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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13화 (113/241)

113화. 협상 (2)

“벌써 가는 건가?”

국장이 아쉬운 듯 묻자 호진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볼일이 있습니다. 강화를 오래 비워두기도 했고요.”

“강화라……. 그렇군.”

국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주억거렸다.

그가 전후처리보다 서둘렀던 것이 호진과의 결속 강화였다.

이번 일을 지켜봤던 정부도 큰 리스크를 떠안으면서까지 호진 세력의 자치권을 인정했다.

그러곤 강화가 아닌 서울로 옮겨올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호진의 의지는 확고했다.

자치권의 경우는 감사히 받아들였으나, 거점의 이동은 거부했다.

이에 국장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강화에서 서울까지는 몇 시간이면 닿는 거리였다.

물론 그가 서울에 머물러줬다면 더 든든했겠지만, 여차할 때 지원 오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호진 대표와의 관계니까.’

그런 국장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호진이 입을 열었다.

“정부와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김포까지는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해 두겠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아니, 가능하겠나?”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과 감염자들이 지배하는 땅, 김포.

정부는 그곳의 출입을 금지하고 봉쇄했다.

지금은 더 이상의 생존자 구출은 어렵다고 판단, 미사일과 폭탄을 퍼부어 김포를 쓸어버리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아직 반대 의견에 부딪혀 실현이 지연되고 있지만, 시간문제였다.

그런 문제를 호진이 마당에 쌓인 눈이라도 치우겠다는 듯 말을 꺼낸 것이다.

국장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작 호진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게 말이 되나?’

서울 이전을 거절하면 당연히 자치권 얘기도 취소될 줄 알았는데, 그냥 준단다.

솔직히 강화도를 버리기에는 이미 구축해놓은 기반 시설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결계를 포기하는 건 아쉬운 수준이 아니었다.

자치권도 욕심이 났지만 비교가 안 됐다.

한데. 그런 상황에서 그냥 조건 없이 자치권을 준다 하니 호진의 기분이 좋을 만도 했다.

‘그러니까 이 정도 서비스는 해줘야지.’

김포는 어차피 언젠가 정리할 땅이었다.

강화도와 연결된 유일한 땅이었으니까.

즉, 어차피 할 거였지만 생색내면서 하는 거라는 말이다.

호진의 생각보다는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관계가 흘러갔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부의 결정은 아주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이번 사태로 정부가 받았을 충격이 작지 않았을 테니까.

샴이든 아니면 샴을 상대로 보여줬던 호진의 무력이든.

어느 것도 정부가 상상하던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호진과 그 세력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 중이다.

아마 정부도 이를 상정하고 지금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쌓으려 하는 것일 터.

‘꽤 똑똑하잖아.’

뉴스에 나오던 정부는 융통성 없고 보수적인 느낌이었으니까.

그 점은 의외라는 느낌도 들었다.

호진은 국장의 눈을 바라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입니다. 확답은 못 드리겠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걸로 충분하네.”

호진의 대답에 국장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진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그때 옆에서 고저 없는 무뚝뚝한 목소리가 껴들었다.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돕겠습니다.”

경호 차장과 흑색창 부대.

그들도 떠날 준비를 마치고 청사 앞에 도열해 있었다.

올 때보다 조금은 줄어든 인원.

대신 국기가 덮어진 관들이 운구차에 실려 있다.

그 모습이 눈에 밟혔다.

하나 호진은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더라도 연민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시민들과 국가를 위해 의무를 다한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테니.

“말씀 감사합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말끝을 흐린 호진은 운구차 쪽으로 몸을 돌려 말을 이었다.

“저분들의 용맹과 헌신에 감사드리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

잠시 눈에 이채가 서린 경호 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호진은 가볍게 묵념을 했고, 다른 이들이 함께 고개를 숙이며 간략한 추모식이 벌어졌다.

호진이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경호 차장은 아주 잠깐 희미하게 떠오른 슬픔을 표정에서 지워내며 말했다.

“……그래도 대표님이 저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날은 오지 않았으면 하는군요.”

그녀답지 않은 자조적인 농담에 옆에서 지켜보던 국장의 눈이 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호 차장은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차에 오른 흑색창 부대와 경호 차장은 곧바로 청사를 빠져나갔다.

이를 지켜보던 국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호진을 바라봤다.

“저들이 먼저 갔군. 하긴 저들이 바쁘긴 하지.”

“덕분에 저도 국장님도 한숨 놓았네요.”

호진은 어제 있던 회의를 떠올리며 말했다.

하루를 푹 쉰 다음 날, 전후 처리를 위한 회의.

가장 뜨거운 화두는 다름 아닌 세종캠프였다.

이번 전투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었으니까.

다른 지역들에 비해 지역이나 세력도 컸던 만큼, 주요 전투원들과 대표의 죽음은 전력에 큰 공백을 가져왔다.

헌터 관리국에 누가 가도 그 공백을 채우기는 힘든 상황.

그나마 선택지는 드루이드 아니면 경호 차장이었는데…….

‘자네가 가게.’

대통령의 빠른 결정으로 경호 차장이 흑색창 부대의 일부를 이끌고 세종으로 내려가게 됐다.

‘제법이야.’

그 결정을 지켜보던 호진은 턱을 쓰다듬었다.

물론 일차적인 목표는 전력이 약화된 세종캠프를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다른 목적도 있었다.

현재 세종캠프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권 유린에 대해 조사하고, 정부 차원에서 안정화하는 것.

그것이 숨겨진 또 다른 목표였다.

안 그래도 부탁하려 했던 문제였는데, 역시 일을 제법 잘 처리했다.

경호 차장의 수완인지, 대통령이 유능한 건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내가 자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었을 걸세.”

국장이 웃으며 말하자 호진도 함께 피식 웃음을 흘렸다.

“큰일 날 뻔했네요.”

그러던 중 익숙한 사람이 호진을 향해 다가왔다.

“아, 청양 대표님. 안 그래도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강화로 오기로 했던 청양 대표는 어제 회의 결과를 듣고 잠시 대답을 유보했다.

“마음은 정하셨나요?”

“저희는…… 세종캠프로 가겠습니다.”

그 대답에 호진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강화까지 오시는 게 어려우시다면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폐를 끼칠 수는 없죠. 그리고 이번에 생각을 많이 해봤습니다.”

청양 대표는 이번에 여러 일들을 접하며 많이 변했다.

음모에 휩싸여 죽을 뻔하기도 했고, 호진을 보고 감명받기도 했다.

종국에 그가 절실하게 느꼈던 것은 약자로서의 위치였다.

호진을 따라 강화로 간다 해도, 이대로는 또 눈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는지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스스로 선택하고 그것을 관철할 수 있는 힘이었다.

청양 대표가 속에 담긴 이야기를 털어놓자, 호진은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것만으로도 청양 대표는 큰 용기를 얻었다.

그에게 있어서 호진은 은인을 넘어 신적인 존재였으니까.

청양 대표는 고해성사를 한 듯 새로 태어난 느낌을 받았다.

정작 호진은 그런 청양 대표의 진솔한 이야기에 당혹감을 느낄 뿐이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띠링

「플레이어의 격이 미약하게 오릅니다.」

그의 시선 한쪽에서 꾸준히 시스템 창이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정말 사이비 교주네.’

청양 대표는 아무래도 진짜 신전이라도 세울 기세였다.

호진은 청양 대표가 들리지 않도록 짧게 혀를 찼다.

“응원하겠습니다.”

호진은 짧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이에 청양 대표는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그 태도가 엄숙하고 경건해 주변이 고요해졌다.

“형, 저 아저씨는 왜 저러는 거야? 형이 또 영업했어?”

“야 이…… 영업이라니. 내가 다단계냐.”

“아, 하긴 형은 다단계가 아니라 사이비지. 그럼 포교한 거구나?”

“…….”

호진은 반쯤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억울한 점이 없지는 않지만,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말 대신 손을 썼다.

─쩌억

“악!”

용재의 등짝을 후려치자 수박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든 말든 호진은 맞은 등짝을 문지르던 용재에게 말했다.

“모기가 있네. 이 추운 날에.”

“뭐? 뭔 개소리야. 보여줘 봐!”

용재의 말에 호진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아직 못 잡았어. 너 주변에 되게 많다. 팔, 다리, 머리, 어깨, 발, 무릎, 발. 어디가 좋냐?”

“……어? 아니 괜찮아. 모기는 내가 잡을게.”

“그래?”

호진이 아쉽다는 듯 되묻자 용재가 후다닥 거리를 벌렸다.

이를 지켜보던 국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무서운 면이 있군, 자네.”

“흠흠……. 저 친구가 보시다시피 매를 버는 타입이라.”

“그것도 그거지만 저쪽이 더 무섭네.”

국장이 고개를 돌리자 아직도 호진 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청양 대표가 보였다.

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저건 의도한 게 아닙니다.”

“그게 정말 무서운 거네. 헌터들 사이에서도 자네 이야기는 이미 전설에 가까워.”

샴과의 전투에 참여했던 상위권 헌터들의 이야기는 빠르게 사람들에게 퍼졌다.

이야기를 말로 전해 들은 헌터들은 반신반의했지만, 어찌 됐든 그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이 치열하게 벌어질 정도로 퍼졌다.

이미 헌터들은 물론 관리국 전원들에게도 소문이 난 상태다.

빽빽한 시선이 건물의 창문을 넘어 전해져 올 정도였다.

“조만간 헌터들은 자네를 신처럼 모실지도 모르겠어.”

“그것만은 어떻게 좀 막아주십시오.”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은 강화도의 헌터들로 충분했다.

아니, 애초에 충분이고 자시고 호진 본인이 원하지 않았다.

믈론 신격이 오르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그게 말처럼 쉽나. 헌터들은 늘 죽음의 강에 한 발을 담그고 사는 사람들 아닌가. 신적인 존재나 사후세계라도 믿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겠지.”

국장은 오히려 이참에 종교화해서 장려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며 호진을 놀려댔다.

이에 호진은 한숨을 쉬며 하야 위에 올라탔다.

“진짜 갈 때가 됐나 보군요.”

“이렇게 가면 내가 민망하지 않나.”

막 놀리기 시작한 참에 호진이 가버리니 국장은 아쉬운 듯했다.

“그러시라고 가는 겁니다.”

호진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출발하겠습니다.”

이에 늑대에 올라탄 예은과 용재, 그리고 청랑과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웠네. 이 은혜는 잊지 않겠네.”

국장은 장난기를 빼고 진지한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이에 호진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인사를 마친 호진은 순식간에 청사를 빠져나갔다.

약 보름간의 여정을 마치고 다시 강화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번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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