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크리스마스 전야 (3)
“그럼 실력 좀 볼까요?”
“넵!”
호진은 롱소드 한 자루를 뽑아 아르바흐를 향해 겨누었다.
아르바흐는 세워뒀던 황금 망치를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진의 눈이 커졌다.
‘이건…… 또 의외로군.’
제법 빈틈이 없는 자세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여태껏 보아왔던 어떤 준비 자세보다 안정적이었다.
‘혹시 생각보다 강한 걸까?’
의아해하기도 잠시, 아르바흐가 강맹한 기세로 돌진해왔다.
정확한 타이밍과 거리에서 망치를 휘두르는 걸 보니 아르바흐가 망치의 운용에 익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호진이 공격을 흘리기 위해 롱소드를 뻗는 순간이었다.
─휘릭
직선적이고 우직하던 아르바흐의 망치가 잠시 느려지는가 싶더니 번개같이 각도를 꺾었다.
언뜻 보면 망치가 두 개로 보일 정도의 굉장히 위협적인 변초였다.
호진은 몸을 뒤로 젖혀 공격을 피했다.
─우웅
턱 아래를 스친 망치에서 살벌한 소리와 함께 바람이 터져 나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뒤로 물러난 호진은 반사적으로 롱소드를 뻗어 반격을 가했다.
‘이런, 조금 과했나?’
호진은 뒤늦게 검의 속도를 줄였다.
그러나 아르바흐는 찔러오는 롱소드를 망치로 여유롭게 흘려냈다.
아마 속도를 줄이지 않았어도 어렵지 않게 쳐냈으리라.
이후로 몇 번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호진은 확신했다.
“예전에 훈련을 받으셨군요.”
“왕궁에서 전해 내려오는 무기술인 ‘아울레니테’라고 합니다. 왕족에게만 전승된 무기술이죠.”
호진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픈 기술 따위가 아니었다.
아르바흐가 펼친 무기술은 짧은 시간 안에 익힌 게 아니었다.
몸에 밴 움직임은 그가 흘린 땀의 양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망치를 몇 번이나 검으로 쳐낸 호진의 손목이 시큰거렸다.
‘정면으로 맞받아친 것도 아니고 몇 번 흘린 것뿐인데. 충격이 쌓이고 있어.’
타고난 용력이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호진은 그가 든 황금색 망치를 눈으로 훑었다.
‘크잣티라엘’이라고 했던가.
결코 평범한 무기가 아니었다.
호진이 든 롱소드는 부러지기 직전인데 반해, 망치에는 흠집 하나 없었던 것이다.
아르바흐는 ‘기’를 다루는 것 또한 능숙했다.
그 정순한 기운은 왕궁에서 전해 내려오는 비전 덕도 있겠지만.
그걸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은 재능의 영역이었다.
‘이제 얼추 알겠군.’
옅게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호진은 아르바흐의 공격을 ‘이화접목’으로 흘렸다.
아르바흐는 예상치 못하게 망치가 비껴나가자 아주 잠깐 당황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호진은 순식간에 안으로 파고들어 아르바흐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호진은 아르바흐의 뒤를 점한 후, 허리춤에 찬 단검을 뽑아 목에 드리웠다.
아르바흐의 몸이 경직되듯 멈춰 섰다.
“져, 졌습니다.”
“훌륭하시군요.”
호진은 진심을 담아 아르바흐를 칭찬했다.
그때였다.
─쿵
도끼를 떨어트린 구르드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아르바흐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굳어있던 구르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믿을 수가 없군……. 아르바흐, 언제 그 정도로 실력이 는 거냐.”
“아닙니다. 호진 님이 봐주신 덕에 그럴듯해 보였을 뿐입니다.”
아르바흐는 머쓱한지 턱수염을 매만지며 손을 내저었다.
이에 호진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아르바흐 님은 이미 완성된 전사십니다.”
그는 이미 훌륭한 전사였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기술의 숙련도가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타고난 용력과 전투 센스, 왕궁에서 전해 내려오는 비전들과 가보가 그런 부분들을 메우고도 남았다.
이렇게 뛰어난 아르바흐가 여태 저평가받은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싸울 이유를 찾지 못했으니까.’
그의 성정은 선했다.
아픔과 두려움을 알기에, 더더욱 남을 해치기 싫어했다.
그는 이유가 없으면 무기를 휘두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전투 앞에 겁쟁이처럼 몸이 굳고,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어댔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에게는 맞서 싸워야 할 이유가, 목적이 생겨났다.
그 눈동자에는 이제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다른 무엇도 아니었다.
모든 걸 불사를 수 있는 신념이었다.
지금 아르바흐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차이는 오직 그뿐이었다.
“앞으로 아르바흐 님은 매일 아침 저와 대련을 하며 수련하시죠. 그것이 경험을 늘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여, 영광입니다!”
아르바흐의 뺨은 붉게 상기됐다.
그에게 칭찬과 기대감은 낯선 것이었다.
그의 눈이 아이처럼 밝게 반짝였다.
***
그날 오후 호진은 전사가 아닌 난쟁이들을 이끌고 호연의 공방을 찾아갔다.
조금 이르긴 했지만, 인수인계는 빠를수록 좋았다.
호진은 빠르면 일주일 안에 떠날 테니까.
“어, 어서 와! 이렇게 보는 건 오랜만이네.”
“뭘,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반가워하는 호연의 인사에 호진은 옅게 웃음을 터트렸다.
호진에게 호연은 특별한 존재였다.
그가 이렇게 버선발로 반겨주니 꽤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히키코모리 증상을 아직 못 고친 탓에 어제 회의도 화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그래도 증상이 많이 좋아졌는지 방에서 벗어나 공방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듯했다.
“이쪽이 어제 말한 난쟁이들이야. 이쪽은 제 형이자 공방의 주인 이호연입니다.”
호진의 소개에 붉은 수염 에우두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반갑네. 내 이름은 붉은 수염 에우두르. 바룩크툼 왕국 1일 공방의 수석 대장장이지.”
구르드와 아르바흐를 비롯한 난쟁이 전사들은 수련에 매진 중이었다.
공방에 온 것은 전사가 아닌 난쟁이들.
그들의 책임자는 마이스터 중 가장 존경받는, 왕국 수석 대장장이 ‘붉은 수염 에우두르’였다.
그의 멋들어지게 긴 수염과 수염에 끼워진 5개의 반지 모양 장신구는 그의 실력과 위치를 증명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 전 이호연이라고 합니다.”
“이 아래 공방이 있다고 들었네. 인간치고는 아주 근본이 있구만.”
에우두르가 난쟁이 특유의 넉살로 이호연의 등을 팡팡 치며 말했다.
그 거리감에 당황한 이호연은 눈을 껌뻑이며 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원래 난쟁이들은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니 편 아니면 내 편.
남일 때는 관계 맺기가 굉장히 어렵지만, 내 편일 때는 거리감이 없고 의리가 넘친다.
호진과의 관계를 통해 난쟁이들은 이미 강화캠프 사람들을 내 편으로 여기고 있었다.
더군다나 호연은 강화캠프의 수석 마이스터다.
그러니 호감도가 높을 수밖에.
“그럼 어디 한번 보러 가볼까.”
“예, 예에.”
앞장서는 에우두르와 그 뒤를 따르는 호연.
뭔가 주인이 바뀐 모양새였다.
“근데 어디로 가야 하나?”
“아, 그, 그건…….”
호연은 손짓과 말로 지하로 가는 길을 알려줬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이 고생 좀 하겠군.’
난쟁이들은 경우를 아는 인물들이니 선을 넘지는 않을 터였다.
‘그 선이 정말 아슬아슬하다는 게 문제지만…….’
잠시 후.
공방에 내려간 난쟁이들은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저건 골렘인가? 수가 굉장히 많군.”
“구동핵은 뭘 쓰는 거지? 동력원은 또 뭐고? 증기 기관이 안 보이는걸.”
골렘에 관심을 보이는 난쟁이들을 위해, 호연은 골렘을 제작 중인 이방인들에게 다가가 양해를 구했다.
난쟁이들은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본 아이들처럼 골렘에 달라붙어 관찰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호연의 설명을 들으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에우두르는 다른 이들보다 골렘의 구조를 빠르게 파악했는지, 다른 곳에 관심을 보였다.
이방인들을 유심히 바라보던 에우두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들은 우리 차원에 사는 인간들 같이 생겼군.”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인 캠프의 사람들과 달리, 하픈덤에서 온 이방인들은 머리와 눈의 색이 화려했다.
물론 지구에도 다양한 인종이 있기에 에우두르의 말은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에 불과하지만, 맞춘 것은 맞춘 것이었다.
“맞습니다. 그들은 하픈덤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하픈덤!”
에우두르는 감탄을 터트렸다.
“가보신 적 있습니까?”
호진의 물음에 에우두르는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가본 적은 없지만 들어는 봤지. 기술 하나만큼은 제국보다 진보한, 동대륙과 서대륙 사이에 위치한 섬나라라지.”
“그렇군요.”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세 배경의 세계에서 온 것치고는 묘하게 기계장치에 익숙하다 싶더라니.
하픈덤이라는 나라 자체가 기계장치가 발달한 나라인 모양이었다.
‘뭔가 음습하고 기분 나쁜 곳이었지만…….’
어인으로 변하던 어촌 사람들을 떠올린 호진은 아주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시간이 흘러, 아래쪽의 공방까지 둘러본 난쟁이들은 잔뜩 들떠 자기들끼리 떠들어댔다.
난민 생활 중 작업 활동에 굶주린 까닭이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망치와 집게를 들고 철을 두드리고 싶어 했다.
“그럼 잘 부탁하겠습니다. 에우두르 님.”
호진은 마에스터 총 책임자인 에우두르를 존중했기에 작업 권한을 일임했다.
호진이 손을 내밀자 에우두르가 굳게 마주 쥐었다.
“고맙네. 이 은혜를 잊지 않겠네. 꼭 기대에 부흥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도록 하지.”
늘 장난기가 넘치던 그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이에 호진은 빙긋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도 골렘도 그리고 캠프조차도 크게 변화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더 강해질 수 있다.
그 사실이 호진의 가슴을 뛰게 했다.
***
밤이 찾아왔다.
크리스마스 이브. 성탄절의 전야다.
중정에 있던 트리는 환하게 빛을 밝혔고,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곳곳에 모닥불이 피워졌고 천막들이 세워졌다.
모닥불 주변에선 쉴 새 없이 고기와 야채들이 구워지고 기름진 음식의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김포 시내를 전전했던 호진은 상당히 낯선 느낌이 들었다.
이런 평화로움과 안락함은 오랜만이었다.
‘이게 집이 주는 안락함일까.’
고작 반년도 안되는 기간 사이에, 강화도는 호진의 안식처가 됐다.
몇 번 보지 않은 사람들도 캠프 안에서만큼은 왠지 익숙하고 정겨웠다.
새로 합류한 난쟁이들은 빠른 속도로 이곳의 사람들과 어우러졌다.
“으하하하하! 이거 정말 맛있구만. 이름이 뭐라 했더라?”
“꿀막걸리입니다.”
“맥주는 형편없더니 이건 기가 막히는군.”
에우두르는 막걸리를 대야째로 벌컥벌컥 들이키며 말했다.
‘맥주 하면 난쟁이, 난쟁이 하면 맥주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난쟁이들은 라거를 싫어했다.
과일 향이 부족하고 무엇보다 달지 않다는 이유로 고개를 저었다.
난쟁이들은 달달하고 과일 향이 짙은 에일을 선호했다.
호진의 캠프에 에일 맥주는 거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달달한 막걸리를 내놓았는데 꽤나 호평이었다.
그새 대야 같던 술잔을 비운 에우두르는 트름을 하곤 호진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미드(mead)를 안 마셔봤다니, 다음에 기회가 되면 내가 대접하지. 우리 난쟁이들의 특별한 주조방식을 거치면 달콤함을 남기면서도 화끈한 미드를 만들 수 있지.”
“아, 벌꿀주를 미드라고 하던가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호진은 에우두르와 잔을 부딪치고는 목을 축였다.
씁쓸한 맥주가 목을 적셨다.
부드러우면서도 씁쓸한 맛이 입안에 기름진 고기를 씻어내는 기분이었다.
‘역시 맥주는 에일보다는 라거지.’
호진은 에일보다는 라거 파였다.
그때 난쟁이 중 누군가 중얼거렸다.
“근데 인간들의 술은 생각보다 화끈하지 못하구만. 역시 인간들은 술이 약해.”
그 한마디가 사건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