기분이 나쁘다고 상대를 해한다면 그건 무뢰배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일이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피곤하고 지친 지금으로써는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실컷 비웃은 갈리온은 눈물을 훔치며 답했다.
“우리나라의 품격을 떨어트리지 않았나. 나는 그들에게 약탈을 허락한 적이 없네.”
“……그랬군.”
호진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던 말을 삼켰다.
약탈자 대장은 분명 자신이 왕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애초에 지금의 시칸은 약탈을 제외한 일거리가 거의 없어 보였다.
이런 환경에선 사냥과 채집, 그리고 목축이 삶을 유지하는 전부이리라.
어떻게 이만큼의 규모가 지하에서 생활을 유지하는지조차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호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갈리온과 인사를 나눴다.
원하던 것은 전부 받아냈다.
호진은 그것이면 만족했다.
홀에서 물러난 호진과 아르바흐는 우선 일행들에게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걷던 와중 호진이 아르바흐에게 물었다.
“어땠습니까?”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대단하더군요.”
아르바흐는 갈리온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호진 님도 갈리온도 둘 다 무력을 기반으로 하는 군주인데, 너무나 다르다.’
호진은 적들과 싸우며 사람들에게 존경과 동경의 존재가 되었다.
자신들을 위해 싸우는 호진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그를 저절로 믿고 따르게 된다.
반면 갈리온은 폭군이라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명을 충실히 수행한 부하를 찢어 죽일 정도로 터무니없는 인물.
하지만 그가 내뿜는 위압감에 눌려 그의 신하들은 불만을 품지 못했다.
공포와 두려움.
갈리온은 그것으로 자신의 사람들을 다스렸다.
잘만 사용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통치 수단 중 하나였다.
그리고 갈리온은 그것을 충분히 잘 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르바흐는 그런 잔혹한 통치 수단은 조금도 따라하고 싶지 않았다.
아르바흐는 사실 호진처럼 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호진은 빛나는 사람이다.
그 빛에 이끌려 주변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나는 어떻지? 나는 어떤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걸까.’
아르바흐는 턱에 힘을 주며 고민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