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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21화 (121/241)

121화. 크리스마스 전야 (2)

“드릴 말이 있습니다.”

아르바흐는 회의가 끝난 호진에게 다가가 말했다.

길어진 회의로 인해 시간은 어느새 새벽 2시를 향하고 있었다.

아르바흐의 부름에 힐끗 눈길을 준 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 부탁이라면 거절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부탁이 아닙니다.”

아르바흐가 호진을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

이에 호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되물었다.

“부탁이 아니면 그럼 뭡니까?”

“제가 지금부터 드릴 말씀은 협상 제의입니다.”

아르바흐의 말에 테이블을 정리하던 호진의 손이 멈췄다.

고개를 든 호진은 아르바흐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협상 제의라……. 그건 관심이 생기는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물론입니다.”

호진이 회의실을 정리하는 동안, 아르바흐는 씰룩이는 입꼬리를 간신히 참아냈다.

‘됐다.’

예상대로였다.

호진은 보기 드물 정도로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한 그룹을 책임지는 지도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모든 문제에 이해관계를 철저히 따지는 편이었으며, 때론 냉철하고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곤 했다.

‘호진 님은 우리를 구해줄 때도 조건을 내걸었으니까.’

그렇기에 자신의 부탁을 거절한 것이었다.

그의 부탁은 호진과 그의 그룹에게 어떤 이득도 안겨주질 못했으니까.

즉 그룹에 도움이 되는 제의라면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때 정리를 마친 호진이 자리에 앉으며 이야기했다.

“자, 그럼 준비하신 제의를 들어보겠습니다.”

“…….”

아르바흐는 잠시 망설여졌다.

과연 자신이 준비한 게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자꾸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아무 말도 못 할 수는 없다.

협상의 기본은 당당할 것.

낮잡아 보이지 않고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다.

마음을 굳힌 아르바흐는 또렷하게 말했다.

“제 이름은 바룩크툼의 지도자 대리, 아울레 아누 아르바흐입니다.”

평소의 소심하고 유약한 목소리 대신 당당한 목소리가 막사 안에 울려 퍼졌다.

“만약 호진 님이 저를 동행시켜 주신다면, 난쟁이들의 지도자 대리의 이름으로 약속합니다. 호진 님에게 향후 100년간 바룩크툼의 제1공방 점유권을 내드리겠습니다.”

“아르바흐! 그건 너무…….”

뒤에서 묵묵히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구르드가 난색을 표했다.

대화 내내 긴장된 듯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것과 달리, 지금만큼은 물가에 애를 내놓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르바흐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만. 구르드. 더 이상 이전의 가치들은 무용합니다. 저는 호진 님과의 관계에 모든 걸 걸어볼까 합니다.”

“……알겠다.”

잠시 침묵하던 구르드는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인상적으로 지켜보고 있던 호진이 물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겠습니다. 그 바룩크툼의 제1공방에 대해서요.”

“제1공방은 왕국에서 운용하는 가장 뛰어난 대장간을 뜻합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무구들은 왕국 수출품의 2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가치가 높습니다.”

“흐음…….”

호진은 턱을 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화의 헌터들과 나아가 시리온의 병사들까지, 호진에게는 장비를 챙겨주어야 할 병력들이 많았다.

질 좋은 무기와 방어구는 충분히 거래 가치가 있었다.

‘물품의 이동이야 게이트라도 설치하면 그만이긴 한데. 문제는…….’

호진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제가 받은 부탁에 비하면 조금 과한 대가로군요. 어차피 공수표라 그런 것입니까?”

아르바흐는 자신을 지도자 대리라 칭하고 있지만, 명백히 왕국은 그의 삼촌에게 찬탈당한 상태였다.

즉 왕국의 소유권도, 제1공방의 소유권도 그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아르바흐가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제안 하나를 더 드리고자 합니다.”

“그게 뭔가요?”

호진은 뺨을 긁으며 되물었다.

아무래도 짐작되는 부분이 있었다.

‘삼촌을 몰아내는 데 도움을 달라는 건가.’

크게 어려운 부탁은 아닐지도 몰랐다.

왕위의 정당성도 아르바흐에게 있는 이상, 호진이 무력만 받쳐주면 왕위를 되찾아 올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지지받지 않는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호진은 거절하는 쪽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그 순간 아르바흐가 입을 열었다.

“울그렉 이후트를 처치하는 데 손을 빌려주십시오.”

예상외의 제의에 호진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아르바흐 님. 저는 왕국이 당신의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왕위는 제 손으로 되찾겠습니다. 그다음에 울그렉 이후트를 처치하는 데 손을 빌려주십시오.”

앞뒤가 안 맞는 말에 호진은 황당해하고 있었지만, 아르바흐는 멈추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그래 주신다면, 공방과 공방의 장인들은 물론이고 기술까지 공유하겠습니다. 나아가 바룩크툼 비밀공방에서 원하실 때마다 무기를 제작해 드리겠습니다.”

비밀공방에서 제작된 무기는 ‘마스터 피스’라 하며, 1년에 6개도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무엇보다 수출 자체가 엄격하게 금지된다.

즉, 자국의 영웅들을 위한 무구였다.

그 설명을 들은 호진은 고민에 빠졌다.

아르바흐의 제안을 쉽게 표현하자면 ‘도박’을 하라는 것이었다.

호진이 그를 왕국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었을 때, 아르바흐의 공언대로 왕국을 그가 되찾는다면 호진은 제1공방의 점유권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그를 도와 울그렉 이후트를 처치한다면 더 많은 보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가 왕위를 되찾는 데 실패한다면 호진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기호지세…… 인가.’

사실 만약 그를 돕기로 마음먹는다면 ‘울그렉 이후트’까지 처치하는 게 맞았다.

어중간하게 왕위만 되찾는다면, 울그렉 이후트가 왕국을 멸망시킬 것이고 그가 약속한 약조들은 휴지 조각이 될 테니까.

문제는 ‘울그렉 이후트’였다.

그녀가 정말 고대신이라면……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았다.

‘고대신만 아니라면 해볼 만할지도 모르겠지만.’

스스로 왕위를 되찾겠다던 아르바흐의 태도는 합격점이었다.

미세하지만 호진의 마음은 그를 돕는 쪽으로 기울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호진의 말에 아르바흐의 표정을 활짝 폈다.

조건을 걸겠다는 말은 긍정적인 답변이었으니까.

“아르바흐 님이 왕국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없던 거래가 됩니다. 또한 울그렉 이후트가 처치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면, 왕국의 모든 이를 이끌고 제 밑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조건은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호진은 울그렉 이후트를 잡지 못했을 때 유능한 인력의 확보라는 최소한의 이득을.

아르바흐는 난민들을 수용해줄 곳을 구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손을 내밀어 굳게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호진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며 아르바흐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 7시까지 중정으로 나오세요. 베팅한 이상 철저하게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넵!”

아르바흐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답했다.

협상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쩌릿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변하고 있었다.

***

호진은 차가운 새벽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어느덧 완연한 겨울이 찾아왔다.

7시가 다 됐음에도 사위는 어두컴컴했다.

‘일주일만 더 있으면 새해로군.’

반년도 지나지 않은 시간.

정말 많은 게 바뀌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가 크리스마스였나, 아니면 오늘이 크리스마스였나.”

호진은 작게 중얼거리며 중정을 향해 걸어갔다.

더 이상 격변 이전의 명절 따위는 호진에게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것들을 챙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캠프 안이 묘하게 들뜬 것이 느껴졌다.

우선 저 전나무부터 그랬다.

‘어디서 구해온 거야, 저건…….’

크고 예쁜 전나무가 번쩍이는 전구를 몸에 두른 채로 중정 한가운데 있었다.

그 아래 아르바흐가 신기한 듯 나무를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아르바흐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안녕하십니까. 호진 님!”

“네, 좋은 아침입니다.”

호진은 옅게 웃으며 아르바흐에게 다가갔다.

이에 아르바흐는 트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빛을 내는 나무라니……. 신기합니다. 인간들도 엘프처럼 나무를 섬기는 문화가 있나요?”

“아…… 그건 아니긴 한데, 저게 종교적인 상징물인 것은 맞습니다. 신의 탄생을 기원하는 장식이라고 할까요. 저도 잘은 모릅니다.”

호진의 대답에 아르바흐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지만, 호진도 정말 잘 몰랐다.

“모시는 신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으신가 봅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신의 힘은 거의 빌리지 않으셨지요.”

‘신성력을 말하는 건가?’

호진은 에우리우스를 떠올렸다.

그쪽 차원에서 경지에 오른 인간들은 대개 신성력을 사용할 줄 알았다.

비범한 영웅은 늘 신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호진이 지닌 것은 정확히 말하면 신성력이 아닌 ‘신격(神格)’이다.

‘뭐, 그걸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저번 전투에서 쓰지 않은 이유는 굳이 쓸 필요도 없었을뿐더러, 샴과의 전투 중 소비된 신격이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뭔가 설명하자니 귀찮았다.

호진은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뭐, 그런 편이긴 합니다. 아르바흐 님은 모시는 신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대부분의 난쟁이들을 비롯해 저는 불과 철의 여신 ‘이자리온’님을 모십니다.”

들어본 적이 있다.

호진의 외우는 나한심법에도 있던 신의 이름이었다.

‘선신들 중 하나인가 보군.’

하긴, 고대신을 섬기는 녀석들은 하나같이 맛이 간 녀석들뿐이었다.

‘……나만 빼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호진은 왠지 뜨끔했다.

생각해 보니 이카루스도 멀쩡했다.

고대신을 섬기는 녀석들이 이상한 놈들이라는 건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아르바흐는 트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신께서 오기 전까지 난쟁이들은 그야말로 가축 그 자체였습니다. ‘울그렉 이후트’를 비롯한 고대신들과 그 추종자들의 노리개에 불과했죠. 눈먼 두더지들처럼 삶의 대부분을 땅을 파는 데 소비했고, 힘이 빠지면 산 채로 잡아먹혔습니다.”

암울하던 시절을 얘기하는 아르바흐의 목소리는 칙칙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여신의 이름을 입에 담는 그의 눈동자엔 순식간에 생기가 깃들었다.

“여신 ‘이자리온’께서는 고대신들을 피해 숨어 살던 벌거벗은 난쟁이들에게 은혜를 내리셨습니다. 불과 철을 다루는 방법을 전파하시고, 직접 불타는 망치를 휘두르며 사악한 고대신과 그 추종자들을 불태우셨습니다.”

“…….”

호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라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없어야 할 듯했다.

수천 년 전의 일임에도 그의 눈동자에는 고대신과 그 세력에 대한 증오가 엿보였다.

“그랬군요. 믿음직스러운 신이신 것 같습니다.”

“그렇고말고요.”

호진이 적당히 호응하자 아르바흐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깃들었다.

“만약 제가 왕이 된다면 여신의 사도 후보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정말입니까?”

호진은 놀라서 되물었다.

그러자 아르바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의 선조 ‘아울레’는 여신님께서 가장 아끼던 사도였습니다. 이후에도 그 자손인 왕들에게 종종 사도나 사도 후보의 자리를 내어주셨죠.”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하나,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

“몰랐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흥미롭군요.”

호진은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요?”

“넵, 저는 준비됐습니다!”

지금은 그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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