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대사막 시칸 (1)
호진은 데미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서두를 경우 에우리우스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대망루의 사용이 가능할까요?”
호진은 조심스레 데미안에게 물었다.
대망루는 극히 제한적인 상황에만 사용이 가능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이곳도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온 것이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단장님이 부탁하고 가셨습니다.”
예상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
에우리우스가 떠나기 전 언질을 하고 간 모양이다.
그 배려에 호진은 짧게나마 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했다.
“그럼 곧장 이동하시겠습니까?”
“저희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준비를 해놔서 다행이네요. 따라오시죠.”
호진 일행은 곧장 데미안을 따라 대망루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빌딩만 한 크기의 망루의 석벽을 타고 나선형으로 놓인 계단을 오르기도 한참.
그곳에 도착한 일행들은 일순 감탄을 토해냈다.
“정말 다 보이네.”
높이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높지만, 무슨 특수한 장치인지 멀리까지 선명히 보였다.
북쪽으로는 제국의 항구가, 북서쪽으로는 하픈덤이, 동쪽으로는 사막의 초입이 보였다.
순간 이곳에 온 목적을 잊을 정도로 벅차오르는 풍경이었다.
“그럼 장치를 가동하겠습니다.”
천천히 구경을 마친 일행들에게 데미안이 말했다.
데미안이 망루 위에 있는 장치들을 가동하자 요란한 소음과 증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거대한 기계장치들이 움직이다가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이어졌다.
그러자 황금색 아치형 문이 하나 생겨나고 그곳의 중심에서 격렬한 기운이 휘몰아치더니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훤히 뚫려있던 아치형 문은 눈 깜짝할 사이에 검푸른 포탈로 속을 가득 채웠다.
“들어가시면 시칸 초입으로 이어지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보죠.”
호진은 데미안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곧장 포탈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호진의 일행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들이 사라진 곳엔 데미안과 그를 따르던 기사 몇몇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행들이 사라졌음에도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흐르던 기묘한 정적을 깬 것은 데미안의 혼잣말이었다.
“괴물들이군.”
데미안이 작게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기사 또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단장에게 호진 님이 더 강해져 있을 거라고 미리 듣기는 했지만……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듭니다.”
“용재 군도 그 짧은 시간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해졌지만, 호진 님은…….”
데미안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3달 전에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기’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절대 불가능하다.
솔직히 자신보다 어느 정도 위에 있는지조차 감이 잘 오질 않았다.
데미안은 살면서 저 정도의 위압감을 주는 상대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대륙 10강이라고.
“단장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호진 님은 우리가 예단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고.”
데미안은 고참 기사를 향해 웃으며 말하던 순간이었다.
“쿨럭. 쿨럭.”
고참 기사가 힘겹게 기침을 토해냈다.
“당신도 감기입니까?”
데미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단순한 감기인 것치고는 전염 속도가 빨랐다.
“어서 당신도 들어가서 쉬십시오. 다른 사람들과 접촉은 피하시고요.”
“오늘 아침부터 이러는군요. 조금만 쉬다 오겠습니다.”
기사는 민망한 듯 면갑 안쪽을 긁적이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데미안은 그런 기사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
“여기가 그 말로만 듣던 시칸인가.”
호진은 허리를 숙여 붉은 모래를 집어 들었다.
시리온 왕성이 희미하게 보이는 뒤쪽으로는 그래도 흙으로 된 땅이 보였지만, 앞에 펼쳐진 것은 온통 붉은 모래뿐이었다.
“돌아가라.”
도훈은 함께 왔던 청랑을 돌려보냈다.
이런 사막은 북쪽 지방에 살던 회색늑대들이 건널 수 없었다.
하야는 주변 환경에 비교적 영향을 덜 받았지만, 습지에 살았던 만큼 사막에서 가능한 소환하지 않는 편이 좋을 터.
결국 호진 일행들은 오직 두 다리로 사막을 횡단해야 했다.
용재와 난쟁이들은 철갑옷을 벗어 호진의 인벤토리에 수납했고, 예은과 도훈은 가져온 생수를 확인했다.
이어 다들 시리온에서 챙겨온 가벼운 천으로 몸을 둘렀다.
사막의 햇빛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넓은 천옷들은 그림자를 만들어 피부를 보호하고 몸의 체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얼마나 걸린다고 했지?”
“에우리우스 님이 말하길 한 달은 걸린다던데.”
용재의 질문에 호진이 답하자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유독 도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한 달 동안 행군이라니. 끔찍하군.”
“…….”
호진은 의경을 나왔기에 행군을 한 적이 없고, 용재는 미필이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도훈은 가끔 지금처럼 군대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군 생활이 끝나지 않는 것 같다면서 말이다.
왠지 모르게 숙연해진 호진은 도훈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전 의경을 나왔지만 도훈 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같은 현역이었지 않습니까.”
“……그냥 출발이나 하지.”
도훈이 짜게 식은 눈으로 호진을 바라봤다.
으레 현역들의 대화에 호진이 아는 척하며 끼어들 때마다 보이는 반응이었다.
머쓱해진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일행들 중 용재와 예은은 그 맥락을 이해했고, 구르드와 아르바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모습이 왠지 웃겼기에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꽤 좋은 분위기에서 사막 횡단이 시작됐다.
정찰을 위해 호진과 예은이 번갈아 가면서 선두에 섰다.
다른 이들은 뒤따르며 수시로 주변을 경계했다.
이곳은 대사막 시칸.
이 땅의 주인은 인간들이 아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몬스터들을 피해 숨어 살아갈 뿐.
이곳의 주인들은 몬스터들이었다.
몬스터들은 쉴 새 없이 일행들을 공격해왔다.
새벽에도 낮에도 밤에도.
그 시간 때마다 활동하는 몬스터들이 다르기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몬스터들도 활동하지 않는 시간이 있었다.
해가 가장 높게 뜬 정오.
그 시간만큼은 몬스터들도 호진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했다.
임시 텐트를 치고 피하지 않으면 온몸에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웠으니까.
호진들은 그 시간을 이용해 눈을 붙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계속 이동하는 데 사용했다.
그렇게 3주가 흘렀다.
***
“…….”
“…….”
용재가 호진을 툭툭 건드리곤 물통을 가리켰다.
그러자 호진이 인벤토리에서 물을 꺼내 건네며 손가락을 폈다.
8개.
인벤토리에 남은 2L 생수의 양이었다.
용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안에 수분을 아끼기 위해 그들은 대화조차 삼갔다.
처음에 가져온 2L 생수는 200개였다.
인벤토리에도 물건이 무한정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기에, 호진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호진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수원(水原)의 부재였다.
물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고 보충할 곳은 나타나질 않았다.
분명 수원이 어딘가 있을 텐데, 모두 초행길 호진들은 그저 서쪽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그리고 현재.
지금 남은 물로는 이틀을 넘기기 힘들었다.
호진은 아껴 마시라는 제스처와 함께 물을 넘겼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열풍과 햇빛에 노출된 얼굴 피부들은 껍질이 벗겨졌다.
바짝 마른 입술은 쩍쩍 갈라져 피가 말라붙었다.
무엇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컸다.
걸어도, 걸어도 변하지 않는 풍경은 일행들의 정신력을 갉아먹었다.
다들 눈에 불안감이 스치기 시작했다.
잠이 부족하고 물은 줄어만 갔다.
여정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 어떤 지표 없이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는 안 돼.’
에우리우스는 분명 사막 횡단에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지금 상태로는 일주일을 더 가기는커녕, 이틀 뒤쯤엔 바짝 마른 미라가 될 것이었다.
전환점이 필요했다.
호진이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전환점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다가왔다.
생각에 잠겨 지평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호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게 뭐지?’
열기로 아지랑이가 쉴 새 없이 피어오르는 지평선 너머 무언가 보였다.
작은 검은색 점으로 보이는 무언가들.
처음에는 몬스터인 줄 알았다.
빈번한 일인지라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사막의 몬스터들은 멀리서부터 기척을 내며 다가오는 녀석들이 드물었다.
하나같이 모래 아래 숨어 기척을 숨기고 먹이를 노리는 녀석들이 대다수였다.
만약 ‘기감’을 익히지 못했다면 사막을 건너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데, 저 멀리서 다가오는 녀석들은 일정한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그 모습은 마치.
“사람입니다.”
호진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일행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며칠째 입을 꾹 닫고 있던 사람들이 마른 목소리로 소리를 내뱉었다.
급하게 말을 한 탓에 갈라진 성대에서 피 맛이 났다.
호진은 손가락을 뻗어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호진과 예은 외의 사람들에게는 점으로도 보이지 않았기에 다들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에 호진은 눈에 힘을 주며 설명을 이어갔다.
“낙타와 말을 탄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검은색 천을 둘렀네요.”
“슈리카인이네.”
구르드가 급히 입을 열다 입에 들어간 모래를 뱉어내며 말을 이었다.
“수백 년 전 멸망한 ‘아쉬나학’이라는 제국의 후손들이지. 지금은 사막을 전전하며 사는 방랑 민족이지만.”
“방랑 민족이라. 그렇다면…… 물이 있는 곳도 알겠군요.”
호진이 기쁜 표정으로 묻자 구르드가 표정을 굳혔다.
“그렇긴 하겠지만…….”
“뭐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호진의 질문에 구르드가 인상을 구겼다.
“저들은 이방인들에게 인색하지. 특히 물은 이곳에서 금보다도 소중하니, 물을 허락할지 모르겠네.”
“식량은 여유가 있으니 거래를 요청해보죠.”
호진은 설핏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을 보니 분명 뭔가 원하는 게 있을 겁니다.”
“……원하는 거라. 그게 뭐지?”
“글쎄요. 어쩌면 저희가 가진 걸 전부 내놓으라고 할지도 모르죠.”
“약탈자들일 수도 있다는 말이군.”
“예, 차라리 그러면 마음이 편할 텐데요.”
그렇게 잠시 뒤, 스무 명도 넘는 슈리카인들이 호진들을 에워쌌다.
그들은 일부러 먼지를 일으키고 소리를 내며 호진들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우호적인 태도는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러던 중 그들 중 뺨에 뱀을 문 매 문신을 새긴, 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앞으로 나왔다.
“너희들은 누구냐?”
“제 이름은 이호진입니다. 이쪽은 제 동료들이고요.”
적대적인 태도에도 호진은 예의를 차렸다.
이곳은 그들의 영역이고 호진들은 허락받지 못한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목적이 뭐지?”
“사막을 횡단해 동부 왕국으로 이어지는 협곡으로 가는 중입니다.”
호진의 대답에 남자의 표정이 해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