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크리스마스 전야 (4)
용재는 마시던 맥주잔을 쾅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잠깐만. 방금 말한 사람 누구야.”
“나요.”
난쟁이 하나가 손을 들며 몸을 일으켰다.
강철 투구를 쓴 난쟁이 전사단의 일원이었다.
비교적 젊은지 다른 난쟁이들보다 수염도 짧고 목소리도 덜 굵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었지만.
“어이, 그만하게.”
호진의 옆에서 막걸리를 홀짝이던 에우두르가 인상을 구겼다.
‘젊은이들은 이게 문제야.’
아무리 동맹이라지만 난쟁이들은 아직 이 캠프에 녹아들지 못했다.
앞으로도 많은 갈등이 있을 터.
고작 술자리에서조차 갈등을 빚는다면 앞으로 고생길이 훤했다.
무엇보다.
‘우리가 거래의 결과로 이곳에 합류했다지만, 이곳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이야.’
만약 여기서조차 쫓겨난다면, 어쩔 수 없었다.
또다시 떠돌이 신세가 되는 것이다.
에우두르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지자 젊은 난쟁이가 움찔했다.
하지만 젊은 난쟁이는 아직 치기를 숨기기엔 너무 어렸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가 불퉁하게 말했다.
에우두르가 주먹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내려쳤다.
주변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자리에 앉게. 두 번은 말하지 않…….”
“아니. 이미 늦었어.”
용재가 화난 표정으로 젊은 난쟁이를 향해 다가섰다.
이에 에우두르가 머리를 짚었다.
‘저놈도 한 성깔 하는구만.’
“승부다.”
용재가 젊은 난쟁이를 향해 말했다.
난쟁이도 지지 않고 답했다.
“좋소. 뭐로 하겠소? 주먹? 무기?”
“뭔 소리야.”
용재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히 술이지.”
용재가 손뼉을 짝 소리나게 치자 무뚝뚝한 표정의 도훈이 상자를 들고 나왔다.
도훈이 상자를 열자 그곳에서 가지각색의 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드카, 데킬라, 위스키, 브랜디, 럼, 백주까지.
‘……저것들이 진짜.’
이번엔 호진이 머리를 짚었다.
호진은 항상 술과 담배 같은 항목을 사치품으로 지정하고 지양하도록 했다.
그래서 보급물자를 모아올 때도 늘 그런 것들은 가급적 챙겨오지 못하게 했는데…….
‘저런 건 또 언제 챙긴 거야.’
호진은 차례로 나오는 술들을 눈으로 훑었다.
온갖 고급 브랜드들이 줄줄이 이어져 나왔다.
개중 싼 것은 몇십만 원에서, 비싼 것은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술들.
호진은 게이트 이전까지 근근이 알바를 하며 살아왔기에, 입에도 대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아까 보니 달콤한 술을 좋아하더군. 그렇다면 시작은 이거겠지.”
─뚜둑
도훈은 백주의 뚜껑을 뜯고 작은 잔에 졸졸 따랐다.
엄지손가락만 한 잔에 따르는 술을 본 난쟁이가 코웃음을 쳤다.
“그게 뭔진 몰라도 그렇게 이슬만큼 따라서는 제대로 맛이 날 리가…….”
젊은 난쟁이는 말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달콤한 향이 콧속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과일향 같은 청아한 냄새에 침이 저절로 고였다.
“받으시죠.”
도훈이 잔을 내밀자 그는 혹여 한 방울이라도 흐를까 조심스레 잔을 들어 올렸다.
“먹어보자고.”
“좋소.”
용재와 눈을 마주친 젊은 난쟁이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둘은 동시에 잔을 목 안으로 털어 넘겼다.
그 순간 난쟁이는 처음 맛보는 술맛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첫 느낌은 달큰했다.
과즙에서 산미만 빼낸다면 이런 맛일까.
목 넘김까지도 아주 깔끔했다.
하지만 이어서 후끈한 기운이 올라왔다.
‘미드보다도 뜨겁다.’
마치 불을 삼킨 것처럼 식도와 위장이 후끈거렸다.
몸 안의 장기가 어떤 모양인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
사람들은 고장 난 듯 멈춰 선 젊은 난쟁이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난쟁이들도, 인간들도 그 반응이 궁금했던 것이다.
이윽고 젊은 난쟁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굉장히 독하군요.”
그 반응에 인간들, 특히 남자들의 콧대가 올라갔다.
술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방금 전 젊은 난쟁이의 말이 남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이다.
난쟁이는 약간은 분하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다가 끝내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맛…… 있습니다. 제가 지금껏 먹었던 어떤 술보다도.”
그 말에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인간들은 난쟁이의 기분 좋은 솔직한 평가에.
난쟁이들은 술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의외로 달아오른 분위기는 아까와는 다르지만 좋은 방향으로 연회가 흘러갔다.
젊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좋은 분위기로 만들어준 용재.
호진은 그를 칭찬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쿵!
용재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뭐, 뭡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급히 용재를 뒤집고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용재가 꼬부라진 혀로 소리쳤다.
“나 안 취했어. 야! 한 잔 더 따라.”
‘이런.’
호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용재 녀석, 이제 스무 살이지.’
도수가 높은 고급 술은커녕, 애초에 술을 마셔본 적조차 별로 없을 것이다.
심지어 저 정도면 타고나길 술에 젬병인 것.
이를 지켜보던 젊은 난쟁이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술은 인정하지만, 역시 인간들은…….”
─꿀꺽 꿀꺽
누군가 술을 목으로 넘기는 소리가 난쟁이의 말을 끊었다.
“난 벌써 두 잔째인데.”
도훈이었다.
“더 하자는 거요?”
난쟁이의 물음에 도훈은 그저 채워진 잔을 내밀 뿐이었다.
“……좋소.”
난쟁이는 연거푸 세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난쟁이의 입에 저절로 크으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곤 어떻냐는 표정으로 도훈을 바라봤다.
이에 도훈은 말없이 병을 들어 바닥에 부었다.
“뭐 하는 거요!”
처음 술을 버리는 줄 알고 인상을 찡그렸던 난쟁이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술이 한 방울도 흐르지 않고 플라스틱 상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쟁이도 지켜보던 사람들도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다들 도훈의 의도를 깨닫고 뒤로 물러났다.
도훈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보드카, 위스키 그리고 럼 중에 가장 도수가 높다는 그 녀석까지.
궤짝 안에 든 것은 더 이상 술이 아니었다.
“윽!”
근처에 서 있던 사람 하나가 뒤로 물러섰다.
궤짝 안에서 금색 광채를 가진 진한 갈색의 액체가 찰랑거렸다.
오크통에서 숙성된 주류 특유의 묵직한 향과 달큰한 과일향이 뒤섞여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드디어 손이 멈춘 도훈은 맥주잔으로 궤짝 안에 든 술을 퍼 올렸다.
그러곤 단숨에 목 안으로 털어 넘겼다.
그 기예에 모두가 홀린 듯 도훈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흩트림 없이 마신 도훈은 새로운 잔을 꺼내 난쟁이에게 내밀었다.
젊은 난쟁이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잔을 받아들었다.
“젠장, 술 하면 난쟁이. 난쟁이 하면 술. 인간한테 질 순 없지.”
난쟁이는 떨리는 손으로 술을 퍼 올려 입에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손이 미약하게 떨려왔다.
독한 술 특유의 향이 코끝을 찡하게 울려왔다.
온몸이 마치 먹으면 안 된다는 듯 경고하는 듯했지만…….
그는 아직 젊은 난쟁이였다.
이성보다는 자존심이 앞선다는 말이었다.
─꿀꺽꿀꺽
목을 타고 용암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후끈한 기운이 온몸을 뒤집어 놓았다.
한데 그와 중에 술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절대 아무렇게나 섞은 게 아니었다.
독하지만 맛있었다.
먹어선 안 되는 금단의 음료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에 털어 넣은 난쟁이는 잔을 소리 내며 내려놓았다.
“별것도 아니군.”
약간의 허세가 들어가긴 했지만, 정말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술이라면 얼마든지…….
‘어라?’
어째서 몸이 도는 걸까.
누군가 그의 허리에 끈을 묶어 당기는 것처럼 몸이 빙글빙글 돌았다.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려 중심을 잡기 어려웠다.
급히 주변을 둘러본 난쟁이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런 미친…….”
─쿵!
난쟁이는 말을 끝맺지 못한 채 탁자 위로 얼굴을 처박았다.
그걸 지켜보던 관중들은 일제히 소리를 내질렀다.
승부가 난 것이다.
난쟁이들은 처음 보는 술이 궁금해서, 인간들은 고급술을 먹기 위해 도훈에게 몰려들었다.
멈췄던 음악이 흘러나오고 모닥불의 불이 높이 솟아올랐다.
얼큰하게 취한 이들은 눌려있던 흥이 터져 나왔다.
음악에 맞춰 팔짱을 끼고 춤을 췄다.
난쟁이고 인간이고 할 것 없이 춤과 노래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난쟁이들도 흥이 엄청났지만, 음주가무는 캠프의 인간들도 밀리지 않았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좋은 분위기였다.
평소 긴장된 삶을 사는 만큼 이런 여유가 필요했다.
더군다나 새로운 구성원인 난쟁이들이 녹아들기엔 딱 좋은 분위기였다.
호진이 흐뭇하게 그 분위기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저 사람은 술이 대단히 강하군.”
옆으로 다가온 구르드가 말을 건넸다.
도훈은 다른 이들의 승부를 받아들여 술 내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벌써 4번째 도전자가 뒤로 자빠져 실려 나가는 중이었다.
대결이 끝났음에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에 털어 넣은 도훈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안주조차 먹지 않는 그 모습은 마치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것 같았다.
“저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호진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저렇게 술을 좋아하면서, 자신이 지양하라 했다고 여태 입에도 대지 않았다니.
오히려 도훈에 대한 평가가 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런 도훈을 빤히 바라보던 구르드는 궁금한 듯 물어왔다.
“자네는 술을 즐기지 않나?”
“아뇨, 좋아합니다.”
“그런 거 치곤 영 마시질 않는구만.”
구르드의 말에 호진은 쓰게 웃었다.
그 말대로 호진은 맥주 한 잔만 홀짝이고 있었으니까.
“저는 이곳의 책임자이지 않습니까.”
“훌륭하군.”
누군가 알아주길 바랐던 건 아니었지만, 구르드의 칭찬에 호진은 약간 쑥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일까.
평소보다 좀 더 속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어쩌면 분위기에 조금 취한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무섭기도 합니다.”
“무엇이 말인가?”
의아해하는 구르드의 물음에 호진은 자신을 가리키며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모르는 제 자신이요.”
구르드가 대답 대신 지긋이 바라보자 호진은 천천히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사실을.
“저에겐 저도 잘 알지 못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숨어있다가 어느 순간 튀어나오죠.”
말을 꺼내면서도 숨이 턱하고 막힌다.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또 다른 자아가 부끄럽고 혐오스러워서.
호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사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 즐겁습니다.”
처음에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살인을 정당화했다.
그렇게 하면 상대의 목숨을 앗아갈 때 생기던 죄책감을 희석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내면의 감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목숨을 건 싸움 중에도 두려움보다는 쾌감이 느껴졌다.
그건 마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건 투쟁. 그리고 살아남았다는 희열 말인가?”
구르드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호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에 호진은 눈이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당연히 알 수밖에. 그게 우리 전사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