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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15화 (115/241)

115화. 방랑자들 (2)

“모두들 나오게.”

나이 든 난쟁이의 말에 숨어있던 다른 난쟁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둘 나타난 이들의 눈동자에는 겁이 서려 있었다.

앞서 뛰쳐나왔던 스무 명 정도의 전사들과 달리, 나이 들거나 어리거나 여자들로 이루어진 이들이었다.

이들의 머릿수를 헤아리던 호진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얼추 쉰 명 정도인가?”

“정확히는 쉰둘이지.”

나이 든 난쟁이는 커다란 도끼를 들어 용재를 묶고 있던 덫을 끊어내며 말했다.

“억!”

떨어지는 용재를 두툼한 두께의 팔을 지닌 난쟁이들이 받아냈다.

이를 잠깐 지켜보던 호진은 고개를 돌려 하얀 수염이 성성한 난쟁이에게 물었다.

“지도자는 당신입니까?”

호진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단호하게 흔들며 대답했다.

“내 이름은 너른바위 구르드. 그저 늙은 전사일 뿐이네.”

“반갑습니다. 저는 이호진이라고 합니다.”

강인한 힘이 전해지는 구르드와 악수를 나눈 호진은 재차 물었다.

“구르드. 그럼 당신들의 지도자는 누굽니까?”

“그건…….”

구르드가 잠시 고개를 돌려 전사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찾았다.

그때 누군가 노약자들 사이에서 쭈뼛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발견한 구르드는 벼락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아달바흐의 아들 아르바흐!”

“으으……. 미, 미안합니다.”

한눈에 봐도 다른 이들과는 다른 고급스러운 갑옷을 두른 젊은 난쟁이.

하지만 옷에 걸맞지 않게 소심한 태도에 구르드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바룩크툼의 전사가 노인과 아녀자들 사이에 숨다니…….”

구르드의 얼굴이 찡그려질수록 젊은 난쟁이의 어깨가 점점 움츠러들었다.

한숨을 푹 내쉰 구르드는 화를 내는 대신 안타까움이 담긴 목소리로 호진에게 말했다.

“이쪽이 우리들의 지도자네.”

“아, 아달바흐의 아들 아르바흐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호진은 잔뜩 긴장한 그와 악수를 나눴다.

구르드와 악수를 나눌 때와는 달리 작은 초식동물처럼 겁먹고 떨리는 손이었다.

이를 보면 눈살을 찌푸린 구르드는 아르바흐 대신 입을 말을 이었다.

“우리는 붉은 산맥에 위치한 바룩크툼의 난민들이네. 검은 산양 아달바흐 님을 따르는 영지민들이지. 어쩌다 보니 이곳까지 흘러왔군.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넘어온 지 얼마 안 된 걸까.

난쟁이들도 도통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곳은 지구라는 다른 차원입니다. 혹시 푸르스름한 빛무리를 넘어오지 않았습니까?”

“다른 차원이라니, 그게 무슨…….”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구르드.

높이 솟은 아파트에 시선이 멈췄던 그는 그럴지도 모르겠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곤 이내, 호진의 물음에 이어서 답했다.

“……빛무리를 넘었네. 괴물들에게 쫓기다가 그만.”

“괴물이요?”

호진은 구르드의 말에 재빨리 되물었다.

“……그래, 괴물들. 언젠가부터 붉은 산맥을 좀먹기 시작한 괴물들 말일세. 흉측하고 기괴한 그 끔찍한 생명체들이 우리를 쫓아 이곳까지 넘어왔네.”

“강합니까?”

어쩌면 놈들이 이곳, 김포의 환경을 바꾸고 있는 존재들일지도 몰랐다.

호진의 물음에 구르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지. 하지만 정말 무서운 건 그 괴물들의 주인이네. 바룩크툼의 왕실근위대도, 드워프 용 사냥꾼도 그 녀석에게 모두 죽어 나갔으니까.”

“그 녀석이 누굽니까?”

호진의 물음에 구르드는 두려운 듯 몸을 떨었다.

구르드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울그렉 이후트. 신화 속에 전해져 내려오는 고대신의 이름이지.”

구르드가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아르바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건 비단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노약자들은 물론 전사들까지 흠칫 몸을 떨었다.

‘고대신.’

호진 역시 티 나지 않게 침음을 삼켰다.

그 이름이 여기서 나올지 몰랐다.

강신한 것만으로 천지를 뒤엎는 규격 외의 존재들이다.

그런 녀석이 상대라면 최대한 빨리 김포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행히 이곳엔 넘어오지 않은 것 같네만.”

구르드의 말에 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건 다행이지만, 확실한 겁니까?”

“그 괴물이 이곳까지 넘어왔다면 좋든 싫든 알게 됐을 걸세.”

“그렇군요.”

저렇게까지 확신한다면 더 물을 필요는 없었다.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렸다.

호진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들이 몸을 숨기고 있던 건축물이었다.

단순한 구조지만 장식이 화려하고, 안정적이었다.

‘피난하면서 저런 구조물을 지었다고?’

그런 호진의 시선을 의식한 구르드는 턱수염을 긁으며 말했다.

“그렇게 빤히 보지 말게, 급하게 짓느라 엉망이니.”

“급하게요?”

호진이 놀라며 묻자 구르드는 인상을 찡그리며 답했다.

“이동 중에 잠깐 쉬기 위해 지은 거니까 어쩔 수 없지. 한 시간쯤 걸려 만들었네.”

난쟁이 70명이 들어갈 공간을 고작 한 시간 만에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것도 텐트가 아닌 주변에 있는 자재들을 이용해서.

호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욕심나는데.’

판타지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난쟁이는 땅의 자식들이다.

금속을 캐고 제련하며 야장 기술이 발달하고, 지하에 거대한 건축물들을 쌓아 올리는 건축의 대가들.

적어도 그중 일부는 들어맞은 셈이었다.

호진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어디 가실 곳은 있습니까?”

호진의 물음에 구르드는 얼굴을 구겼다.

“자네 지금 놀리는 건가? 이곳이 다른 차원이라는 사실도 방금 안 우리에게,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놀리다니요. 그럴 리가요. 혹시나 해서 여쭤봤습니다. 제 권유가 실례가 되면 안 되니까요.”

“권유라면 설마……?”

구르드의 얼굴엔 희망이 빛이 깃들었다.

그런 그에게 화답하듯 호진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쯤 가면 되는 곳에 저희 거처가 있습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호진의 물음에 이곳저곳에서 안도하는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난쟁이들도 이래저래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

“물론이네! 자네의 호의는 내가 잊지 않겠…….”

“그 전에 작은 부탁이 있습니다.”

호진은 구르드의 대답을 끊으며 이어 말했다.

단순히 호의를 베푸는 것으로 여겨지면 곤란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게 이 세상의 법칙이었으니까.

구르드도 그제야 조금 흥분이 식은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뭔가?”

“안전한 거처와 더불어 음식을 제공해드리겠습니다. 대신 저희 캠프의 건축을 도와주십시오.”

호진은 웃음을 지운 채 말했다.

이에 구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대신 우리가 금속들을 제련할 공간을 마련해 주게. 그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물건들이 마음에 들면 제값을 주고 구매해주게.”

그 말을 들은 호진은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방금 구르드의 말은 난쟁이들이 야장 기술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물론입니다. 제련할 공간은 물론 여러분을 위한 영토도 드리겠습니다.”

“따…… 땅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준다는 말인가?”

“우리들의 법만 어기지 않는다면요.”

구르드는 예상보다 후한 제의였는지 입을 벌리고 한동안 답하지 못했다.

그러곤 이내 흠흠 헛기침을 하고 아르바흐에게 다가가 의견을 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최종 결정을 내릴 때는 그룹의 지도자 아르바흐가 동의해야 하는 모양.

“저는…… 아니 저희는 가, 감사히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과하게 몸을 낮추는 아르바흐의 모습에 호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한 그룹의 지도자가 너무 자세를 낮췄기 때문이었다.

합당한 거래로 얻어낸 것인데, 마치 베풂을 받은 것처럼 구는 모습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호진은 그것을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좋습니다. 저희 캠프까지 안전하게 안내해드리죠.”

호진은 손을 뻗어 다시 한번 아르바흐와 악수를 나눴다.

***

예은과 도훈이 합류하고 곧장 이동이 시작됐다.

100명에 가까운 인원들, 심지어 노약자까지 포함되자 이동속도는 현저하게 떨어졌다.

이에 호진은 기존의 계획을 변경, 최대한 감염자들을 피해 가는 노선을 선택했다.

또한 난쟁이들이 왔다는 북쪽 길도 피해야 했다.

그들을 쫓아왔다는 괴물들 때문이었다.

그렇게 호진 일행은 한참이나 길을 돌아서 가야 했다.

중요한 것은 난쟁이들을 안전하게 강화까지 데리고 가는 거였기에.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결국 해가 지기 시작했다.

사방이 트인 작은 야산의 정상.

최대한 우회한 결과 인적이 드문 산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12월의 저녁 바람이 몸의 체온을 뺏어갔지만, 적들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기에 나쁘지는 않은 위치였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호진은 손을 들었다.

“정지,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하겠습니다.”

호진의 말에 난쟁이들은 고분고분 따랐다.

“야영을 한다. 경계병은 주변에 함정을 만들고 나머지는 야영지를 만들도록.”

구르드의 명령 아래 난쟁이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주위 바위와 나무들을 이용해, 가지고 온 자재들과 합쳐 그럴듯한 야영지를 뚝딱 만들어냈다.

마치 마법 같은 그 모습에 일행들은 넋을 놓고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나 걸린 거죠?”

“30분쯤 걸렸다.”

“내가 텐트를 치는 게 그쯤 걸리는데.”

수군거리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난쟁이들의 어깨가 으쓱한다.

그 말이 그들의 의욕에 불을 붙인 건지.

난쟁이들은 한층 더 빠르게 손을 놀려 임시거처에 조각까지 새기기 시작했다.

건물의 높이를 높이고, 계단과 문을 더 만들었다.

일행은 드워프들이 중세 유럽의 건축양식에서나 볼 법한 문양들을 나무와 바위에 새기는 모습을 넋 놓고 보았다.

이젠 임시거처라기보단, 화려한 건축물 같은 모양새였다.

“충분합니다. 구르드.”

호진의 만류에 그제야 구르드는 난쟁이들을 말렸다.

다들 아쉽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며 건축을 마무리했다.

이를 지켜보던 일행들이 쪼르르 몰려와 호진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들, 반드시 데려가야 해요.”

“작은 체구에서 저런 힘과 섬세함이라니, 믿기 힘들다.”

용재와 도훈조차 혀를 내둘렀고, 호진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들을 데려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그들을 쫓는다는 괴물들과 구르드가 말한 고대신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안 담글 수는 없지.’

문제가 생긴다며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호진은 난쟁이들을 따라 야영지로 들어섰다.

‘안쪽은 더 놀랍네.’

바람이 완벽하게 차단된 따듯한 실내, 하지만 환기구를 만들어두어 답답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새 난로마저 만들어 그곳에 불을 지피고 물을 올려놓았다.

호진은 혀를 내두르며 구르드에게 물었다.

“음식은 충분합니까?”

“우리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시게.”

단호한 대답에 호진은 옅게 웃음 지었다.

이젠 구르드의 화법이 익숙해진 탓이었다.

‘먹을 게 없다는 뜻이군.’

다들 지치고 굶주렸으며 피로한 상태였다.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캠프로 데려가기 위해서는 먹을 걸 나눠줘야 했다.

“구르드. 저희와 같이 식사하시죠.”

호진의 말에 구르드는 호진의 짐들을 조용히 훑어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가방들을 보고 구르드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고 했네. 그러니 자네들은…….”

구르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호진이 인벤토리에서 음식들을 줄줄이 꺼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난쟁이들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참 동안 음식들을 꺼내 펼쳐놓은 호진이 구르드를 보며 말했다.

“양은 충분하니까, 다 함께 식사하죠. 이제 한 식구 아닙니까.”

“……고맙네.”

그렇게 대답하는 구르드는 봄바람에 녹은 땅처럼 경계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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