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새로운 신과 경전 (2)
“우리들의 신을 뵙습니다.”
섭정을 맡겼던 전 왕실의 혈통과 그 남편은 정말 열심히 일해 주고 있었다.
현재 시리온의 섭정이란, 대우도 권리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며 의무만이 남은 자리였다.
하지만 그들은 묵묵히 자신들의 일을 수행해내고 있었다.
“제가 너무 많은 짐을 넘겨드린 것 같네요.”
호진이 미안한 마음에 어렵게 입을 뗐다.
하지만 그들은 터무니없다는 듯 동시에 손을 내저었다.
“죽을 운명의 저희들을 구원하신 건 주군이신 호진 님입니다.”
“맞습니다. 이 공국의 전(前) 왕실은 부패하고 타락했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섭정 부부는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마저 줄여가며, 계획을 짜고 정책을 내놓고 직접 발로 뛰었다.
지치고 힘들었지만 힘을 들인 만큼, 사람들의 삶에 변화가 생겼다.
거리에는 생기가 돌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절망 대신 희망이 깃들었다.
‘언젠가 모든 시민이 웃는 그날까지. 모든 시민이 우리들의 신을 칭송하는 그날까지.’
두 부부는 자신들의 희생에 깊은 충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호진을 자신들의 구원자이자, 신으로 여기고 있었다.
호진은 그 믿음에 보답해주고 싶었다.
─띠링
「시리온 공국 실질적 지배 100%」
「공국의 시민 2835/3023」
「수복한 영토 42%」
‘좋은 타이밍이다.’
99%에서 오르지 않던 지배율이 때마침 100을 찍었다.
즉, 성역(聖域)의 선포가 가능해졌다는 말이었다.
호진은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를 표합니다. 이건 저의 소소한 보답입니다.”
호진은 옅게 웃으며 성역을 사용했다.
─우웅
희미한 빛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왕궁을 중심으로 시리온 전체를 감쌌다.
이제 이곳은 호진의 영역인 것이다.
“이건……?”
부부는 눈을 깜빡이며 호진을 바라봤다.
아마 결계가 보이진 않아도 뭔가 느꼈을 터였다.
“결계입니다. 몬스터들의 침입을 억제하고, 다른 신들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할 겁니다.”
이제 불사의 신이 시리온을 뒤흔드는 것은 쉽지 않을 거다.
물론 작심하고 덤벼든다면 버티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섭정 부부는 세상 모든 은총을 하사받은 표정이었다.
호진은 또다시 엎드리려 하는 그들을 간신히 만류했다.
그러곤 캠프에서와 마찬가지로 보고를 듣고 승인과 조언을 위주로 반나절 간 회의를 했다.
짧게 인사만 가고 하려 했으나, 예상외로 길어진 이야기에 호진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중요한 건 얼추 정리가 된 것 같군요. 저는 이만 일이 있어서 일어나 보겠습니다.”
섭정 부부는 섭섭했으나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다.
신의 행동에 의문을 가지거나 조언을 하는 것은 불경이었으니까.
호진과 그 일행들은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왕성을 벗어났다.
다음 목적지는 대망루였다.
호진은 예전에 에우리우스에게 대망루의 숨겨진 능력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대규모 위치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포탈.
망루에서 눈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게 해주는 장치였다.
날이 좋다면 하픈덤과 제국 남부까지 갈 수 있다는 이 장치라면 시칸의 초입까지는 쉽게 갈 수 있을 터였다.
에우리우스가 자리를 비운 이상 이용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어차피 왕성에서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거리니까.
“허, 공국에 이런 기술이 있었다니…….”
구르드가 놀란 듯 혀를 차자 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공국이 아닐 겁니다.”
평소 공국에 관리를 맡겼을 뿐.
제국은 공국이 행정력을 잃자 곧바로 기사단을 투입해 망루를 지켰다.
아마 공국은 망루의 이용법조차 제대로 몰랐을 것이다.
망루는 이용하기에 따라 제국 남부 전체가 위험할 수 있는 장치였다.
만약 악용당하는 상황이 온다면 제국은 차라리 장치를 부쉈을 것이다.
“망루에 먼저들 가 있으십시오. 저는 들를 데가 있습니다.”
“그, 그럼 저도……!”
아르바흐가 따라가고 싶다는 듯 손을 들자 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혼자 가야만 하는 곳입니다.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아, 그,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아르바흐는 부끄럽다는 듯 수염을 쓸어내렸다.
이를 지켜보던 예은과 용재가 수군거렸다.
“아르바흐도 만만치 않은 호진이 형 팬이 됐네.”
“그러게. 우리 집단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어.”
용재는 아직도 민망해하는 아르바흐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아르바흐. 우리 호사모에 들어오지 않을래?”
“그, 그게 뭡니까?”
“뭐 간단히 말하면 호진이 형을 찬양하고 배울 점을 공유하는 그룹이지.”
“네? 아니, 그런 그룹이 있었다니. 왜 이제 알려주시는 겁니까?”
“이제야 자격이 됐으니까.”
“영광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용재는 호진의 무(武)를.
예은은 호진의 인품(人品)을.
아르바흐는 호진의 지도자로서의 격을 존경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꽃피우기 전 호진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진짜 제정신들은 아니야.’
사람을 앞에 세워두고 칭찬을 해대다니.
몸에 닭살이 돋고 뺨에 열이 올랐다.
수치사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박 순경을 필두로 시작된 저 이상한 그룹은 그냥 호진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집단이었다.
소문에는 경전까지 써 내려가는 중이라고 들었는데 본 적은 없었다.
‘완성되면 캠프와 이곳에 인쇄본을 뿌린다고 하던데…… 농담이겠지?’
호진은 묘한 불길함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예배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가의 묘역.”
그곳에는 일전에 들어가지 못했던 숨겨진 방이 있다.
호진은 ‘검은 뱀’이 지키고 있던 그 문을 실험해볼 생각이었다.
예배당 입구에는 익숙한 골렘이 서 있었다.
“스미스!”
호진의 부름에 스미스가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냈지?”
─절레절레
스미스는 돌 한 조각을 집어 들고 바닥에 글을 써 내려갔다.
「큰일이 있습니다.」
“뭐? 무슨 일인데?”
호진이 다급하게 묻자 스미스가 글 쓰는 속도를 올렸다.
「수현이 실종됐습니다. 시칸 근처에서.」
“수현이?”
몬스터들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우던 수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강력한 인형술사였다.
‘이곳의 불사의 신의 봉사자들쯤은 쉽게 상대했을 텐데.’
호진은 의아함과 죄책감을 느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았어. 시칸으로 넘어가서 수현이의 흔적을 찾아볼게. 스미스는 시리온에서 계속 찾아줘.”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이 안에 수현은 없습니다.」
“아니, 나는 이 안에 다른 볼일이 있어서 온 거야.”
「그렇군요. 수고하십시오.」
호진은 씁쓸하게 스미스와 헤어졌다.
그 어린아이가 사라졌다는 말에 입맛이 썼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호진에겐 애였다.
가능하면 최대한 구하고 싶었다.
호진은 한층 더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을 지나 일전에 검은 뱀과 사투를 벌였던 공동에 도착했다.
공동의 한가운데는 여전히 화려한 석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는 미동도 하지 않았던 장치들이 호진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어 양각된 조각들 위에 자리한 태양 부분을 살폈다.
움푹 파인 홈.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육망성 모양이었다.
호진은 인벤토리에서 ‘왕의 옥새’를 꺼내 들었다.
크기도 모양도 같았다.
호진이 ‘왕의 옥새’를 얻자마자 했던 그 추측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호진은 옥새를 들어 홈으로 끼워 넣었다.
─덜컥 끼릭
장치는 예상외로 매끄럽게 들어갔다.
그 상태로 오른쪽으로 약간 힘을 주자 부드럽게 장치가 돌아가는가 싶더니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내 꾹 닫혀 있던 석문이 드르륵거리는 굉음을 소리를 내며 벌어지기 시작했다.
벌어진 벽면 틈으로 빛이 흘러나왔다.
어둑한 공동과는 대비되는 따사한 불빛이었다.
호진은 긴장을 유지한 채, 검의 손잡이를 움켜쥔 채 걸음을 옮겼다.
이 앞에 있는 것은 왕가의 보물, 혹은 숨겨진 비밀.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빛은 저 돌에서 나고 있군.’
석문 뒤에 있던 숨겨진 방 곳곳에는 빛을 내는 돌이 박혀 있었다.
그렇게 주변을 살피기도 잠시, 호진은 미간을 구기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끝이라고?”
거대한 문 뒤에 있던 것은 자그마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것은 돌로 이루어진 재단과 그 위에 놓인 낡은 책 하나뿐.
호진은 검을 놓은 채 천천히 재단으로 다가갔다.
낡은 책에는 왠지 모르게 읽을 수 있는 문자가 적혀있었다.
“검신…… 뭐라는 거지? 끝에는 ‘경전’인가?”
검신(劍神) ■■■ 경전.
책에는 이렇게 적힌 듯 보였다.
누군가 까맣게 먹물을 칠해 놓은 듯 가운데는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검신(劍神)이라면…….’
혹시 ‘검의 교단’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호진은 자신의 직업을 떠올리면서 책을 펼쳤다.
「다른 다섯 신과 함께 이 땅에 내려온 신. 그는 한 자루의 검이었다.」
경전의 앞부분은 으레 경전들이 그렇듯 신의 기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른 다섯 신이라 함은 선신들을 말하는 건가?’
호진은 계속해서 경전을 읽어 나갔다.
「■■■은 고대의 신들과 가장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다. 매일같이 그 몸이 찢어지고 녹았으며 부서졌다. 하지만 그는 검. 끝없는 담금질 속에서 검은 더 단단해지고 예리해졌다. 오랜 싸움 끝에 그는 손잡이 없는 검이 됐다. 다른 신들이 이 땅의 필멸자들을 굽어살필 때조차도 그는 홀로 싸움을 이어갔다. 그를 섬기는 신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호진은 경전을 읽다가 멈칫했다.
‘손잡이 없는 검이라…….’
손잡이 없는 검.
그런 검을 휘둘렀다간 검을 잡은 사람의 손부터 칼날에 베일 것이다.
아무도 그 검을 쥐려 하지 않을 거고, 눈 없는 검은 자신이 무엇을 베는지도 모른 채 그저 모든 걸 베어 넘기겠지.
어쩌면 그게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호진은 생각했다.
호진은 늘 목적을 가지고 검을 휘둘러왔다.
투쟁이나 호승심 같은 것을 경계하고 그 끝에 얻을 결과와 목적을 추구했다.
때로는 누군가와의 만남을.
때로는 누군가의 안전을 꿈꾸면서 말이다.
‘신도가 없을 만하군.’
경전에서 말하는 검의 신, ‘그’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늘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어느 날 한 인간은 검신의 무위에 전율을 느꼈다. 인간은 신의 뒤를 쫓으며 휘두르는 무기와 동작을 모방했다. 신은 그 무엇도 주지 않았지만 인간은 진심으로 그를 경배했다. 정확히는 그의 동작과 무기를 경배했다. 최초의 신도였다.」
‘검의 교단’ 이야기다.
호진은 눈을 크게 떴다.
검을, 그리고 자신을 믿는 것.
그것이 교단의 기본 교리였다.
호진은 급히 페이지를 넘겼다.
「최초의 신도가 자신의 교리를 널리 퍼트렸다. 하나둘 모여든 사람들은 교단을 세우고 자신을 단련했다. 그들은 모두 신을 모방했다. 교단의 신도들은 신들에게 의지하던 그 어떤 종족보다 강해졌다. 그 무엇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신도들은 끝내 오만해졌다.」
다른 교단의 사도들은 신을 절대적으로 숭상하고 따르며, 신의 힘을 탐내는 일 따윈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소수의 선택받은 영웅들만이 신들의 사도가 되고, 신의 힘과 뜻을 대리하여 휘둘렀을 것이다.
하지만, 교단의 신도들은 달랐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검의 길을 추구하는 구도자들.
그들에게 있어 검의 길을 추구하는 것은 곧 스스로 신의 길을 추구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초기 불교의 교의는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했던가? 검의 교단은 불교보다 더 극단적이었군.’
하지만 그들은 인간이었다.
인간이란 때론 강철같이 단단하지만, 때론 유리처럼 약하다.
뛰어난 성취를 얻으면 얻을수록 그들은 시험에 들었을 것이다.
구도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
다음 구절을 읽은 호진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교단의 인간들은 끝내 신의 권위에 도전했다.」
이것은 자신이 나아갈 길을 먼저 걸은 이들의 이야기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