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새로운 신과 경전 (3)
“뭐야.”
다음 장을 펼친 호진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뒷이야기가 온통 알아볼 수 없도록 검게 칠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사락 사락
호진은 짜증을 삼키며 빠르게 종이를 넘겼다.
한참을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던 경전에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이 다시 나왔다.
「많은 시대가 흘렀다. 더 이상 교단의 흔적은 세상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 작성했을지 모를 남은 낡은 경전만이 오랜 세월 어둠 속에 갇혀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제국의 소매치기 소년이 경전을 발견했으니, 그 이름은 아셀라이트라 하였다.」
‘…….’
호진은 인상을 구겼다.
적힌 내용으로 보아 교단의 인간들은 패배한 듯했다.
문제는 그런 결과쯤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세계에 신들은 존재하는 반면, 교단의 인간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으니까.
궁금한 건 과정이었는데…….
“젠장.”
호진은 짓씹듯 욕을 뱉어낸 후, 다시 경전으로 눈을 돌렸다.
‘아셀라이트……?’
눈에 익은 이름을 곱씹으면서 말이다.
「소년은 검에 재능이 있는 자는 아니었다. 경전을 접했지만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소년은 경전을 통해 여러 재주를 얻었고 자연스레 책을 숭배했다. 그리고 그의 여덟 번째 후손은 시리온 공국의 첫 번째 왕이 되었다.」
‘시리온 공국!’
호진은 눈이 커졌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얼굴 없는 자’의 이름은 아셀라이트 티메리온.
아셀라이트는 왕족의 성이었다.
“그래서 경전이 이런 곳에 보관되어 있던 거군.”
흥미로운 이야기다.
하지만, 영양가는 없는 이야기.
호진은 보다 ‘검의 교단’에 대해 알고 싶었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이제 남은 것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일 것이 뻔했다.
별 기대 없이 페이지를 넘기던 호진은 멈칫했다.
‘이게 무슨……?’
손이 가볍게 떨렸다.
있을 수가 없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 인간은 끝내 ‘고블린 대전사’의 목을 베어냈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 검의 교단의 의지가 다른 세계에서 꽃핀 것이다.」
누가 봐도 그것은 호진, 자신의 이야기였다.
호진은 미친 사람처럼 책장을 넘겼다.
거칠게 종이를 넘기던 그는 손을 멈췄다.
호진의 이야기가 경전에 쓰여 있었다.
‘이건…….’
보통 물건이 아닐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빠르게 활자들을 훑던 호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경전에는 정확하게 호진이 경전을 접한 장면까지 서술되어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은유적인 표현들도 있지만 마치 방금까지 누가 쓴 것처럼 생생한 장면들.
인간의 이지를 벗어난 일에 호진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러던 중 익숙한 전자음이 상념을 깨웠다.
─띠링
「검의 교단의 성유물 ‘경전’을 획득했습니다.」
「검의 교단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2차 전직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검의 교단 사제(Priest)」
「등급: 레전더리」
「검을 담금질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끊임없이 두들겨라. 검을 익힌다는 건 검이 된다는 것이다.」
「획득 스킬: 심득(心得)/ 깨달음을 통해 지닌 스킬들을 통합, 발전시킵니다.」
「획득 스킬: 심검(心劍)/ 검에 의념을 담을 수 있게 됩니다.」
「직업 획득 조건: 검의 교단의 흔적 발견하기(1/2)」
「직업 획득 조건: 신의 사도 처치하기(1/1)」
‘2차 전직?’
호진은 예상치 못했던 전개에 눈을 크게 떴다.
사실 2차 전직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상을 했었다.
오히려 예상보다 조금 늦어진 감이 있다.
좋아하기도 잠시, 조금 전에 느껴졌던 찝찝한 감정을 곱씹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경전.
그것은 교단의 성유물이다.
즉, 자신은 이미 검의 교단, ‘검신(劍神)’이라는 존재와 엮였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내가 지닌 신격도 이들과 관련이 있는 걸까.’
호진은 ‘미완성된 이어붙인 왕’을 잡으며 최초의 신격을 얻어냈다.
이후로는 주변의 사람들의 믿을 얻거나 혹은 다른 존재들의 업을 빼앗아 그 격을 쌓아왔다.
그 과정에서 호진은 자신이 ‘검의 교단’의 일원이라는 자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검의 교단의 교리는 하나. 검을 믿는 것. 그렇기에 신도는 검을 휘두르는 자신 또한 믿는다.’
교리를 곱씹은 호진은 쓰게 웃었다.
교단의 신도들은 검신의 은총을 받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이 믿는 건 ‘신’이 아닌 자신과 ‘검’이다.
부정할 수 없었다.
호진의 신념은 교단의 교리와 일치했다.
‘검의 교단이라…….’
상당히 복잡한 마음이다.
하지만,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의 고민은 의미가 없었다.
‘바뀐 것은 없어.’
늘 그래왔듯 최선을 다해 나아갈 뿐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결과만 놓고 보면 나쁠 게 없지.’
자신이 지닌 신격의 근원이 무엇인지 늘 궁금했는데, 이제 알게 됐다.
뿌리를 알면 성장의 방향성이 뚜렷해진다.
무엇보다 전직 퀘스트를 받았다.
이번에 얻은 스킬들 또한 설명들이 불명확했지만, 지금까지 전직 스킬치고 나쁜 건 없었다.
자신은 한층 더 강해질 것이다.
경전을 챙긴 호진은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
왕가의 묘역을 빠져나온 호진은 태양의 위치로 시간을 파악했다.
대략적이지만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시간이라면 일행들은 거의 대망루 근처까지 도달했을 터다.
호진은 뼈 피리를 불어 하야를 불러냈다.
하야에 올라탄 호진은 최대한 빨리 망루로 향했다.
그렇게 달리기를 30여 분.
멀리서 흐릿하게 보이던 대망루가 점점 선명히 모습을 드러내고, 망루 앞까지 도착한 일행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진이 하야를 몰고 접근하자 일행들도 이내 호진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일행들에게 순식간에 도착한 호진은 하야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일은 잘 보셨습니까?”
아르바흐가 호진을 향해 묻자 호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들 별일은 없으셨죠?”
“별일이 뭐가 있어. 빨리 망루로 가서 기사단 아저씨들이랑 인사나 하자고.”
대화에 껴든 용재는 어깨를 으쓱이며 앞장서 걸어갔다.
어딘가 들뜬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자신이 에우리우스와 수련하고, 왕가의 묘역에서 ‘검은 뱀’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에 용재와 도훈은 기사들과 시간을 보냈다고 들었다.
함께 생활하며 수련하는 사이 정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에우리우스가 그의 스승인 것처럼, 용제와 도훈은 다른 기사들과 비슷한 관계를 맺었을지도 모른다.
티는 내지 않지만 도훈도 마찬가지로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 있다.
성큼 나아가는 용재의 뒤를 따라, 대망루 입구에 이르자 입구를 지키는 기사 두 명이 보였다.
“아저씨!”
그들과 눈이 마주친 용재가 손을 흔들자 기사들도 반갑게 손을 들어 올렸다.
“잘 지냈나 보군. 도훈 씨랑 호진 님도요.”
인사를 받은 도훈은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명 용재는 고개를 젖히며 거만하게 말했다.
“잘 지냈지, 그럼. 내가 그동안 누구랑 싸우고 온 줄 알아?”
“그건 모르겠지만, 강해진 것 같군. 한눈에 봐도 달라졌어.”
“그럼, 그럼. 이제 아저씨들도 이길걸?”
“흠, 그건 흘려듣지 못하겠는걸. 근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나? 오랜만에 대련하자고.”
“나도 그러고 싶은데,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용재와 기사들은 시시덕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이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호진 또한 옅게 미소 지었다.
‘친화력 하나는 좋다니까.’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일 것이다.
특유의 솔직함과 밝은 모습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기 마련이었다.
당장 그 짧은 기간 동안 난쟁이들과도 친구를 맺은 걸 보면, 한 달이나 같이 있었던 기사들과 사이가 좋은 건 당연했다.
“올라가시죠. 안에 데미안 부단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른 기사 하나가 호진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친절한 안내, 감사합니다.”
호진은 기사에게 예의를 차려 인사하며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이따 보자고!”
용재가 기사들에게 인사하며 뒤따라 들어가고 다른 일행들도 하나둘 망루로 들어섰다.
망루 안에는 일행들을 마중 나온 10명 가량의 기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에는 호진도 아는 얼굴이 있었다.
“황제 폐하께 무한한 영광을! 부단장 데미안. 호진 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부단장.”
에우리우스의 부관, 데미안.
저번에 봤을 때는 호진보다도 윗줄에 있던 실력자였다.
‘지금은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겠지만.’
호진은 습관적으로 상대와의 역량을 비교하다 고개를 저으며 웃음 지었다.
상대의 실력을 분석하는 것도 일종의 습관이 돼버렸다.
적이 될 사람도 아닌 이에게 이런 비교는 실례일 터.
호진은 재빨리 생각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에우리우스 님은 먼저 시칸으로 떠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이미 들으셨군요. 호진 님에게 전언을 남기시고 2주 전쯤 30명의 기사들과 먼저 출발하셨습니다.”
데미안은 곧장 이어서 말했다.
“단장이 말하시길 ‘금방 온다더니 너무 늦는군. 전사는 늘 게으름을 경계해야 한다네. 곧장 출발하라는 폐하의 명까지 미뤄가며 기다렸지만. 더는 미루기 힘들어 먼저 출발하네. 다시 만나길 기원하지.’라고 하셨습니다.”
“참나, 내가 뭐 하다 왔는지 아신다면 그런 말씀은 못 하실 텐데.”
호진은 섭섭한 마음에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도 잠시 호진은 기사들을 둘러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숫자가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기사분들의 수가 조금 적네요.”
원래는 50명이었던 기사들은 에우리우스를 따라 30명이 떠났다.
그러면 이곳에 20명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10명 남짓한 인원밖에 보이질 않았다.
“아, 몸이 좋지 않은 이들이 있어서. 안쪽에서 잠시 쉬고 있습니다.”
“많이 안 좋으신가요?”
호진이 걱정스럽게 묻자 데미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가벼운 감기라도 돈 모양입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훈훈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데미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이쪽 분들은 누구십니까?”
“바룩크툼의 왕자입니다.”
“예?”
데미안이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반갑습니다. 내 이름은 아울레 아누 아르바흐. 정통한 아울레의 핏줄이자 바룩크툼 왕국의 국왕 대리자입니다.”
“……아아, 왕자님을 뵙습니다.”
아르바흐의 인사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데미안이 황급히 인사했다.
여기서 바룩크툼의 왕족을 볼 줄 몰랐던 데미안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아니, 생각해보니 호진 님도 시리온의 왕이 되셨지.’
문뜩 그 사실을 깨달은 데미안은 한층 더 혼란스러웠지만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바룩크툼의 왕자님이 있다면, 정말 단장님과 금방 만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왜죠?”
“바룩크툼이 관리하는 협곡을 지나는 과정이 무척 까다롭거든요. 하지만 왕자님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