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심연을 유영하는 자 (6)
“저에게 강신을 하셔야지, 거기 계시면 어떡합니까?”
호진은 울타에게 당황한 음색으로 물었다.
그러자 이카루스의 몸을 빌린 울타가 후후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야, 너무 뭐라 하지 말거라. 네게도 잘못이 있으니.”
“저에게 말입니까?”
호진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난 착실하게 부름에 응했단다. 다만 네가 이 몸의 신격만 쏙 빼간 게 아니냐.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이카루스의 몸으로 피난 온 것이니라.”
툴툴대는 듯한 울타의 말을 듣던 호진은 침음성을 흘렸다.
“……제가 지닌 신격 때문이군요.”
“정확하구나. 아무리 나라도 다른 신에게 빙의를 할 수는 없는 일이란다.”
아무리 격이 낮더라도 신은 신.
애당초 호진에게로 강신은 불가능했다는 말이다.
울타는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민망하다는 듯 부리를 뗐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 내 신격이 한 줌밖에 남지 않았단다.”
“도와주시기는 힘드시겠군요.”
“그건 그렇지만…… 내 잘못이 아니지 않느냐.”
울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이에 호진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대화할수록 사람 같군.’
정확히 말하자면 감정을 감추는 데 능하지 않았다.
별로 신답지는 않다고 할까.
“탓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정황을 파악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호진은 검을 다잡으며 정면에 서 있는 ‘세 번째 머리’를 바라봤다.
새로운 신격이 등장한 탓인지, 녀석은 잔뜩 경계하는 태세로 이쪽을 살피기만 했다.
‘이쪽의 부엉이가 전력 외라는 것을 최대한 늦게 알아차려 주면 좋겠지만…….’
떠드는 사이 인내심이 바닥난 모양이었다.
‘세 번째 머리’는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뭐 조언해주실 거라도 없으십니까?”
호진의 물음에 울타는 푸드덕거리며 답했다.
“저건…… 세쌍둥이 중 막내로구나. 덩치는 작지만 근접전에 능한, 위험한 녀석이지. 할 수만 있다면 발을 묶은 뒤 원거리에서 화력으로 찍어 누르는 게 좋단다. 그런데…….”
“그건 어렵겠군요.”
대인 근접전에 특화된 것은 호진도 마찬가지였다.
즉 상대의 약점을 공략해서 이기는 것은 힘들다는 의미다.
가위바위보를 하려는데 둘 다 바위밖에 내지 못하는 상황이랄까.
“어쩔 수 없군요.”
그래도 지금은 울타의 신격을 빼앗아 온 만큼 몸에 힘이 넘쳤다.
‘세 번째 머리’, 그러니까 막내를 베는 것은 가능할 터다.
‘문제는 남은 ‘두 번째 머리’와 샴 녀석인데…….’
호진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울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이야, 눈이다. 저 녀석의 눈을 도려내어 나에게 바치거라. 그러면 어느 정도 신력을 회복할 수 있을 테고, 네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게다.”
“눈 말입니까?”
호진이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자, 울타가 훌쩍 날아오르며 답했다.
“나는 ‘감시하는 자’. 눈은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단다. 완전체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다른 신의 사도의 눈쯤 되면 꽤 각별하지.”
길이 보였다.
호진이 할 일은 간단했다.
그저 눈앞의 적을 쓰러트리는 것.
“쉽군요.”
늘 해오던 것이다.
호진은 작게 중얼거리며 ‘세 번째 머리’를 향해 걸어갔다.
장기전으로 가서 좋을 건 없었다.
놈은 든든한 형제들이 있지만, 호진에겐 말하는 부엉이가 전부였으니까.
“……지금 혹시 내 욕을 했느냐?”
물러난 울타가 귀가 간지럽다는 듯 고개를 탁탁 털며 물어왔다.
귀신같은 촉이다.
‘누가 신 아니랄까 봐.’
쓸데없는 부분에서 신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녀석.
호진은 그런 울타를 뒤로하고 걸음을 박찼다.
이에 경계하던 녀석도 호진을 향해 마주 달리기 시작했다.
2차전 시작이었다.
***
둘의 속도는 비슷했다.
먼저 공격을 한 쪽은 괴물이었다.
괴물은 호진의 심장을 노리며 왼쪽 상단으로 창을 내질렀다.
─까강
녀석의 창끝과 호진의 검이 맞부딪치자 붉은 불꽃이 튀어 올랐다.
비슷한 실력이라면 선공을 점하는 것은 무기가 긴 쪽이다.
실제로 호진이 공격하려면 녀석의 공격거리 안쪽으로 몇 걸음이나 파고들어야 했다.
문제는 ‘세 번째 머리’가 그 시도를 능숙하게 차단하고 있다는 것.
─캉!
돌려 감은 창대에 가로막힌 호진은 이를 악물며 뒤로 물러났다.
‘젠장.’
괴물은 자신에게 유리한 거리를 쉽게 내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잠시 고민하던 호진은 녀석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자 녀석의 창이 매섭게 뻗어왔다.
호진의 검과 ‘세 번째 머리’의 창이 어지럽게 얽히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서로 비슷한 상황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압도적으로 호진에게 불리했다.
호진은 무기를 한 번씩 맞부딪칠 때마다 사선을 넘나드는 반면.
정작 호진의 검은 녀석에게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즉, 일반적인 수비에 가까운 공방이었다.
그렇게 한순간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던 교전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호진의 황금색 검이 무기끼리의 충돌을 견디지 못하고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호진 또한 지친 듯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괴물은 창을 막아내는 호진의 검이 느슨해졌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챘다.
끝이었다.
‘세 번째 머리’가 기다렸다는 듯 기를 끌어모은 창을 내질렀다.
그 순간.
“기다렸다고.”
호진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화접목(移花接木).
호진의 검이 찔러오는 창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검으로 창대를 가볍게 눌렀다.
그러자 괴물의 창이 크게 궤도를 잃으며 튕겨 나갔다.
처음으로 녀석의 수비에 공백이 생겨난 것이다.
‘세 번째 머리’의 눈동자에 당황과 놀람의 감정이 번졌다.
호진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녀석의 허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직
쇠가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세 번째 머리’가 크게 뛰어 뒤로 물러났다.
‘……실패인가.’
연속된 공방으로 달아올랐던 황금색 검은 녀석의 갑옷을 뚫지 못했다.
‘확실히 강성이나 연성이 좋은 검은 아닌가.’
화려하지만 무구로서는 좋다고 보기 어려웠다.
‘세 번째 머리’가 두른 갑주가 생각보다 더 단단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호진은 형태가 일그러진 황금 검을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이화접목을 또 쓰는 건 무리겠지.’
이화접목은 기술의 특성상 적이 큰 공격을 해야 통한다.
녀석도 호진이 큰 공격을 유도했다는 점을 눈치챘을 터.
이번에 호진은 인벤토리에서 아밍 소드와 대거를 꺼내 들었다.
정석대로라면 아밍 소드에는 방패를 들어야 하겠지만, 호진은 직업 특성상 방패의 사용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인벤토리에 사용 가능한 무기는 이것들을 제외하면 투핸디드 소드 뿐이었다.
릴리온의 대검과 검도장의 진검은 모두 금이 가서 사용이 어려운 상태였으니까.
어쩌다 보니 이도류가 되기는 했지만 이론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사거리는 양손 검보다 짧아졌지만, 연격이 가능하다.
한 손으로 창을 쳐내고, 다른 한 손으로 공격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문제라면…….
‘이도류는 취미로 배운 게 전부란 말이지.’
아직 검도장에서 쫓겨나기 전인 중학생 시절.
일본의 유명한 검호, 미야무토 무사시를 다룬 만화책을 보고 반해서 수련했던 게 전부였다.
그 뒤로도 가끔 생각날 때마다 휘둘러보기는 했지만.
‘겉핥기였지.’
그래서 이도류는 심도 있게 배워본 적이 없었다.
시험해보기에는 끔찍하게 안 좋은 상황이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호진은 힐끔 허리에 찬 검을 내려다봤다.
‘아메노하바키리’를 꺼내 드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호진이 지닌 최고의 스킬 중 하나인 ‘절 베기’가 봉인된다.
‘이도류로 틈을 만든다.’
그러고 나서 ‘절 베기’로 마무리.
계획은 간단했다.
“후우.”
한 차례 들뜬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머릿속 잡념을 비워낸다.
호진은 양 손목을 동시에 돌려 검들을 가볍게 휘두른 뒤, 자세를 잡았다.
왼손의 대거는 앞으로 뻗어 창끝을 견제하며 오른손에 든 검은 머리 뒤로 치켜들었다.
“와라.”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던 녀석이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세 번째 머리’는 호진의 유효 사거리 밖에서 창을 찔러왔다.
역시 ‘이화접목’을 의식한 듯, 동작이 작고 빠른 공격이었다.
‘빠르지만 보인다.’
호진은 앞으로 내밀고 있던 대거를 휘둘러 창날을 아슬아슬하게 쳐냈다.
노리는 것은 창대를 쥔 녀석의 손목.
호진은 오른손에 쥔 아밍 소드를 벼락처럼 휘둘렀다.
─캉!
그러나 내려친 것은 ‘세 번째 머리’가 파지한 창대 부분이었다.
녀석이 창을 당기는 동시에 손의 위치를 바꾸며 방어한 것.
호진은 공격이 가로막힌 것에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 나갔다.
이번에는 조금 더 파고들어 수비용으로 쓰였던 단검을 내찔렀다.
─키링 캉 카가강!
호진이 양손을 교차하며 폭풍 같은 기세로 공격을 퍼붓자, 녀석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의 이도류는 걱정했던 것만큼 허접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먹힌다. 이대로면…….
─퍽
‘……어?’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흔들렸다.
욱신거리는 통증 덕에 그제야 턱이 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차기?’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당겨지는 녀석의 발이 보였다.
발이라니.
녀석의 창에만 신경 쓰느라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다.
창을 쓰는 이들은 의외로 근접 박투술에 능하다는 이야기를.
분명 방금처럼 거리가 많이 좁혀진 적을 상대하기 위함일 터다.
‘공격에 집중하느라 전혀 보지 못했어.’
급하게 꺼내든 검술의 한계였다.
이도류에 익숙하지 않은 만큼 집중이 분산됐다.
만약 양손검을 들고 있었으면 이렇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호진은 혀를 차며 ‘세 번째 머리’의 추가타를 힘겹게 막아냈다.
─카가강!
녀석은 아밍 소드를 창으로 감아서 낚아챘다.
검을 놓친 것이다.
‘세 번째 머리’는 무방비하게 열린 호진의 몸을 노리고 마무리 일격을 날렸다.
위기의 순간.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늘 그렇듯 위기는 최고의 기회였으니까.
호진은 중심이 흐트러진 자세 그대로 왼손에 든 단검을 던졌다.
단검은 투검 스킬의 보정을 받아 정확히 원하는 위치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단검은 창보다도 먼저 녀석의 면갑 사이 눈을 꿰뚫었다.
[────!]
여섯 개의 눈구멍 중 하나가 꿰뚫린 ‘세 번째 머리’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창을 찔렀다.
창은 호진의 옆구리를 찢고 지나쳤다.
“흡!”
호진은 불에 지져지는 듯한 고통에 허리가 굽혀지는 것을 간신히 버텨냈다.
‘만약 내장이 많이 손상됐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체력회복 스킬과 출혈 내성 스킬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호진은 그저 전투에 집중했다.
‘세 번째 머리’는 고통 때문인지 잔뜩 격분한 태도로 창을 크게 휘둘렀다.
분명 단검이나 한손검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강력한 일격이었다.
이에 호진은 옅게 웃음 지었다.
그러곤 허리에 찬 검을 발검했다.
이 순간을 위해 아껴온 기술이 섬광처럼 빛을 뿌렸다.
─서걱
소리와 함께 잘린 괴물의 팔이 허공을 날았다.
팔은 창을 여전히 쥔 채였다.
‘세 번째 머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녀석을 향해 호진은 낮게 중얼거리며 말했다.
“전투 중엔 흥분하지 말 것. 기본이다.”
호진은 멈춰 선 녀석의 머리 위로 검을 내리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