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크리스마스 전야 (1)
─콰직
황금 망치가 단탈렉트의 머리를 산산이 부수었다.
누런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저주를 퍼붓던 입은 더 이상 열리지 않고 침묵했다.
예상치 못한 우두머리의 죽음에 거미들은 혼비백산했다.
마침 위엄의 효과가 거의 풀려난 거미 괴물들은 허겁지겁 거미줄을 타고 도망치기 바빴다.
그들은 그들이 넘어온 게이트 너머로 도망치거나, 이 도시 깊숙이 숨어들 것이다.
지금은 쫓고 싶어도 여력이 부족했기에 호진은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
‘조만간 쓸어버려야겠지만.’
남은 건 잔챙이들뿐이니 강화도 헌터들의 실력을 키우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느새 어지러움이 많이 가라앉았다.
─띠링
「울그렉 이후트의 첫 번째 아이, 울그렉 단탈렉트를 처리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보상이 인벤토리에 수납되었습니다.」
「플레이어의 격이 상승합니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중독 내성 LV.6 → 중독 내성 LV.8」
‘소소하네.’
호진은 떠오른 창을 살피자 중얼거렸다.
‘감시자의 눈’으로 봤을 때, 설마 했지만.
이 녀석은 사도가 아니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울그렉 이후트’라는 존재도 고대신은 아닐 가능성이 컸다.
아무래도 전설이 와전되어 내려온 모양이다.
호진은 인벤토리에 수납된 보상을 꺼냈다.
「아라크네의 맹독 주머니」
「종류: 재료」
「정보: 독이 마르지 않는 독샘을 지닌 주머니.」
또 써먹기가 굉장히 애매한 보상이 나왔다.
안 그래도 바실리스크의 독니도 자해할 때를 제외하곤 인벤토리에서 썩히고 있었는데.
이것도 내성작 할 때가 아니면 인벤토리에 자리만 차지할 예정일 듯했다.
“젠장. 잡템이랑 숙취만 남기고 가다니.”
보상을 다시 인벤토리로 집어넣은 호진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호진에게 아르바흐가 서둘러 뛰어와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습니다.”
호진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르바흐가 안도하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혹여 잘못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 물론 호진 님을 믿었지만요!”
“감사합니다. 아, 이제 혼자 설 수 있습니다.”
아르바흐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호진은 비틀거리다 중심을 잡았다.
“제 일행들이 돌아오는 대로 다른 분들과 합류하죠.”
도훈과 예은 그리고 용재는 흩어져 도망치는 거미들을 쫓았다.
멀리까진 가지 말라고 했으니, 어느 정도만 수를 줄이고 돌아올 터였다.
잠시 전투가 치열했던 현장에서 벗어난 호진과 아르바흐는 길가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잠깐의 적막 끝에 입을 연 건 아르바흐였다.
“호진 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들어보겠습니다.”
호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르바흐는 결심을 다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들으셨겠지만, 저는 아울레 아누 아르바흐. 바룩크툼 왕국의 왕자입니다.”
예상했던 이야기인 만큼 호진은 놀라지 않았다.
난쟁이들이 숨기던 것.
그것은 바로 아르바흐의 정체였다.
“저희 선조 아울레께서는 붉은 산맥 깊숙한 곳에 ‘울그렉 이후트’를 봉인하셨고, 그 위에 이를 감시하기 위한 도시를 세웠으니, 그것이 바룩크툼 왕국의 시작이었습니다.”
아르바흐는 덤덤히 옛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울레의 가호 아래 왕국은 수천 년간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긴 역사 속에서 종종 전투를 겪기도 했지만, 단 한 번도 왕국의 수도나 위험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잠시 그 시절의 왕국을 상상하듯 눈을 지그시 감는 아르바흐.
그 눈이 다시 떠졌을 때 눈에 깃든 건 한 줄기의 불행이었다.
“그러나 잊혀진 옛것들이 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울그렉 이후트’의 자식들이 저 깊은 곳, 저주받은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온 겁니다. 첫 등장은 수백 년 전으로 위협이라 부를 수도 없는 수준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이에 아버지 아달바흐 국왕은 재차 그녀를 봉인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심연으로 출전했습니다. 하지만…….”
목이 막힌 듯 말을 끊은 아르바흐는 호진이 건넨 물로 목을 축인 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곤 다시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군대는 기다렸다는 듯 기습해온 이후트의 자식들에게 무너졌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도 실종되셨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조사단을 꾸리는 사이, 제 삼촌 울그바흐는 전혀 다른 준비를 하고 있었죠.”
“반역이 일어났군요.”
아르바흐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삼촌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용맹하고 현명하고. 하지만…… 맞습니다. 아버지의 실종을 틈타 삼촌은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저는 왕성의 일부를 데리고 도망치듯 아버지를 찾아 떠나야 했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는 들은 대로였다.
‘울그렉 이후트’가 지배하는 동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아달바흐와 조우했지만, 그것도 잠시 재차 적들에게 쫓겼다.
아달바흐 국왕은 자신의 근위대와 함께 시간을 끌기 위해 남았고.
도망치던 아르바흐와 난쟁이들은 막다른 길에서 게이트를 넘었다.
그리고 현재를 맞이한 것이다.
이미 빼앗긴 왕좌였지만 아르바흐는 자신의 삼촌이 가진 능력만은 믿었다.
내심 안심하기도 했다.
그 무거운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기에.
그래서 아르바흐는 바룩크툼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던 것이었다.
돌아가 봤자 좋은 꼴 보기에는 글렀고, 비록 배신당하긴 했지만 삼촌이 왕국을 잘 다스려 주리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
아르바흐의 눈이 거칠게 일렁였다.
눈 안에 폭풍이 몰아치는 듯했다.
“삼촌이 ‘울그렉 이후트’에게 굴종한 이상, 난쟁이들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모두 그 목숨을 유린당하고 영혼까지 고통받겠죠. 그리고 아마 군대의 정보가 새어나간 건…….”
그렇게까지 믿고 싶지는 않았던 건지 아르바흐는 말을 삼켰다.
그것이 복수이건 아니면 자국민들을 위하는 마음이건.
아르바흐의 결심은 그의 의지에 거목처럼 자라나 굳건한 뿌리를 내렸다.
“그러니 바룩크툼까지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그런 아르바흐를 바라보던 호진은 옅게 웃으며 답했다.
“거절하겠습니다.”
***
“어째서일까요…….”
시무룩해진 아르바흐가 행렬의 뒤를 따르며 중얼거렸다.
구르드는 한심하다는 듯 콧바람을 내쉬며 바라봤다.
이 문제는 아르바흐가 풀어야 할 과제였으니까.
호진의 난쟁이들과 합류한 지도 이제 꽤 되었다.
그동안 아르바흐는 호진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뿌우우우우
웅장한 나팔 소리가 산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저게…… 호진 님의 도시.”
철근과 콘크리트, 그리고 돌로 축조된 거대한 성이 그들을 반겼다.
나팔소리와 함께 튼튼한 도개교가 끼릭 소리를 내며 인도교와 이어졌다.
인도교에는 외보가 따로 설치될 정도로 해자의 넓이와 깊이도 대단했다.
난쟁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호진에게 전해 듣기로는 나무로 지어진 캠프에서 살고 있다고 했으니까.
실제로 놀란 건 난쟁이들만이 아니었다.
“이게…… 뭐여.”
“……흠.”
용재가 나지막이 탄성을 터트리고, 도훈은 침음을 삼켰다.
예은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호연에게 추가적인 축조 계획을 들었던 호진은 침착하게 반응할 수 있었지만, 놀란 것은 매한가지였다.
‘역시 형이군.’
마음먹고 추진하면 못하는 게 없었다.
하지만, 아직 성 곳곳에 허술한 점이 보였다.
목재로 된 벽을 허물고 새로 짓는 과정에서 생겨난 허점들이었다.
적이 있을 때라면 이렇게 하지도 못했을 터.
지금이야말로 성을 축조하기 가장 적절한 시기였다.
심지어 뛰어난 인력들도 데려왔으니 공사는 파죽지세로 진행될 것이다.
호진은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
성으로 들어가자 아직 내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역시 성곽의 축조에 힘을 쏟고 있는 듯했다.
“호진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광장에는 으레 그랬듯 많은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박 순경이 호진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벌써 소식을 듣고 온 것인지, 인근에 있던 헌터들과 감시단 모두 광장에 모여 있었다.
그새 수가 늘었는지, 떠날 때보다 광장이 더 가득 찬 느낌이었다.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야 집 지킨 것 말곤 한 게 없는데요. 뭘.”
“그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호진은 박 순경의 어깨를 두드리며 옅게 웃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호진은 아쉽다는 듯 말을 이었다.
“대부분 얼굴들이 낯설군요. 너무 오랜만이라 그럴까요?”
“아, 그러실 만도 합니다. 캠프 초기부터 있던 인원들은 다들 팀장급이 되어서 강화 전체에 감시를 위해 흩어졌으니까요. 아니면, 저쪽 차원으로 넘어갔든가.”
박 순경은 성 너머 숲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고 보니 스미스와 수현을 비롯한 몇몇이 저쪽 차원으로 넘어간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시리온 공국의 안정화를 위한 최소한의 인원을 보낸 것이었다.
“고생하고 있겠군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박 순경은 죄책감이 드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걱정하지 마시죠. 가볍게 정비 후 제가 바로 넘어갈 겁니다.”
“호진 님이요?”
“예, 그러니까 제가 필요한 일들을 추려서 준비해 주세요. 곧바로 회의를 열겠습니다.”
호진의 부탁이 떨어지자 박 순경은 곧장 움직였다.
사실 이제 호진이 없어도 캠프가 돌아갈 수 있도록 시스템이 구축되기는 했다.
하지만 여전히 캠프의 지도자는 호진이었고, 지난 상황들과 앞으로의 계획들에 대해선 호진에게 설명을 하고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잠시 후, 막사로 들어선 호진의 표정은 살짝 일그러졌다.
‘오늘 일찍 자기는 글렀군.’
회의실 탁자를 가득 메운 A4용지들이 호진을 반기고 있었다.
이번 회의에는 소개를 겸하는 자리이기에 아르바흐와 구르드도 함께 자리했다.
새로 선출한 시민단체 대표부터, 박 순경, 그리고 예은과 용재, 도훈까지 참석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치자, 지도자 대리를 맡고 있던 박 순경이 회의의 포문을 열었다.
“우선 성곽의 축조 진행 상황과 캠프의 인원 충원. 그리고 헌터와 감시단의 증강부터 이야기를 시작…….”
회의는 길어졌다.
밖에서는 호진들의 무사 귀환과 더불어, 난쟁이라는 새로운 동료들의 환영을 겸해 화려한 축재가 벌어졌지만 회의실이 차려진 막사 내부는 칙칙하기 그지없었다.
소분된 축제 음식들을 받아든 사람들은 그것을 먹는 둥 마는 둥 회의를 이어갔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자신들이 속한 그룹의 이권 때문이라도 종종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헌터들을 이끄는 박 순경, 감시단의 도훈, 시민단체의 대표에 이어 이제는 난쟁이들까지.
그렇게 길어지는 회의 속, 어느새 화제는 호진이 서울에서 국장과 나눴던 거래에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국장은 세종 캠프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로 하고 우리의 자치권 또한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포를 정리해주겠다고 한 거고요.”
“아, 그래서 병력들을 소집해달라고 하신 거군요.”
호진과 박 순경의 대화를 듣던 아르바흐의 눈이 어느 순간 크게 떠졌다.
‘이거다! 이거였어.’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아르바흐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