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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17화 (117/241)

117화. 방랑자들 (4)

‘뭔가 있다.’

아르바흐의 반응을 지켜보던 호진은 눈을 반짝였다.

“대사막을 아십니까?”

“네에……. 알고 있습니다. 대사막 시칸. 남부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 거대한 사막을 모르기는 어렵겠죠.”

아르바흐는 고개를 주억이며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호진이 원한 반응은 아니었다.

분명 조금 전엔 단순히 ‘알고 있다’라는 반응이 아니었으니까.

‘지도자로서는 영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제법 자신의 속내도 숨길 줄 알았다.

“아시는군요. 시칸이 생각보다 유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 시칸보다도 제국이 더 거대하다던데, 언젠가 시간이 되면 제국도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호진은 옅게 웃으며 모른 척 화두를 돌렸다.

괜히 깊게 파고들어 가봤자 경계심을 살 뿐이었다.

“아, 아직 안 가보셨군요. 세계의 중심이자 문명의 집결지라 불리는 곳입니다. 꼭 한번 가볼 만한 곳이죠.”

“그렇군요. 괜찮으시면 제국 얘기를 조금 더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호진은 여유롭게 다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이렇게 다른 얘기를 하다 보면 아직 젊고 경험이 부족한 아르바흐는…….

“물론입니다. 한데 그전에 아까 대사막을 건넌다고 하셨는데, 혹시 어째선지 여쭤봐도 될까요?”

미끼를 물기 마련이었다.

원하던 질문에 호진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억누르며 대답했다.

“그쪽을 통해 동부 왕국연합으로 갈 수 있다더군요. 무슨 길이 하나 있다고.”

대답을 들은 아르바흐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었다.

그러곤 어딘가 멍해 보이는 표정으로 입을 뗐다.

“그쉬 나학.”

“그쉬 나학? 그게 뭡니까?”

호진의 질문에 아르바흐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눈빛이 돌아왔다.

“아아, 죄송합니다. 공용어로 풀어 말하면 ‘바람이 머무는 협곡’입니다. 저희 바룩크툼 왕국이 관리하는 통행로이자 관문이기도 하고요.”

‘그렇군.’

이제야 아르바흐의 반응이 이해되었다.

대사막을 건너면 그들의 왕국, 바룩크툼이 나오는 것이었다.

“괴물들을 피해 도망 중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관문은 무사한 겁니까?”

“……아마 괜찮을 겁니다. 괴물들이 출몰한 곳은 산속에 있는 수도 근방이니까요. 관문을 지키는 난쟁이들은 무사할 겁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호진은 안도하는 척 웃어 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아르바흐의 말은 위화감 투성이였으니까.

‘왕국의 수도가 위험한데 관문을 지키는 병력들은 무사할 거라고?’

그럴 리가 있나.

만약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다.

관문의 병력들이 수도의 위험을 알고도 지원을 가지 않았거나.

그들이 수도의 위험을 모르거나.

후자라고 한다면 이 난쟁이들은 역시 수도에서 왔다는 말이다.

그럼 더더욱 호진과 함께 돌아가 관문에 사실을 알리고 군대를 소집해 수도를 구하러 가야 하는 게 아닌가?

만약 일전에 말한 고대신이라 불리는, ‘울그렉 이후트’라는 존재를 이길 수 없어서 그런 거라면.

하다못해 남은 난쟁이들에게 그 소식을 알려 대피라도 시켜야 한다.

적어도 자신의 영지에 있는 난쟁이들에게라도 말이다.

‘뭔가 있군.’

어쩌면 이들은 단순히 괴물들에게 쫓기다 게이트를 넘은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호진은 심란해 보이는 아르바흐를 떠보듯 물었다.

“가는 길이 같으니 함께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아르바흐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삼켰다.

안 그래도 심란해 보이던 그의 표정이 꺼무죽죽해졌다.

그 순간 언제부터 들었는지 모를 구르드가 끼어들었다.

“그거 좋은 제안이로군. 고민해봐야겠어. 한데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슬슬 쉬는 게 어떤가?”

“……그렇군요. 내일 또 움직이려면 이만 쉬어야죠.”

호진은 옅게 웃으며 물러났다.

뭔가 숨기는 게 있다.

꽤 신뢰와 친분을 쌓았음에도.

그것으로는 부족한 정말 치명적인 무엇인가가 있는 거다.

지금으로선 그것을 강제로 알아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고집이 강한 저들이 말해 줄지도 의문일뿐더러, 호진은 그들의 능력이 필요했으니까.

일행들에게 돌아온 호진은 침낭에 몸을 뉘었다.

구르드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쉴 시간이었다.

‘딱히 고되지는 않았지만 휴식은 중요하니까.’

그렇게 김포에서 밤은 조용히 흘러갔다.

다음 날.

산길에서 벗어나 강화대교 근처까지 도착한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저런 건 처음 보는데…….”

분명 이전에 지나왔던 길임에도 처음 보는 장소처럼 낯설었다.

도시 전체가 마치 하얀 눈으로 뒤덮인 듯했다.

회색의 건물과 건물 사이엔 하얀색 천들로 이어져 바람에 흔들렸다.

그건 마치.

“거미줄 같네.”

용재가 중얼거렸다.

용재와 호진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도시를 바라보던 구르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그러곤 비틀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았다.

“괜찮습니까?”

호진의 물음에 구르드는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놈들이 이곳에 왔네.”

“놈들이라면…… 당신들을 쫓아온 그 괴물들 말입니까?”

“그래, 울그렉 이후트. 그녀의 군대들이지. 이제 이곳은 지날 수 없네.”

호진은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다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가능할 겁니다. 아마도.”

“그게 무슨 소리인가?”

구르드가 불신에 찬 목소리로 묻자, 호진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전에도 한 번 써먹었던 방법인데, 제법 쓸 만합니다.”

“그게 뭔가?”

구르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호진은 발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땅 밑으로 지나가는 겁니다.”

***

─첨벙첨벙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 튀기는 소리가 났다.

어두컴컴한 지하 배수로.

그곳으로 한 무리의 난쟁이들과 사람들이 숨죽이며 나아갔다.

다행히 예상대로 괴물들은 지하의 존재를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이동은 순조로웠다.

“이 짓거리를 또 할 줄은 몰랐는데…….”

용재의 중얼거림에 예은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느라 입을 틀어막은 채였다.

‘아, 이전에도 하수구는 힘들어했지.’

탐색 능력이 뛰어난 만큼, 끔찍한 하수구 내부의 모습과 냄새에 더욱 고통 받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늑대들은 하수구 내부로 들어오지조차 못했다.

냄새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여 늑대들은 따로 우회할 길을 찾아 따로 길을 떠났다.

반면 의외였던 것은 난쟁이들이었다.

그들은 낮은 신장 덕에 천장이 낮은 하수구를 지날 때도 허리를 숙일 필요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냄새도 견딜 만한지, 불평 한번 없이 잘 따라오고 있었다.

오히려 지하에 이런 시설이 있다는 사실에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인간들이 지하에 이런 공간을 만들다니…….”

“비가 올 때 물이 빠지게 하기 위한 공간이라더군.”

“이건…… 철산의 공법이구만. 배합은 달라도 우리 쪽에서 쓰는 것과 원리는 같아.”

“그 모래와 자갈이랑 검은 점토를 섞는 것 말인가? 그걸 가지고 이런 대규모 공사를 벌이다니 믿을 수가 없군.”

난쟁이들은 작게 속삭였지만 소리가 울리는 탓에 다 들렸다.

건축술과 야장이 발달한 난쟁이라지만, 아직 지구의 기술은 미지의 영역일 것이다.

호진이 기대하는 것은 난쟁이들의 기술과 호연이 지닌 과학기술과의 만남이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조용히 다가온 아르바흐가 흥분에 차 말했다.

“이곳의 인간들은 굉장합니다. 밖의 거대한 건축물들도 그렇고. 마치 우리 난쟁이들 같군요.”

“지금 보신 건 저희 문명의 일부입니다. 언젠가는 다양한 건축물들을 보여드리고 싶네요.”

그들이 본 것은 기껏해야, 아파트 몇 채와 상가건물들과 주택들.

그리고 이 지하 배수로가 전부였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로 놓고 보면 이보다 더 다양하고 놀라운 시설과 건축물들이 있을 터였다.

“아아, 부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호진의 말을 들은 아르바흐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호진은 점점 아르바흐가 마음에 들었다.

다른 문명에 대해 거부감이 없고, 학구열과 호기심이 왕성했다.

분명 태평한 시대에 태어났으면 좋은 지도자가 됐을 것이다.

학문과 문명을 부흥시킬 재목.

그러나 지금은 난세였고, 그는 난세의 지도자가 되기엔 지나치게 유약했다.

이런 면을 그의 부친이 잘 이끌어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호진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아르바흐 님. 실례를 무릅쓰고 여쭙겠습니다. 부친이신 아달바흐님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여태껏 언급을 피하는 것이 보였기에 묻지 않았던 그것.

호진의 물음에 아르바흐의 빛나던 눈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동안의 교류 덕일까.

아르바흐는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마지막에 저희를 위해 시간을 벌어주셨습니다.”

“어쩌면 게이트를 넘어 이쪽으로 오셨을지도 모른다. 아르바흐.”

뒤따라오던 구르드가 위로의 말을 건네자, 아르바흐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럴까요? 울그렉 이후트가 뒤에 있었습니다. 그녀의 여덟 자식들도요.”

“……그건.”

구르드는 침음을 삼킨 후, 이내 미안하다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거였군.’

예상은 했었지만, 씁쓸한 이야기였다.

“아달바흐 님은 아르바흐 님을 많이 믿으셨나 봅니다.”

호진의 말에 아르바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유를 묻는 그 눈빛에 호진은 말을 이었다.

“자신의 자리에 책임을 다하는 자는 결코 흔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가 가문의 가주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아달바흐 님은 그것을 충실하게 행하셨습니다.”

“…….”

잠시 침묵하던 아르바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주의 의무는 가문을 따르는 이들을 보살피는 것. 그것을 저에게…….”

“그렇습니다. 만약 아르바흐 님을 믿지 않았다면, 당신께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아달바흐 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알고 싶네요.”

아르바흐는 복잡한 눈빛으로 침묵을 이어가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호진을 바라보는 그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아버지는…….”

아르바흐는 띄엄띄엄 아달바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호진은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르바흐의 이야기는 호진에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르바흐, 그는 자기 자신에게 아버지의 일화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르바흐는 그 이야기를 속으로 천천히 곱씹었다.

마치 아버지가 그에게 인생에 대해 말해 주는 기분이었다.

한참 이야기를 마친 아르바흐는 호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영광이었습니다.”

호진은 싱긋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구르드는 몸을 가볍게 떨었다.

‘아르바흐 님이…… 변하고 계신다.’

유약하고 겁이 많던 아르바흐.

지도자로서는 부족하고 여겨졌던 그가 점점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몸에 흐르는 기세에, 말에, 행동에 기품과 무게가 깃들고 있었다.

‘저 남자 덕분이다.’

시리온 왕국의 왕이자 이곳에서 만난, 인간들의 지도자.

그가 몸소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아르바흐를 이끌고 있었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다른 세계의 인간을 닮고 있다는 것은 어딘가 불안함도 느껴졌지만.

지금으로서는 기뻐할 일이었다.

그렇게 나아가기도 잠시, 호진이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천천히 몸을 돌린 호진은 조용하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이곳이 배수로의 끝입니다. 이곳부터는 지상을 가로질러 가야 합니다. 조금만 더 가면 도시에서 벗어날 테고, 금방 다리가 나올 테니 저를 믿고 따라와 주십시오.”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호진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듣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고 믿게 하는, 신뢰를 주는 힘.

구르드를 비롯한 모든 난쟁이들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진을 따라온 일행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 지상으로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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