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새로운 신과 경전 (1)
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의 웃음과 음악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 희미했다.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일종의 정신병이라 여겨왔던 자신의 일면을 누군가 이해해줬다.
그 사실이 호진에겐 큰 충격이자 위안이었다.
구르드는 신난 사람들을 바라보며 읊조리듯 말했다.
“전사란 무릇 다른 이들의 생명을 빼앗는 존재들이네. 지키기 위해서든 쟁취하기 위해서든.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지.”
구르드는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잔에는 물이 들어있었다.
“뛰어난 전사란 즉, 적을 많이 죽였다는 거지. 그것이 전사가 자신을 증명하는 방법이니까. 다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이 뛰어난 전사가 될 수 있을 것 같나?”
구르드는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그럴 리가 없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에 호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전사들은 좋든 싫든 다른 이들의 피를 먹으며 성장하네.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은 녀석들은 모두 좋든 싫든 자네와 비슷해지지.”
호진은 침묵했다.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사들은 전투에서 오는 극적인 감정들을 모두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었다.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것도, 자신의 목숨을 내거는 것도.
모두.
호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해하고 있었다.
승부와 투쟁을 즐기는 자신의 일면은 늘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줬으니까.
구르드는 그런 호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전사의 영혼을 타고난 거야.”
“…….”
호진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두렵기만 했던, 경계하기만 했던 자신의 일면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사의 영혼.’
문명화된 사회, 현대 사회에서 그런 영혼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달랐다.
종말을 맞이한 이 세계에선, 분명 유용한 면이 있었던 것이다.
분명 경계해야 할 점은 있지만, 필요한 부분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강제로 만들어야 할 정도로.
어쩌면 용재도, 도훈도, 예은도 모두 조금씩 비슷한 면모가 있을지 몰랐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이야기해봐야겠군.’
생각을 정리한 호진은 구르드를 향해 잔을 내밀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뺏겼군. 나야말로 고맙네.”
잔이 부딪쳤다.
호진은 문득 궁금해진 것을 물었다.
“한데 구르드 님은 왜 술을 안 드십니까?”
그 질문에 구르드는 클클 웃으며 답했다.
“전사의 혼은 전장에서만 꺼내야 하는 법이니 끝없이 경계해야 하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
호진은 주변을 살펴 다른 난쟁이들의 잔을 바라봤다.
나이가 든 베테랑 전사일수록 손에 든 잔이 맑았다.
물이었다.
호진은 구르드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의 밤은 천천히 여물어갔다.
***
일주일이 지나고 새해가 됐다.
새벽 동안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 땅을 덮었다.
─뽀득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아직 발길이 닿지 않은 눈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끝에는 푸른빛이 일렁이는 ‘문’이 있었다.
“새해 아침부터 이게 뭐람.”
“불만이면 저랑 바꾸실래요? 지금이라도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용재의 중얼거림에 박 순경이 툴툴거리며 답했다.
그 대화를 듣던 호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용재는 박 순경님의 빈자리를 대체할 수 없으니까요.”
“호진 님…….”
“박 순경님만 믿습니다.”
호진이 박 순경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박 순경은 거칠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다해 제 역할을 수행하겠습니다.”
호진은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박 순경과 인사를 나눴다.
이번에도 캠프를 지키는 건 박 순경의 역할이었다.
추가로 김포 쪽의 정리까지.
이번에도 긴 시간이 소요될 예정인 만큼, 캠프 대리인 박 순경의 역할이 중요했다.
“다들 준비됐습니까?”
““넵.””
일제히 대답이 터져 나왔다.
도훈과 예은 그리고 용재와 같이 늘 함께하던 이들부터, 구르드와 아르바흐까지.
이번 여정을 함께할 일행들이었다.
“그럼 가보죠.”
호진은 거침없이 ‘차원 이동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에겐 새로운 세상으로 간다는 설렘.
누군가에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기대.
각기 다른 마음과 감상으로 문을 넘어섰다.
가장 먼저 문을 넘어선 것은 당연히 호진이었다.
‘왠지 오랜만인 것 같네.’
호진은 시리온 공국 왕성의 신전 내부를 둘러보며 감상에 빠졌다.
이곳으로 돌아온 게 두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기분이 묘했다.
그런 그를 맞이한 건 다름 아닌 공국의 성녀, 노파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이시여.”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물론입니다. 전부 왕국의 새로운 신님의 은총 덕분인 게지요.”
호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자로서의 대접도 부담스러운 마당에, 신 대우라니.
‘체할 것 같아…….’
하지만, 신격은 중요하다.
아마 호진이 가장 많이 격을 얻고 있는 곳도 다름 아닌 이곳.
시리온일 것이다.
이곳만큼 자신을 신격화하는 곳은 다른 어디에도 없으니까.
부추기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그만두게 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딨죠?”
“이곳은 신전의 성소. 평소 저 이외엔 들어오지 않습니다.”
노파의 말에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헤어질 때, 섭정들에게 부탁을 해 놓았다.
차원이동문엔 접근을 금지해 달라고 말이다.
─후웅
호진에 이어 일행들이 하나둘, 이쪽으로 넘어왔다.
“여긴 그대로네.”
“그렇군.”
용재와 도훈은 이전과 같은 신전의 모습에 반가움을 느꼈고. 처음 온 예은은 신기함을 느꼈다.
그리고 두 난쟁이들은…….
“돌아왔군요…….”
“이제 시작이다, 아르바흐.”
“물론입니다.”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 모습을 본 노파는 보기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그쪽은 왠지 낯이 익군요.”
호진이 소개하려던 그때 아르바흐가 먼저 앞으로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아울레 아누 아르바흐. 통한 아울레의 핏줄이자 바룩크툼 왕가의 혈통을 잇는 자입니다.”
노파는 한층 더 놀란 표정을 지은 후, 고개를 숙였다.
“아울레의 핏줄을 뵙습니다.”
호진에게 갖춘 예우보단 덜했지만, 충분히 격조 있는 인사였다.
바룩크툼은 시리온 공국과 교류가 깊진 않다고 들었는데, 성녀의 태도는 예상외로 조심스러웠다.
어쩌면 바룩크툼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영향력이 적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 전에 왔던 이들은 어디 있습니까?”
“보내주신 골렘들과 군대는 공국의 각지에서 몬스터들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몇몇은 이곳 성도에도 남아서 치안을 유지하고 있지요.”
수현과 스미스가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듯했다.
자세한 건 섭정들을 만나서 들어봐야겠지만, 듣기로는 공국의 상황이 호전되고 있었다.
“에우리우스 님을 만나야겠습니다.”
그에겐 물을 게 많았다.
예은의 내공심법을 비롯해, 호진이 없는 동안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리고 헤어질 때 남겼던 말이 뭔지까지 말이다.
‘귀공의 신격(神格)은 가능한 숨기도록 하게나. 아무리 사자라 할지라도 갓 태어난 새끼 사자는 하이에나에게 물려 죽는 법이라네.’
그건 분명 호진의 정체를 눈치챈 말투였다.
그런 호진의 물음에 노파는 면목이 없다는 듯 답했다.
“송구합니다. 신이시여. 에우리우스 공은 이곳을 떠났습니다.”
“스승님이요?”
“예에. 푸른 늑대 기사단의 일부는 아직 대망루에 남아 망루를 지키고 있지만, 대부분은 에우리우스 공을 따라 대사막 ‘시칸’을 건넜습니다.”
“어째서 대사막에?”
호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제국의 황제가 새로운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교류가 끊긴 성국의 현 상황을 알아보라는 것이었지요.”
호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목적지는 같았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다시 만날 터였다.
“섭정에게 가겠습니다.”
호진의 말에 성녀는 고개를 숙인 후, 앞서 나아갔다.
호진과 그 일행들은 성녀를 따라 신전을 벗어났다.
그 순간 호진은 미간을 찡그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풍경을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들은 대체 다 뭡니까?”
왕성의 내부는 사람들로 붐볐다.
목재를 이고 나르는 사람들.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꼬마들까지.
여느 도시의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이 또한 신님의 은총 덕분이지 않겠습니까.”
노파는 후후 웃음을 터트리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요약하자면 공국에 퍼진 불사의 신의 봉사자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구출된 시민들이 모두 왕도로 향했다.
왕성과 그 주변에 호진이 보낸 병력과 새롭게 창설된 공국의 군대가 주둔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엔 이곳만 한 곳이 없었고, 왕성의 주위는 금세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시리온 공국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게 내가 이세계에 끼친 영향력인가.’
호진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가 아니었다면 집에 틀어박혀 떨다가 굶어 죽든, 먹혀 죽든 모두 죽을 운명들이었다.
알 수 없는 고양감과 자신이 살린 생명들에 대한 책임감이 호진의 몸을 채웠다.
“성녀님이다!”
“옆에는 난쟁이랑 사람……?”
호진의 일행은 금방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순식간에 소란이 일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러자 일전에 호진을 봤던 공국의 생존자 하나가 호진과 눈을 마주쳤다.
눈이 휘둥그레진 사내는 돌연 소리를 내질렀다.
“시, 신이시여!”
사내는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호진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경배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는가 싶더니, 하나둘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놀란 기색이 된 사람들은 황급히 몸을 낮추고, 앞의 사내와 같이 무릎을 꿇었다.
북적이던 길거리는 어느새 정적만이 흘렀다.
수백의 사람들이 두 손을 모아 호진을 향해 경배를 올렸다.
시스템은 격이 오른다는 소식을 계속해서 울려왔다.
허울만 좋은 경배가 아닌 진정한 경배였다.
“가시죠. 신이시여.”
노파는 그런 사람들을 지나치며 호진을 안내했다.
호진은 자신을 쳐다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노파에게 말했다.
“성녀. 저를 볼 때마다 사람들이 이리할 필요는…….”
“제가 시킨 게 아닙니다. 이 나라의 법도는 더더욱 아니고요.”
고개를 저은 노파가 말을 이었다.
“이전엔 ‘얼굴 없는 자’가 행차해도 경배를 올리는 자는 많지 않았지요.”
즉, 이건 사람들이 원해서 하는 것이다.
그리 말하니 호진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인 후, 노파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르바흐는 전율했다.
‘이것이 지도자로서의 격인가?’
고결한 핏줄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
신뢰와 존경, 그리고 동경.
시민들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그 감정들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는 왕자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받던 대우들을 떠올렸다.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던 지난날의 기억들.
아르바흐는 고개를 흔들어 얼굴의 열을 식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