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대사막 시칸 (2)
호진의 목적을 들은 남자는 별 괴짜를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호진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희가 물이 조금 필요합니다. 혹시 물을 좀 나눠주실 수 있습니까? 당연히 값을 지불하겠습니다.”
“우리가 뭘 믿고 그 거래에 응하지, 이방인? 자네가 누군지조차 모르는데 말이지.”
“저는 시리온의 왕입니다.”
그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곤 이내 주위를 둘러싼 슈리카인들의 어깨가 들썩이더니 하나둘 폭소를 터트렸다.
한참을 비웃던 그들은 겨우 진정했다.
그들의 대장은 여전히 비뚜름하게 웃으며 호진에게 말했다.
“이거 아주 제대로 미친놈들이군. 하나 알려주지, 허풍쟁이 이방인 양반. 시리온의 왕은 ‘얼굴 없는 자’다.”
“‘얼굴 없는 자’는 이미 죽었습니다. 제가 죽였죠.”
“뭐……. ‘얼굴 없는 자’가 죽어? 이거 큰일이군.”
대장이 심각하다는 듯이 답하자, 이를 지켜보던 슈리카인들이 재차 박장대소했다.
그들은 눈곱만큼도 호진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에 호진은 표정을 구겼다.
그들의 반응이 불쾌했던 것도 없진 않지만, 더 큰 이유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평소였다면 이런 통하지도 않을 대답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피곤함과 스트레스로 짜증이 나서, 뭐라 꾸며 말할 의욕도 생기질 않았다.
그렇게 잠시 후, 한참을 웃은 대장으로 보이는 슈리카인이 칼을 빼 들며 말했다.
“아주 재밌었다. 이방인. 뻔뻔함도 지나치면 이렇게 웃기는군. 좋은 걸 알려줬으니 내가 오늘 은혜를 베풀도록 하지. 살려는 줄 테니 가진 것만 다 놓고 꺼져라.”
그 말은 들은 일행들은 잠시 멍하니 남자를 바라봤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호진이었다.
뿌옇던 정신이 머리에 냉수를 부은 것처럼 말끔하게 깨어났다.
환하게 웃은 호진이 남자에게 말했다.
“진작 그 말을 하지 그랬어. 괜히 고민했잖아.”
호진이 경쾌하게 걸음을 내디디며 칼을 뽑았다.
말 위의 남자는 여전히 비웃으며 말했다.
“그걸 뽑으면 안 됐다. 자칭 시리온의 국왕.”
남자가 손짓하자 호진들을 에워싼 부하들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왔다.
이를 지켜보며 남자는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다시 생각해도 웃기는군. 난쟁이 둘과 인간 둘을 거느린 왕이라니. 그럼 스무 명의 부하를 거느린 난 제국의 황제겠군.”
“더 재밌는 거 알려줄까? 이쪽은 바룩크툼의 왕자야. 인사하지 그래?”
호진이 싱긋 웃으며 아르바흐를 가리켰다.
자신을 향한 시선들에 아르바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에 남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이제 보니 광대집단이었구만. 어디 죽어서도 그 입을 나불댈 수 있는지 확인해 보자고.”
“아니, 이젠 말로 안 하지. 목 아파서 그만 말하고 싶기도 하고.”
호진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화악
그러자 일순 주변을 메우고 있던 모래 먼지들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슈리카인들은 멈칫했다.
뭔가 이상했다.
호진과 대화를 나누던 대장도 그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 와 물러나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았기에, 이를 악물고 현실을 부정했다.
“저들을 죽여라!”
대장은 뽑아 든 칼을 치켜들고 이방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뭔가가 번쩍인다 싶더니 자신의 다리를 후려쳤다.
다리가 부러진 듯 화끈한 통증과 함께 그대로 균형을 잃으며 낙마했다.
입과 눈에 모래가 들어가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주저앉은 채 힘들게 고개를 치켜든 대장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주변 정리가 끝나 있었으니까.
슈리카인들은 탈것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어야 했다.
몇몇은 반항하거나 도망치다 화살에 맞았고, 팔다리가 부러져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대장에게 그늘을 드리웠다.
고개를 드니 그와 대화하던 허풍쟁이 이방인이 보였다.
“칼등으로 때려 깔끔하게 부러트렸다. 푹 쉬면 금방 붙겠지.”
대장은 그제야 자신의 다리를 부러트린 게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멀찍이 있던 그가 무슨 수로 자신의 다리를 부러트렸는지 모르겠으나 하나는 확실했다.
‘……내 상대는 아니다.’
이제야 대장은 이방인들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질 좋은 무기들과 정돈된 태세.
하루 이틀 전투를 치른 자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먹잇감에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살려주시는 겁니까?”
대장은 떨리는 목소리를 삼키며 이방인에게 물었다.
이방인들은 자신들은 물론 탈것들에게조차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 물음에 허풍쟁이 이방인이 옅게 웃으며 답했다.
“아까부터 말했던 것 같은데? 물이 필요하다. 가능하다면 쉴 곳까지도. 이제 좀 거래할 생각이 드나?”
“무, 물론입니다. 물은 충분합니다. 제가 저희의 왕과 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거래라면…… 무엇과 거래하실 건가요?”
“왕이라……. 뭐 아무튼, 당연한 걸 묻네.”
대장의 물음에 이방인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거래할 것은 너희의 목숨이다. 그게 너희를 살려준 이유고.”
“아…….”
대장은 침음을 삼켰다.
자신들의 왕은 자비롭지 않았다.
이번 일로 자신은 어차피 죽거나,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부하들은 살려야 했기에, 대장은 힘겹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
낙타와 말에 올라탄 호진들은 천천히 탈것들을 몰았다.
일행들과 난쟁이들 모두 탈것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는 스무 명의 슈리카인들이 포박된 채 뒤따라왔다.
약탈자 무리의 대장만이 호진의 옆에서 길 안내를 하는 중이었다.
남쪽으로 사구를 넘어, 모래 협곡을 지났다.
그렇게 이동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서 거대한 유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만약 약탈자들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찾지 못했을 장소였다.
“굉장하네.”
호진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유적지의 규모는 상상외였다.
비록 낡고 풍화되었지만 상당한 건축 기술의 흔적과 예술적 가치가 느껴졌다.
“옛 아쉬나학 제국의 수도입니다.”
약탈자 대장이 힘겹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와 두려움이 드리워져 있었다.
호진에게 붙잡혔을 때보다 오히려 점점 더 표정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뭘 두려워하는 거지?’
죽음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의 표정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뭔가 수작이라도 부리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방금 심하게 당했기에 설마 싶었지만…….
어쩌면 거처가 아닌 함정으로 유인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호진은 목에 힘을 주어 위협적으로 말했다.
“저기가 정말 너희들의 거주지가 맞는 거겠지? 허튼 생각은 안 하길 바란다.”
“정말입니다. 아마 곧 있으면…….”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호진은 남자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적지 쪽에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
“거처가 맞긴 한가 보네.”
정확히는 기병들이 보였다.
앞서 호진들을 약탈하려 했던 약탈자들과는 전혀 달랐다.
철갑옷을 두르고 창과 방패로 무장한 중기병들.
거대한 쇳덩이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저, 저는 미리 말했습니다.”
약탈자 대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대로, 그는 일찍이 경고를 했다.
자신들의 왕은 자비가 없으며 강력한 군대를 지녔기에 거래가 어려울 것이라고.
그것에 상관없다고 말한 것은 호진이었다.
호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여유롭게 말했다.
“알고 있어. 내 옆에서 떨어지지나 마.”
호진은 점점 가까워지는 중기병들을 바라봤다.
“핫! 핫! 핫!”
채찍을 치며 말을 가속하는 기병들.
그들은 속도를 줄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쓸어버릴 생각이군.’
이건 포로로 잡힌 자신들의 부하들까지 함께 모래에 묻어버릴 생각이다.
호진은 고민스러웠다.
저들을 모두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포로의 말대로 그들이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다면 이들을 모두 죽여 봤자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재차 군대를 보내올 테니까.’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격의 차이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스킬 ‘위엄’이 발동합니다.」
가볍게 이는 바람이 일행들과 포로들의 머리와 옷을 가볍게 훑었다.
이제는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한 감각.
자신에게 내재한 ‘격’을 일깨워 주변의 모든 것의 존재감을 잠식해나간다.
지금 이 순간.
호진이 서 있는 이 모래사막 위만큼은 호진의 영역이었다.
호진이 스륵 눈을 뜨자 은은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다음 순간.
─이히히히히힝
달려오던 말들이 모두 제자리에서 풀썩 꼬꾸라지고, 그 위에 타고 있던 기수들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뭔가 부러지고 으깨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운이 좋은 이들은 팔다리가 부러지는 것에서 그쳤으나, 몇몇 이들은 목이 부러져 즉사했다.
그들이 두른 철갑의 무게로 인해 부상들이 더 컸다.
그나마도 바닥이 모래가 아니었다면 전멸했을 것이다.
“끄으으으윽”
“아아아아아악!”
사방에서 비명들이 새어 나왔다.
순식간에 펼쳐진 아비규환에 약탈자 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이게 무슨…….”
“나도 미리 말했었지. 문제없다고.”
호진은 옅게 웃으며 사로잡은 슈리카인들 몇몇을 풀어주며 말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을 수습해라. 탈것들도 포함해서.”
“예, 옙!”
새로운 거래 품목을 얻었다.
무엇보다 호진은 자신의 힘을 입증했다.
상대에게 알려준 것이다.
자신들이 먹잇감이 아닌 동등한 거래 상대임을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리를 하며 잠시 기다리자 유적지에서 또 누군가 다가왔다.
이번에는 낙타를 타고 하얀색 옷을 입은 사내였다.
“저건…… 사절입니다.”
약탈자 대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는 분명 그의 왕이 더 많은 군대를 보내올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왕은 예상과 달리, 사절을 보내왔다.
호진은 이를 지켜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약탈자 대장은 그런 호진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내가 뭘 데리고 온 거지…….’
그런 호진을 바라보는 한 시선이 있었으니.
그건 다름 아닌 아르바흐였다.
호진의 말과 행동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던 아르바흐는 감탄을 목으로 삼켰다.
모든 게 호진이 말한 대로였다.
호진은 일전에 ‘힘이란 상황에 맞게 드러내야 한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때로는 힘을 감춰 약하게 보여야 하고.
때로는 자신의 힘을 부풀려 보이며 강하게 보여야 한다는 말이었다.
어찌 보면 도박과도 닮은 점이 있다.
도박도 패가 안 좋은 척 상대를 방심시키거나, 반대로 패가 좋은 척 블러핑을 하여 상대가 포기하게 만들곤 하니까.
이번에 호진은 자신의 힘을 드러내 협상을 이끌어냈다.
그렇다고 자신의 힘을 필요 이상으로 과시하지도 않았다.
그가 보여 준 것은 딱 협상을 얻어낼 정도의 힘.
그것으로 그는 자신이 원하던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정작 호진은 그런 아르바흐의 감탄을 눈치채지 못한 채, 사절을 맞이했다.
“이곳은 신(新) 아쉬나학 제국의 영토! 귀인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거래다. 이들을 풀어주고 때가 되면 갈 길을 갈 테니, 합당한 양의 물과 쉴 공간을 제공해주면 좋겠군.”
“거래에 응하겠습니다. 자세한 건 저희의 왕과 이야기를 나누시죠.”
사절은 예상했다는 듯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