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심연을 유영하는 자 (7)
‘세 번째 머리’가 쏟아낸 붉은 피가 바닥을 흠뻑 적셨다.
그 위로 호진은 털썩 주저앉았다.
‘살았나?’
옆구리의 통증은 여전하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징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 같았다.
호진은 시선을 돌려 바닥에 널브러진 ‘세 번째 머리’의 시체를 바라봤다.
“……이겼다.”
몸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녀석도 라멜의 사도 ‘샴’의 일부다.
상대할 수 없다고 느꼈던.
절대적이라 느껴졌던 존재를 쓰러트린 것이다.
‘한 끗 차이였지.’
‘세 번째 머리’는 지금까지 만나본 적중 가장 강한 적이었다.
그러나 강함과는 별개로 놈은 전투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
녀석은 마지막 순간 방심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실수는 바로 패배로 이어졌다.
검사들의 싸움이란 대체로 이런 법이었다. 저울이 한쪽으로 기우는 순간, 벼락같이 끝난다.
‘놈은 창을 썼으니 검사는 아닌가?’
호진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떨리는 손을 들어 내려다봤다.
문양에 새겨진 빛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트랜스 상태가 끝나가는 것이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호진은 힘겹게 손을 뻗어 녀석의 눈에 꽂힌 대거를 뽑아들었다.
초록색의 수정체가 딸려 나왔다.
호진의 그것을 응시하며 기도를 올렸다.
‘심연을 유영하는 자 ‘샴’, 녀석의 일부를 ‘감시하는 자 울타’ 당신에게 바칩니다.’
다음 수정체가 푸른 불꽃에 휩싸여 불타오르는가 싶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푸드덕
그와 동시에 익숙한 날갯짓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갈색의 로브를 눌러 쓴 여성이 있었다.
“고생했다. 아이야.”
입이 달싹이며 신비로운 음색이 여성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울타의 모습에 잠시 멍해진 호진을 뒤로하고 울타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호진의 힘이 다함에 따라 슬금슬금 다가오던 안개들이 멀찍이 밀려났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샴’도 이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호진과 ‘세 번째 머리’의 혈투를 묵묵히 지켜보던 두 존재.
‘샴’과 울타의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움직임이 멈춘다.
소리가 멈춘다.
시간이 멈춘다.
그 둘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정지했다.
오직 그들만을 위한 세상.
그들 주변만이 시간이 흘렀다.
짐승들이, 헌터가, 나무가, 돌이 그리고 해조차 숨죽여 그들을 바라본다.
문득 멈추어선 울타는 입을 열어 ‘말’을 시작했다.
─파괴되어라[Καταστροφή]
그녀가 입을 작게 들썩이는 순간, 거대한 샴의 머리의 일부가 터져나갔다.
하늘에서 녀석의 피륙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땅을 적셨다.
그럼에도 호진과 울타에게는 피 한 방울이 튀지 않았다.
뭔가에 가로막힌 것도 아니다.
그저 쏟아지는 피에 눈이라도 달린 듯 그들을 피해 떨어질 뿐.
───────!
‘샴’은 몸부림치면서도 온몸에서 연기를 뿜어내더니 그곳으로 피하려 했다.
울타는 그런 녀석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입을 달싹였다.
─떠올라라[καταλήξει]
반쯤 연기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던 녀석은 끌려 나와 하늘로 떠올랐다.
여태 연기 속에 반쯤 잠겨있던 ‘샴’의 거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빌딩보다 거대한 녀석의 모습을 보면 막연한 공포와 경이로운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녀석을 끌어올리는 저 힘은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보이지 않는 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트는 ‘샴’은 땅으로 끌려 나온 고래 같아 보였다.
─떨어져라[φύγε]
울타의 주문이 맺어짐과 동시에, ‘샴’은 무서운 기세로 패대기쳐졌다.
대지가 흔들리고 온갖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지만, 호진은 조금의 흔들림도 느낄 수 없었다.
울타와 호진의 주위는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성난 파도 속에서도 고요할 뿐이었다.
─끼이이이이이이익
부들거리며 고개를 치켜드는 샴.
그 음성은 고통과 분노로 일렁이고 있었다.
반격을 하려는 것인지, 샴의 ‘두 번째 머리’가 예의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 ■■■
소름 끼치는 언어와 음색,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주술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울타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말을 건넸다.
“……지금 나에게 ‘말’을 쓰는 것이냐? 그리도 조잡한 것을?”
울타는 조용하게 분노했다.
깊게 눌러쓴 로브로 인해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그 기색을 읽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냥 죽는 게 나았을 게다. 후회하게 해 주마, 라멜의 아이야.”
─닫아라[κλείσε]
─■■……
울타가 말을 내뱉자 거의 마무리 단계였던 ‘두 번째 머리’의 입이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기껏 준비 중이었던 ‘말’이 무산되며 검은색의 글자들이 어지럽게 일렁이며 흩어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얼어라[πάγωμα]
순식간에 ‘두 번째 머리’의 주둥이 주변에 하얀 연기가 끼는가 싶더니, 돌연 단단하고 커다란 빙산이 그 입을 얼려버렸다.
울타는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차가운 음색으로 ‘말’들을 쏟아냈다.
─병들어라 불타라 파괴되라[ασθένεια] [έγκαυμα] [Καταστροφή]
판도라의 상자에서 쏟아져 나온 것들이 이러했을까.
울타의 ‘말’이 떨어지자 ‘샴’은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피부에는 병에 걸린 듯 기포가 끓어오르고 피고름이 흘러내렸다.
몸을 불타고 얼어붙었으며, 군데군데 폭발하듯 살점들이 터져나갔다.
잠깐 사이 녀석의 모습은 도저히 살아있다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너덜너덜해졌다.
─끼이이이이익…….
신음을 흘리는 샴의 몸에서는 피가 쏟아지고, 그을린 곳에서는 연기와 고약한 냄새가 났다.
놈은 지친 듯 바닥에 몸을 눕히고 숨만 옅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울타는 호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끝난 듯하구나.”
“…….”
호진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도저히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샴’을 어린애 다루듯 가지고 놀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두 다리를 굳게 만들었던 괴물.
라멜의 사도나 되는 녀석을 가볍게 제압하다니…….
‘이것이 신.’
심지어 본연의 힘이 아닌 강신이라는 형태의, 일종의 허상에 불과한 몸이다.
호진은 울타가 샴을 제압하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사도와 신의 격차를 말이다.
그는 처음으로 ‘신’이라는 이름이 지니는 무게에 압도됐다.
“……마무리를 해 주시죠.”
녀석은 아직 살아있었다.
퀘스트는 샴의 서울 침공을 저지하라는 것이었으니 이미 달성했다고 봐도 무방했지만, 호진은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놈이 살아 숨 쉬는 이상, 이곳의 인간들은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기에.
호진의 부탁에 울타는 로브 밖으로 흘러나온 은발을 살짝 꼬며 답했다.
“미안하구나, 아이야.”
잠시 뜸을 들인 그녀는 민망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조금 흥분한 나머지 힘을 조절하지 못했구나. 네가 바친 것으로는 이게 전부란다.”
호진은 그제야 울타의 떨리는 다리가 보였다.
말 그대로 힘이 다한 것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그만 쉬십시오.”
“……건방진 아이로구나.”
호진의 감사의 말에 투덜거린 울타의 몸이 투명하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호진의 몸에 새겨진 문자들도 빛이 꺼져갔다.
“시간이 됐다. 다음에 또 보자꾸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인사를 남김과 동시에 울타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이카루스만이 지친 듯 쓰러져있었다.
“너도 고생했다.”
“후우우. 후우우.”
호진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하는 이카루스를 조심히 들어 올렸다.
때마침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장, 괜찮나?”
“호진이 형!”
도훈과 용재 그리고 예은까지.
다들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호진을 향해 다가왔다.
“멀쩡합니다.”
호진은 엷게 웃으며 이카루스를 용재에게 건넸다.
그런 호진을 바라보던 도훈은 고개를 저었다.
“피를 못해도 3000cc는 흘렸을 거다. 일반인이었으면 그 절반만 흘렸어도 죽었겠지.”
호진은 축축하게 젖은 옷들을 내려다보더니 멋쩍게 웃었다.
“아직 안 죽지 않았습니까. 그보단 도훈 씨는 저 좀 태워주십시오.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다행히 ‘두 번째 머리’는 완전히 죽은 듯 보였지만, ‘샴’은 언제 회복해서 도망칠지 몰랐다.
그런 호진을 질린 듯 바라보는 일행들.
“형, 헛소리하지 말고 쉬고 있어. 우리가 마무리 지을게.”
용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내가 마무리해야 해.”
호진은 자신의 손으로 이 싸움을 꼭 마무리 짓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들 중 멀쩡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호진만큼은 아니어도 이미 모두 크고 작게 다친 것이다.
“길을 열어줘. 부탁할게.”
호진은 ‘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웜’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건 또 언제 저렇게…….”
예은이 인상을 찡그렸다.
‘웜’들을 본 일행들은 더 이상 호진을 말리지 않았다.
“젠장, 길은 우리가 뚫어줄게. 도훈 아저씨, 형 좀 부탁해요.”
“내가 아니다. 청랑이 잘 태워다 줄 거다.”
도훈의 말에 청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호진을 등에 태웠다.
먼저 달려 나간 것은 용재였다.
회색늑대에 올라탄 용재는 황금색 빛을 뿌리며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자 ‘웜’들이 잡초처럼 베여 쓰러졌다.
예은 역시 그 뒤를 쫓아 달리며 연신 활시위를 당겼다.
용재처럼 죽이지는 못해도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견제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렇게 열린 길을 청랑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에 ‘웜’들도 일행들도 한층 더 격렬하게 맞붙었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날아드는 화염구와 얼음송곳들이 일제히 ‘웜’들을 꿰뚫었다.
“가라아아아!”
“죽여버려!”
국장이 이끄는 헌터들이 어느새 돌아와 지원사격을 하며 소리 질렀다.
그들의 응원에 힘입어 호진은 몽롱해져 가던 정신을 부여잡았다.
자꾸만 불이 꺼지듯 시야가 뚝뚝 끊겼다.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호진이 볼 안쪽을 짓씹자 따끔한 통증과 비릿한 혈향이 입안에 가득 퍼져나갔다.
그런 호진의 어깨를 누군가 흔들었다.
“다 와 간다. 준비해라, 단장.”
호진은 자신의 어깨에 얹어진 도훈의 손을 바라봤다.
희뿌연 시야 넘어 거대한 ‘샴’의 거체가 벽처럼 솟아있었다.
“위로 올라가 주십시오. 놈의 머리까지.”
“알았다.”
─타닥 탓
청랑은 속도에 박차를 가하는가 싶더니 샴의 몸에 발톱을 박아 넣어가며 몸을 타고 올랐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호진은 뛰어내려 ‘샴’의 위에 다리를 딛고 섰다.
─움찔
‘샴’의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호흡이, 맥박이 모두 두 다리를 타고 전해져온다.
“후우.”
호진은 몸 안에 남은 기를 한껏 끌어모았다.
앞선 싸움들로 인해 메말라 붙은 ‘기’는 끌어모아봤자 한 줌에 불과했다.
하지만 왠지 이걸로 충분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진이 허리에 찬 아메노하바키리를 움켜쥐었다.
─끼이이이이이익
신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눈이 뒤룩거리며 호진을 응시한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혐오와 불신이 깃든 시선이다.
‘인간한테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걸까.’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죽음은 부조리한 거다. 네가 알려준 사실이지.”
호진은 낮게 읊조리며 검을 녀석의 몸 안에 찔러 넣었다.
그 순간 손끝에 알 수 없는 감각이 잡혔다.
언젠가 느껴졌던 기묘한 감각.
마치 잘 포장된 길을 따라 움직이는 느낌으로 호진은 검에 기를 흘려 넣었다.
그리고…….
─우득
검을 비틀자 뭔가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샴의 몸이 움찔 떨려왔다.
호진은 녀석의 척추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샴’의 거대한 동공에서 점점 생기가 흩어졌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근데 네 죽음은 부조리하지조차 않아. 결국 죽이면 죽는 거야.”
세상이 그렇지 않다면 내가 그렇게 할 것이다.
호진은 그렇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