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협상 (1)
해가 떠오르며 검은 안개들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던 안개들은 쫓기듯 응달로 물러났고, 아직 헌터들과 교전 중이던 ‘웜’들도 하나둘 안개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점점 줄어들던 안개는 완전히 소멸했다.
그곳에 남은 건 황폐화된 산과 시체들뿐이었다.
“……여기가 제가 알던 곳이 맞습니까?”
주문관이 눈을 끔뻑이며 묻자 국장은 신음을 내며 답했다.
“맞을 걸세.”
“이 절벽은 대체…….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 불러도 되겠어요.”
기묘한 여성과 측정 불가급의 싸움은 산봉우리를 깎아내고 대지를 갈랐다.
그 끝에 지형조차 변형시켰다.
잠시 그 전투를 떠올린 국장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호진 씨는 뭐 하는 사람일까요?”
“……나도 그게 궁금하네.”
국장은 생각했다.
호진이 불러낸 여성은 분명 인간이 아니었다.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멀리서도 알 수 있었던 전능함은 분명…….
‘이호진은 정부에서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야.’
오히려 정부에서 협력과 자문을 구해야 하는 존재가 분명했다.
감이지만 이 사태에 대해 호진만큼 많은 것을 알고, 앞서 나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지금 어디 있나?”
국장의 물음에 주무관은 뒤쪽에 세워진 야영지를 가리키며 답했다.
“지금 드루이드님과 함께 있습니다. 상처를 치료받고 있으시죠.”
“이곳도 얼추 정리가 됐으니 가보지.”
국장은 안개의 완전한 소멸과 남은 ‘웜’들을 정리하기 위해 여태 전장에 남아있었다.
마나 고갈에 체력적인 한계까지.
지칠 대로 지쳤지만 그래도 호진을 보는 것을 미룰 수는 없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주무관의 안내에 따라 걷기 시작한 국장은 오래지 않아, 강화도 일행들이 지키고 있는 막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찍이 국장의 접근을 파악하고 있던 예은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덕분에 안녕하다네.”
국장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고생들 많았군. 강화도 대표단의 용기와 활약은 잊지 못할 걸세.”
“흠흠, 내가 좀 대단하기는 했지.”
용재가 콧대를 세우며 답했다.
그러자 도훈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우리는 정부 쪽 헌터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단한 건 단장이지.”
“아니, 아저씨! 나는 좀 달랐다니까요? 전 그 괴물 위에도 올라가 봤어요.”
“부산 대표도 올라갔었다.”
“그건 노카운트죠.”
“왜지?”
“그 사람은 정신이 조금 이상한 사람이잖아요. 보니까 아무 계획도 없이 돌격하드만.”
“네 계획은 뭐였지?”
“저요? 전 가서 괴물을 두들겨 패는 게 계획이었죠.”
“……그래, 잘했다.”
도훈이 한숨을 쉬며 답했고 국장은 이 설전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런 국장에게 예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머리가 나쁘다는 이유로 랭크가 떨어질 수 있나요? 보시다시피 쟤가 조금…… 모자랍니다.”
“음, 그런 경우는 없었지.”
“그건 다행이네요.”
국장은 진심으로 고민했다.
지금의 랭크 측정 방식에는 허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어쨌든 대표님 보러 오신 거죠?”
“맞네. 안에 있나?”
“있긴 한데, 드루이드님이 치료 전까지 들어오지 말라고 하셔서요.”
“이런, 그럼 잠시 뒤에 오겠네.”
국장이 돌아서려던 그때 막사 입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붙들어 세웠다.
“치료 끝났습니다. 들어가시죠.”
막사에서 지친 듯 걸어 나온 것은 드루이드였다.
그런 그를 향해 국장이 설핏 웃음 지었다.
“살아서 보니 좋군.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나?”
“마나 고갈입니다. 그래도 치료는 계속해야죠. 국장님도 끝나고 옆 막사로 오십시오. 상처 봐드리겠습니다.”
“나는 됐네. 다른 중상자들 위주로 치료해주게나.”
드루이드는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상자가 모인 옆 막사로 향하던 드루이드에게 국장이 다급하게 물었다.
“대표는 괜찮나?”
“……본인은 괜찮답니다. 침 바르면 낫는다더군요.”
“그래서 실제로는?”
“물론 살아있는 게 기적일 정도의 치명상이었죠. 지금은 목숨은 건졌습니다.”
“터프하군.”
“제가 보기엔 무모한 겁니다. 그러다 골병들면 누가 대한민국을 지킨답니까.”
“…….”
국장은 끝내 자신이 지키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호진이 할 수 있는 것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차이는 분명했으니까.
국장은 드루이드와 인사를 하고 막사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호진의 말이 떨어짐에 국장은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엔 붕대를 몸에 감은 호진이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국장님.”
“쉬는데 미안하네.”
“아닙니다. 그보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막사 안으로 들어선 국장은 잠시 호진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곧장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고맙네.”
“…….”
“자네에겐 어떤 말로도 이 은혜를 갚을 수 없겠지.”
고개를 든 국장은 호진의 눈을 응시하며 이어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자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들어주겠네.”
국장의 말을 들은 호진은 턱을 가볍게 쓸었다.
‘원하는 거라.’
딱히 생각해뒀던 것은 없었다.
잠시 고민을 마친 호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지금 생각나는 게 별로 없네요. 나중에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전혀 상관없네. 편할 대로 하시게나.”
“좋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진은 웃으며 국장과 악수를 나눴다.
이후 잠시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국장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 몸조리 잘하게.”
“국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국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막사의 문을 열었다.
막사 밖에는 전투를 마무리하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헌터들이 있었다.
‘화력부대’부터 경호 차장이 이끄는 ‘흑색창 부대’까지.
그들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던 국장은 문뜩 생각에 잠겼다.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이번 전투로 헌터들의 수준이 크게 올라갔다.
수많은 ‘웜’들의 처치를 비롯해 ‘측정 불가급’이라는 괴물의 처치를 간접적으로 도우며 레벨과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한 까닭이었다.
‘그런 괴물을 직접 처치한 강화 대표는 대체 얼마나 강해진 거지?’
국장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곤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어차피 강화 대표는 자신이 예단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측정 불가급이니까.’
***
‘후우.’
국장이 나가자 막사는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방음 효과가 있는 막사라더니 정말이지 밖과 단절된 듯 적막했다.
‘아주 좋군.’
호진은 남들에게는 쉽게 보이지 않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보상 확인 시간이었으니까.
호진은 우선 가득 쌓인 알림창을 확인했다.
─띠링
「라멜의 사도, 샴을 처리했습니다.」
「1─3. 라멜의 사도 ‘심연을 유영하는 자 샴’의 서울 침공 저지하기.」(완료)
「2─1. 대사막 ‘시칸’ 횡단하기.」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
.
「레벨이 올랐습니다.」
「불가능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이 가산됩니다.」
「보상이 인벤토리에 수납되었습니다.」
「플레이어의 격이 크게 상승합니다.」
「고대신의 파편을 얻었습니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절(切)베기 LV.4 → 절(切)베기 LV.6」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강신무(降神巫)LV.1 → 강신무(降神巫) LV.2」
‘많다.’
전투 중에 레벨이 오른 스킬도 더 있는 걸 감안하면 역대급으로 긴 알림창이었다.
우선 퀘스트는 예상했던 대로 완료됐다.
특별한 보상은 없고, 이전과 같이 다음 행선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용이 막연하지도, 딱히 어려워 보이지도 않다는 것.
다음으로 레벨은 무려 여덟 개나 상승했다.
‘이제 레벨이 55로군.’
호진은 평소처럼 여분을 제외한 포인트를 분배했다.
‘보상은 늘 그렇듯 인벤토리로 들어갔나?’
인벤토리를 열어 손을 넣은 뒤 보상을 끄집어냈다.
「모래시계」
「종류: 아티팩트」
「정보: 라멜의 권능을 강화하는 성유물이다. 모래시계를 뒤집으면 180초간 검은 안개를 다룰 수 있게 된다.」
‘성유물?’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부담스럽다고 해야 할지.
검은 안개라면 아마도 그 순간 이동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보였다.
검을 쓰는 호진에게 이동기가 생긴 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장점이다.
걸리는 건 라멜의 성유물이라는 점.
‘안 그래도 아난타의 대적이 된 것도 서러운데. 다른 신에게 또 미움받는 건 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호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라멜‘이라는 신이 자신을 적대하지 않았다.
사도 후보도 아닌 자신의 사도를 죽였는데, 무반응이라니.
이건 이것대로 찝찝했다.
‘고민해도 어쩔 수 없지. 일단 쓰다가, 나중에 혹시 돌려달라고 하면 돌려주면 되겠지.’
호진은 시선을 돌려 인벤토리에서 함께 꺼내든 물건을 내려다봤다.
「고대신의 파편」
「종류: 재료」
「정보: 고대신의 파편이다.」
정말 단출한 설명.
오랜만에 보는 대충 적힌 설명에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문제는 이렇게 설명을 대충 한 것이 늘 실제로는 중요한 물건이었다는 점이었다.
‘이건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기는 하지만.’
고대신의 파편이라니.
찝찝해서 손에 들고 있기조차 싫었다.
말라비틀어진 막대기처럼 생긴 외관이 이제는 무슨 손가락처럼 보였다.
‘이것도 일단 모아둔다.’
어딘가는 써먹을 터.
호진은 한숨을 내쉬며 상태창을 열람했다.
「상태창」
「이호진」
「나이: 24」
「레벨:55」
「근력:70 민첩:73 지구력:40」
「스킬: 감시자의 눈 LV.2 절(切)베기 LV.6 파(波)베기 LV.1 투구 가르기 LV.9 체력 회복 LV.10 확신 LV.2 검술의 묘리 LV.1 검의 정수 LV.2 정신 내성 LV.10 초감각 LV.6 출혈내성 LV.10 화염내성 LV.6 중독내성 LV.6 냉기내성 LV.5 중급 기(氣) 검술 LV.2 투검 LV.5 기승전투 LV.4 파마의 검식 목엽참(木葉斬) LV.4 이화접목(移花接木) LV.2 차원이동문 LV.1 강신무(降神巫) LV.2」」
「직업: 검의 교단 광신도(Fanatic)」
「가호: 감시하는 자 울타의 가호, 여신 릴리의 가호」
「칭호: 패왕(覇王)의 길을 걷는 자」
「잔여 포인트: 6」
이번에 레벨이 오른 스킬은 감시자의 눈, 절(切)베기, 검의 정수, 정신내성, 투검, 강신무였다.
잘 오르지 않던 ‘감시자의 눈’은 돌연 갑자기 레벨이 올라 버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막연히 보지 못하던 것을 볼 수 있게 된 덕분이 아닐까 싶었다.
정신 내성은 샴이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했기 때문일 거고.
절 베기는 ‘세 번째 머리’를 마무리 지은 기술인 만큼 오르는 것이 당연했다.
강신무는 이번에 배웠지만, 처음부터 이상하게 응용했기 때문인지 레벨이 올랐다.
‘뭔가 많이 올랐네.’
한층 더 성장한 느낌에 충만한 느낌이 들었다.
어찌 됐든 또 이렇게 살아남았다.
상태창을 확인하고 흥분이 가라앉자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호진은 묵직한 눈꺼풀에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러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마지막으로 잠든 지 정확히 12일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