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아울레의 후예 (2)
호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만약 상대가 정말 샴과 동급이라면 승리를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지난번 싸움으로 신력을 많이 소모했기에, 다시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신력의 총량이 커진 만큼 회복에 걸리는 시간도 더욱 늘어난 것이다.
‘강신무는 무리다.’
호진이 지닌 가장 강력한 패인 강신무는 봉인된 것이나 마찬가지.
그렇다면 본신의 힘으로 적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절(切)베기를 쓰는 건 좋지 않겠지.’
강한 패를 처음부터 꺼내 보일 필요는 없었다.
만약 그 첫수로 상대를 죽이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 못한다면 경각심만 심어줄 테니까.
호진은 옆구리에 찬 아메노하바키리를 두고 투핸디드 소드를 꺼내 들었다.
검보다는 단창에 가까운 길이의 검이 빛을 흩뿌렸다.
이미 사용이 불가능한 ‘성국의 대검’에 비해 상태가 양호했다.
획득 이후 무겁다는 이유로 잘 사용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주로 투검용으로나 쓰던 검이지만…….
‘이젠 쓸 만하겠지.’
어느새 근력은 어느새 70에 달했다.
투핸디드 소드가 나무젓가락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오히려 이제 평범한 검들은 들고 있다는 실감이 나질 않았다.
“크아아아악”
때마침 잔뜩 화가 난 단탈렉트가 호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단탈렉트는 먹이를 낚아채듯, 거대한 두 앞다리를 호진을 향해 뻗었다.
이에 호진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이화접목을 사용해 공격을 흘려냈다.
허공을 가른 두 다리가 바닥에 내리꽂혔다.
단탈렉트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위해 눈을 깜빡이던 그때였다.
눈앞의 인간이 자신의 목을 노리며 검을 휘둘러왔다.
단탈렉트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들어 올려 공격을 막았다.
─콰직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단탈렉트의 몸이 크게 밀려났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단탈렉트는 눈을 끔뻑이다 다리가 욱신거림을 깨달았다.
인간의 공격을 막은 다리 중 하나에 금이 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내 몸에 상처를 입혔어?’
난쟁이들의 미스릴 무기에도 흠집 하나 입지 않던 몸이었다.
인간이 들고 있는 검은 분명 평범하디 평범한 강철 무기.
답은 간단했다.
‘저 인간, 생각보다 강하잖아.’
단탈렉트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마음이 초조해졌지만 화를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상대를 살폈다.
눈앞의 인간은 믿을 수 없는 괴력을 지녔다.
‘그래도 이 정도로 강한 공격을 연발할 수는 없겠지.’
그 증거로 인간은 후속타를 가하지 않았다.
제자리에 서서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뿐.
그렇다면 아직은 자신이 더 유리했다.
단탈렉트는 전력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시각, 호진은 단탈렉트의 예상과는 너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지……? 함정인가?’
그저 기를 조금 담아 휘둘렀을 뿐이었다.
투구 가르기도, 목엽참도 쓰지 않았다.
아무래도 스킬을 사용하면 동작이 커지니까.
한데, 가볍게 휘두른 견제용 공격에 상대가 멀찍이 날아가 버렸다.
잠시 고민하던 호진은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버렸다.
어차피 몇 번 더 부딪쳐보면 정답이 나올 터였다.
호진은 검을 바로잡고 단탈렉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단탈렉트가 펄쩍 뛰어오르더니 호진을 향해 하얀 공 같은 것을 쏘아냈다.
작은 점이었던 그것은 순식간에 거대한 망이 되어 호진을 덮쳤다.
처음부터 그 크기를 알았다면 모를까.
갑자기 거대하게 펼쳐진 거미줄 망을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호진은 검에 기를 담아 목엽참을 휘둘렀다.
그러자 단칼에 거미줄 망이 양단됐다.
너무도 쉽게 양분된 거미줄에 잠시 당황했지만, 지금 해야 할 것은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거미줄 사이로 빠져나온 호진은 착지하던 단탈렉트에게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카강
이번에는 가장 튼튼한 발톱으로 검을 막아낸 단탈렉트.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호진은 그런 녀석을 또다시 미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딴 게…… 사도라고?’
이젠 느낌이 왔다.
이건 연기도 뭣도 아니다.
눈앞의 거미 인간은 정말 약했다.
샴을 상대하기 전이였다면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호진의 몇 수 아래였다.
표정이나 움직임을 보니 아직 뭔가 더 숨겨둔 수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걸로 전세가 뒤집힐 리는 없었다.
호진도 아직 전력을 보인 적이 없으니까.
무엇보다 놈은 자신과 동급이나 그 이상의 상대와 싸워 본 경험이 전무한 게 분명했다.
‘저렇게 표정을 훤히 드러내서는 이길 상대도 못 이기겠지.’
잠시 고민하던 호진은 투핸디드 소드를 집어넣었다.
투핸디드 소드로 ‘투구 가르기’ 한 방이면 저놈은 죽는다.
모처럼 샴 이후에 만난 몸을 풀 만한 상대.
이대로 끝내는 건 조금 아쉬웠다.
호진은 롱소드 한 자루와 단검 하나를 꺼냈다.
저번엔 스킬로 얻지 못한 이도류를 이번에야말로 얻어 볼 참이었다.
‘그리고 새로 얻은 것도 실험해 봐야겠지.’
호진은 코트 안주머니에 있는 모래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어느새 호진은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
‘웃고 있어.’
아르바흐는 멍한 눈빛으로 호진의 움직임을 좇았다.
중간중간 보이는 그 얼굴은 분명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죽을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공방을 이어가는 중인데, 저렇게 웃다니.
저 여유로움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아르바흐의 양손에서 흥건한 땀이 배어났다.
강자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용기.
약자를 보호하는 명예.
아르바흐는 호진의 모든 행동에서 고결함을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지도자의 자격인가.’
그런 전투를 바라보던 구르드도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정도였다니……. 인간이 맞긴 한 건가?”
─캉 카각 카가가가가각
수십의 난쟁이들이 담금질을 하듯, 쉴 새 없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사방으로 불꽃이 튀고, 마찰열을 견디지 못한 검이 붉게 달아올랐다.
달아오른 두 자루의 검을 휘두르는 호진은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초반에 거대한 검을 휘두를 때와는 달리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진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상대를 압도하며 밀어붙이고 있었다.
‘귀신같은 솜씨다.’
구르드는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자신들의 왕국을 통틀어도 호진과 같은 괴물은 본 적이 없었다.
소문의 대륙 10강이라면 저 정도쯤 될까.
대륙 100명의 강자로 꼽히던, 아달바흐조차 저런 움직임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한편 호진은 한껏 달아올랐다.
단탈렉트와 공방을 주고받으며 점점 머리로만 알고 있던 지식이 몸에 체화되었고.
나아가 지식으로는 알 수 없었던 기술의 공백이 점점 메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띠링
[새로운 스킬을 성공적으로 시연했습니다.]
[새로운 스킬의 이름이 지정되었습니다. 이도류 LV.1]
반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스킬로 익힌 순간 이도류는 어느새 훨씬 자연스워졌다.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속도와 힘도 오른 걸 보니 분명 공격력이 오르는 효과가 있는 패시브 스킬이 분명했다.
‘아직도 더 강해질 수 있다.’
그 사실이 호진의 몸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서걱
앞다리 중 하나를 자르던 그때였다.
단탈렉트가 잘려 나간 다리를 휙 휘둘렀다.
그러자 보라색의 피가 호진에게 끼얹어졌다.
“더럽게 뭐 이런…… 어?”
검을 휘둘러 피를 쳐낸 호진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시야가 조금 흔들렸다.
‘뭐지?’
호진은 자신의 몸을 관조하다 문득 검을 쥔 손이 저려 오는 걸 깨달았다.
검에서 흘러내린 녀석의 피가 손에 닿았다.
‘맹독.’
호진은 재빨리 검을 내던지고 뒤로 물러났다.
급하게 움직인 까닭일까.
속이 순식간에 매슥거리고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띠링
[중독 저항에 실패했습니다.]
[상태이상 ‘중독’이 발생했습니다.]
‘바실리스크의 독니’로 자해하며 키운 중독 내성으로도 저항에 실패했다.
이건 제법 위험했다.
“누가 거미 아니랄까 봐. 쿨럭.”
목을 타고 쓸개즙이 올라와 녹색이 섞인 피가 침과 섞여 나왔다.
단탈렉트는 승기를 잡았음에도 많이 몰렸던 탓인지 지체 없이 마무리 공격을 가해 왔다.
“죽어라, 인간!”
단탈렉트가 숨겨온 비장의 일격.
독을 머금은 독침이 호진을 향해 쏘아졌다.
‘아, 이건 진짜 위험한데……?’
호진은 쓰게 웃으며 코트 안주머니에 있는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그 순간 몸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안개가 호진의 몸을 가림과 거의 동시에 독침이 호진이 있던 곳에 꽂혔다.
─퍽
단탈렉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안개가 걷히자 그곳엔 빗나간 독침만이 바닥에 박혀있을 뿐이었다.
“어디로 간…….”
단탈렉트는 말을 마저 잇지조차 못했다.
─뎅그르르르르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 어지러운 시야 속, 자신의 몸 뒤쪽에 검은 안개를 두른 한 인영이 보였다.
허리에 찬 검을 뽑아든 채 주저앉은 인간.
저 거리에서 어떻게 자신을 벤 걸까.
아니, 우선 언제 저기까지 이동한 걸까.
단탈렉트는 바닥에 머리가 떨어질 쯤에서야,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처음부터였다.
인간은 처음부터 압도적인 힘을 숨기고 있었다.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몰려와 이가 뿌드득 갈렸다.
단탈렉트는 남은 힘을 쥐어 짜내 저주 섞인 말을 퍼부었다.
“너희 인간들에게 종말이 있으리. 세계를 잇는 자. 종말의 거미. 울그렉 이후트. 나의 어머니께서 이 세계를 징벌할 교보를 놓으실 터. 그날이 이 세계 종말의 날이다.”
단탈렉트는 눈을 뒤룩 굴려, 저 멀리 멀어진 난쟁이들을 향해서도 저주를 이어갔다.
“열심히 그 짧은 다리를 놀려봐라. 난쟁이들아.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어머니를 봉인했던 저주스러운 아울레의 핏줄도 이젠 없다. 남은 건 어머니에게 굴종한 버러지들뿐. 난쟁이 왕국은 피와 먼지 속에 불타오르리라!”
─저벅저벅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가 잘린 단탈렉트는 눈을 뒤룩뒤룩 굴렸지만 다가오는 이를 볼 수는 없었다.
그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아직 난쟁이 왕국에는 아울레의 핏줄을 이은 자가 있다. 왕의 동생이자 히드라의 목을 벤, 울그바흐. 그가 울그렉 이후트를 막아낼 것이다.”
그 말은 들은 단탈렉트는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흐흐흑, 큭. 그 이름을 아는 걸 보니. 난쟁이로군. 아까 말하지 않았나. 놈은 어머니에게 굴종하며 꼬리를 만 개다. 왕인 형을 배신하고 조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배신자이자 패배자. 그것이 너희 난쟁이들이 이곳까지 도망 온 이유 아닌가.”
그 말은 들은 난쟁이는 침묵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단탈렉트를 향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모습이 눈에 담긴 순간, 단탈렉트의 눈은 크게 떠졌다.
“너는…….”
“내 이름은 아울레 아누 아르바흐. 정통한 아울레의 핏줄이자. 왕가의 혈통을 잇는 자.”
아르바흐는 아버지가 남긴 망치, 크잣티라엘을 들어 올리며 단탈렉트를 내려다봤다.
그 눈은 바위처럼 굳세고, 산처럼 부동했다.
“왕가의 이름을 걸고, 내가 바락크툼을 지켜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