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방랑자들 (3)
각자 자리를 잡고 앉은 난쟁이들은 호진이 제공한 물과 음식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얼핏 봐도 하루 이틀 굶은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렇게 난쟁이들을 약간의 측은함을 담아 보고 있던 그때 누군가 호진의 눈에 띄었다.
“여기 받으세요. 여기 담요 있습니다.”
무리의 지도자 아르바흐가 직접 음식과 담요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실질적인 결정은 대부분 구르드가 내리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항상 최종 결정은 그의 책임이었을 것이다.
항상 책임감으로 짓눌려서인지 피곤해 보이던 그의 표정도 지금만큼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싹이 나쁘지는 않은데……?’
호진은 그런 아르바흐의 모습을 의외라는 듯 바라봤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들만 보면 유약하고 겁이 많으며,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한 무리의 지도자를 자처하기에는 너무나 소심하고 부족해 보이는 인물.
하지만, 무리를 챙기는 그 마음가짐만큼은 진짜인 듯했다.
구르드도 이를 모르진 않는지, 아르바흐가 실수할 때마다 호통을 쳤지만 그런 후에는 늘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는 했다.
‘조금 더 알아볼까.’
호진은 아르바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르바흐 님.”
“아, 호진 님.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호진을 발견한 아르바흐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호진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겸손하지만 그것이 과하다.
더군다나 무리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와중이다.
이러면 사람들이 아르바흐에게 기대거나 신뢰하기 어려워질 터다.
난쟁이들의 시선을 느낀 호진은 재빨리 아르바흐를 치켜세웠다.
“저야 아르바흐 님이 부탁하신 대로 했을 뿐인걸요.”
“……?”
호진은 어리둥절해하는 아르바흐와 어깨동무를 한 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친한 척 이야기를 꺼내며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둘에게 쏠렸던 시선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이, 이게 무슨……?”
뭔가 눈치챈 아르바흐는 작지만 당황한 목소리로 조용히 되물어왔다.
그것에 대해 답한 것은 다름 아닌 구르드였다.
“아달바흐의 아들 아르바흐! 체통을 지켜라.”
호진은 아직 이해를 하지 못한 아르바흐에게 풀어서 설명했다.
“아르바흐 님.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보는 앞입니다. 본인을 너무 낮추지 마십시오. 지도자는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거목이 되어야 합니다.”
“아……!”
그제야 아르바흐는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내지르곤, 얼굴을 붉게 붉혔다.
그런 아르바흐를 지켜보던 구르드는 약간 놀라며 호진에게 말했다.
“고맙네. 아르바흐의 체면을 생각해준 것도. 이렇게 깨달음을 준 것도.”
“별거 아닙니다. 그보다 구르드와 아르바흐 님의 관계는 대체 무엇입니까?”
섬기는 신하라 하기에는 너무 격이 없었다.
가능성은 두 가지.
집안의 큰 어른이거나, 스승이거나.
“스승이네. 어릴 적부터 아르바흐의 무기 수련을 담당했지.”
‘후자였군.’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래서 아르바흐를 그렇게 몰아세웠던 거였어.’
그는 아르바흐가 이렇게 유약하게 자란 것에 대한 자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방식이 잘못됐다.
아르바흐처럼 유약한 이는 호통을 치고 몰아세운다고 강해지지 않는다.
그에게 필요한 건 그거 스스로 의지를 다질 수 있는 계기였다.
구르드와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고개를 돌려 아르바흐를 바라봤다.
“거목…… 거목이라.”
아르바흐는 호진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아르바흐 님.”
“앗, 넵.”
생각에 잠겨있던 아르바흐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아까와는 달리 존경하는 기색이 깃든 눈빛이었다.
‘상황이 나쁘진 않네.’
약간 부담스러웠지만 호진은 앞으로의 캠프를 위해서 기꺼이 그의 멘토가 되어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존경과 신뢰를 먼저 형성해야 하는데, 그 둘 모두 획득한 듯했다.
“식사 먼저 하시죠. 이미 다들 받았습니다.”
“아.”
아르바흐는 한 명 한 명 이름을 중얼거리며 확인한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 받았네요. 그럼 저는 밖에 경비병들에게 음식을 좀 나눠주고 오겠습니다.”
“잠시만요. 경비병들은 근무가 끝난 후 식사할 겁니다. 경비에 집중해야 하니까요.”
“……이런. 그럼 저는 경비병들이 오면 함께 식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르바흐의 대답에 호진은 침음을 삼켰다.
‘이건 지도자가 아니라 보모다.’
지도자가 자신의 사람들을 아이 취급해서는 제대로 된 임무 분배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호진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비병에겐 경비병의 역할이 있습니다. 지도자에겐 지도자의 역할이 있고요.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일수록 효율적으로 움직일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식사를 안 하시면 그동안 뭘 하실 겁니까?”
“그건…….”
“나중에 따로 식사를 할 시간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십니까?”
“아, 아뇨, 아닙니다.”
아르바흐가 시무룩해지자 호진은 그제야 옅게 웃으며 음식을 건넸다.
“먹어야 머리를 쓰고 몸을 쓸 수 있습니다. 지도자일수록 몸의 상태를 신경 써야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아르바흐는 꼬르륵 소리가 나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게 언제더라.’
아르바흐는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음을 깨달았다.
먹을 걸 보자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몸이 식사를 원하고 있었다.
“자, 드시죠. 스스로를 돌볼 줄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돌보겠습니까.”
호진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프를 건넸다.
아르바흐는 또 한 번 큰 충격을 받은 듯 어지러움을 느꼈다.
‘오늘은 정말이지 귀인을 만났구나.’
아르바흐는 부끄러움에 어금니를 꽉 깨문 후, 수프를 퍼서 입으로 옮겼다.
그리고…….
“아!”
고소한 버터 향과 달큰한 옥수수와 양파의 맛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알 수 없는 감칠맛과 짭짤한 맛이 느껴졌다.
“이, 이건?”
아르바흐가 고개를 돌리며 묻자 호진은 갸웃하며 대답했다.
“콘수프입니다만…… 혹시 입에 안 맞으시나요?”
“아니, 아닙니다. 이게 콘수프라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이지 제가 먹어본 수프 중 최고입니다.”
아르바흐는 고개를 격렬히 저은 후, 호진이 건넨 비스킷과 수프를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호진은 뿌듯하면서도 동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판타지 세계관에서 왔으니 익숙한 음식일 줄 알았는데. 역시 현대 MSG의 맛은 대단하군.’
비단 음식이 맛있는 건 아르바흐뿐이 아닌 듯했다.
이제 보니 배고파서였기도 하겠지만, 난쟁이들이 하나같이 진미를 먹는 표정으로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음식을 제공하는 보람이 느껴지는 반응들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대충 수프 열 접시를 해치운 아르바흐를 보며 호진은 약간 질린 표정을 지었다.
‘다들 어마어마하게 잘 먹는군.’
저 작은 몸에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나 싶을 만큼 잘 먹는 난쟁이들.
70명의 난쟁이들은 200인분의 식량을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뭐 일만 잘하면 이런 식량쯤이야.’
다른 건 몰라도 강화도에 식량만큼은 충분히 확보해뒀다.
보통 사람의 3배 이상 일을 잘하면 될 일이다.
호진은 다소 풀어진 분위기를 틈타 아르바흐에게 질문을 건넸다.
“다들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나이 말입니까? 음, 저는 28세입니다. 여기 구르드는 128세이고요.”
“……128세요?”
호진이 깜짝 놀라자, 구르드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우리 종족이 없는 세계라 했죠? 저희들은 보통 150, 길면 200살까지도 삽니다.”
“놀랐습니다. 그걸 감안해도 구르드 님은 굉장히 정정하시군요.”
호진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구르드는 여전히 자신만 한 도끼를 들고 뛰어다녔으니까.
“고맙네, 그거 듣기 좋은 소리구만. 하지만 이건 우리 난쟁이들의 특성이지.”
“특성이요?”
호진의 질문에 구르드는 도끼를 들어 보이며 답했다.
“죽기 전까지 도끼와 망치를 드는 것. 그것이 우리 난쟁이들의 삶이라네.”
구르드의 말에 난쟁이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중 한 난쟁이가 구르드의 말에 신나는 듯 답했다.
“한 가지를 빼먹었소. 구르드.”
“그게 뭔가. 에우두르. 헛소리를 내놓으면 그 쓸데없이 붉은 수염을 잘라버리겠네.”
“우리 난쟁이들이 죽을 때까지 놓지 않는 건 또 있지 않소! 바로 술과 음식이지! 아후!”
““아후!””
에우두르라는 난쟁이가 선창하자, 난쟁이들이 신을 내며 소리쳤다.
다들 바닥과 나무 그릇을 두들기며 웃음을 터트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난쟁이 식 농담인 듯했다.
호진이 함께 웃자, 구르드도 피식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오늘 밤에는 붉은 수염이 잘리지 않을 듯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아르바흐가 호진에게 물었다.
“호진 님은 조만간 저쪽 차원으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호진은 이동 중에 구르드에게 현 상황을 어느 정도 공유했다.
차원의 연결과 괴물들의 습격.
강화도에 세력을 구축하고 저쪽 차원과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중간중간 불필요하거나 조심해야 하는 정보들은 숨겼지만, 적어도 차원 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사실까지 숨기고 싶지 않았다.
난쟁이들과 신뢰를 쌓기 위해선 호진도 진심을 보여줘야 했으니까.
다행히 구르드와 아르바흐 모두 고심 끝에 강화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울그렉 이후트’ 때문에 왕국이 위험하다는 말뿐이었다.
‘그곳에 남은 사람들도 있을 텐데? 한 명도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그들의 표정에는 분노와 미묘한 자책감이 감돌았다.
뭔가 숨기는 게 분명했지만 그것이 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런 대화 속에 힌트가 있을지도 몰랐기에 호진은 아르바흐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쪽 차원에 가셔서 무얼 하실 계획입니까?”
“글쎄요. 우선은 그쪽 차원에 있는 왕국을 복구할 생각입니다.”
“……왕국이요?”
아르바흐의 얼굴에 긴장감과 당혹감이 감돌았다.
낚시를 하려면 미끼가 좋아야 한다.
그리고 아르바흐는 그 미끼를 정확히 물었다.
“시리온 공국. 그곳이 제가 넘어갈 곳의 이름입니다. 동시에 제 왕국이기도 하고요.”
“……!”
호진의 말에 아르바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시리온 공국. 그 제국 남단에 위치한 공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역시 알고 있다.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정확합니다. 왕국을 망국의 길로 이끌던 ‘얼굴 없는 자’를 최근 저희가 쓰러트렸습니다. 지금은 거의 폐허나 다름없는 곳이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도 살려봐야죠.”
아르바흐의 입이 벌어져 다물어질지 몰랐다.
상대에게 저렇게 표정을 다 보여주다니, 아직 가르쳐줄 게 많을 듯했다.
그러나 놀란 건 아르바흐만이 아니었는지, 구르드 역시 입을 벌린 채 호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구르드와 아르바흐는 허둥지둥 일어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결례가 많았습니다. 설마하니 이계의 사람이 공국의 왕이셨을 줄은.”
구르드의 말에 호진은 손사래를 쳤다.
이런 대우를 바라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말을 다시 낮춰주십시오, 저희는 이미 한 식구가 아닙니까.”
“……그래도.”
“정말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러시니 더 불편합니다.”
“흠,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겠네.”
구르드는 금방 다시 말투를 원상 복구했다.
얼마 보지 않았지만 참 시원시원한 종족이었다.
“왕이셨다니. 과연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르바흐는 눈을 반짝이며 호진에게 말을 건넸다.
민망해진 호진은 코트를 벗으며 대답했다.
“왕이라 해도 이름뿐입니다. 지금은 섭정해주시는 분들이 잘 통치해주시고 있을 겁니다.”
“아닙니다. 호진 님은 직접 왕국을 통치해도 훌륭하게 잘 이끄실 겁니다. 그래도 시리온 공국이 최근 고대신 추종자들로 인해 위태롭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잘 해결하셨나 봅니다.”
“네, 그 문제는 잘 해결했습니다. 왕국으로 가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별거 없을 겁니다. 아마 금방 정리를 마치고 대사막을 건너겠죠.”
“대…… 사막을 말입니까?”
호진의 말에 아르바흐의 눈빛이 뭔가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