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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09화 (109/241)

109화. 심연을 유영하는 자 (5)

세종 대표의 숨이 멎었다.

가까이 선 호진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

엷은 웃음을 띤 세종 대표.

그를 지긋이 바라보던 호진이 몸을 돌렸다.

또 하나.

녀석을 이곳에서 막아야만 하는 이유가 생겨난 기분이다.

솔직히 말해 썩 기분이 좋지 않다.

부담과 책임감이 차곡차곡 가슴에 얹혀 소화가 안 되는 기분이라고 할까.

“혼내주려 했는데, 그러지도 못하겠네.”

씁쓸하게 웃은 호진은 세종 대표의 옆에 놓인 ‘아메노하바키리’라는 검과 검집을 주워서 허리에 찼다.

얼핏 봐도 호진이 얻었던 검들보다 좋아 보이는 검이었다.

부담스러운 느낌이지만, 지금은 이런 것에라도 기대야 했다.

약간 들뜬 숨이 입술을 비집고 빠져나갔다.

호진의 눈이 빠르게 전황을 살폈다.

‘우선은 저건가.’

때마침 샴의 두 번째 머리가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아니, 주문보다는 더 근원적인 것.

한 번도 보지 못한 불길한 언어.

─■■■■ ■■■■■

음성이 울려 퍼진 그 순간.

측정 불가급의 주위에 있던 나무, 돌 그리고 헌터들의 시체들까지.

차례차례 모두 모래로 변해 스러져갔다.

분명 일반적으로는 막을 수 없는, 광범위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

하지만 호진은 ‘감시자의 눈’ 덕분에 불길한 글자가 허공에 퍼져나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보이기만 한다면 그가 못 벨 것은 없다.

무엇보다 손에 들어온 세종 대표의 검 ‘아메노하바키리’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파(波)베기’.

호진은 아낌없이 자신의 절기를 펼쳤다.

허리에 패용한 검이 벼락같은 속도로 뽑혀 나와 대기를 양분했다.

─서걱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파(波)베기는 점차 넓어져 가는 글자와 맞부딪쳤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베어냈다.

물에 번진 글자처럼 연기로 화해 흩어지는 글자들.

─끼이이이이이익?

‘두 번째 머리’가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얇은 얼음벽 뒤에 숨어 낭패스러운 표정을 짓던 국장 역시 눈만 끔뻑였다.

‘힘이 다했나?’

무너진 전열과 힘 빠진 국장이라니.

그나마 경호 차장이 화력 부대가 도망갈 수 있게 몬스터 군단의 발목을 잡아주고 있었지만, 저곳도 명백히 한계였다.

‘정말 아슬아슬했네.’

호진이 국장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제야 호진을 발견한 국장은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국장을 주변의 헌터들이 미친놈 바라보듯 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런가. 시간은 충분히 벌었나 보군. 이젠 전부 그에게 달렸어.”

그때 경호 차장이 뒤를 힐끔거리며 소리쳤다.

“갑자기 미치시기라도 한 겁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그러고 보니 자네는 그를 못 믿겠다고 했지?”

국장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호 차장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은 채 눈앞의 ‘웜’들을 찔러 죽였다.

“혹시 그 측정 불가급이라던 그 사람을 말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가 방금 도착했거든.”

경호 차장이 시선을 돌려 바라보자 검을 뽑아 든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도망치지 않고 온 것은 훌륭하지만…….’

그렇다고 어쩌란 말인가.

눈앞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몬스터 군단.

알 수 없는 주술을 부리는 ‘두 번째 머리’에 이어서.

강함을 측정할 수조차 없는 기사를 닮은 괴수, ‘세 번째 머리’까지.

무엇보다 그들을 이끄는 측정 불가급 괴물은 모든 상처를 회복한 지 오래다.

국내의 모든 헌터들이 동원됐다시피 한 전투의 결과가 이거다.

이 전황을 뒤집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장은 좌절한 탓에 현실적인 판단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장님. 알겠으니까, 이만 국장님도 방어벽까지 도망…….”

경호 차장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도망…….”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경호 차장이 넋을 놓고 눈앞의 광경을 바라봤다.

국장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에게도 있다는 말일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측정 불가급’ 전력이 말이지.”

마치 경련이라도 일어난 듯 부들거리며 바닥에 누운 ‘웜’과 수많은 몬스터들.

그 뒤로 수백에 달하는 괴물들이 바닥에 쓰러져 몸을 겨누지 못하고 있었다.

***

‘역시 쓸 만하네.’

「스킬 ‘위엄’이 발동됩니다. 주변 500m 안의 중립, 혹은 적들이 상태 이상에 빠집니다. 본인이 지닌 격에 따라 저항할 수 있습니다.」

한쪽에 뜬 알림창을 치운 호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헌터들은 아군으로 인식된 탓인지 영향을 받지 않았다.

혹시나 했지만 ‘패왕(覇王)의 길을 걷는 자’는 발동하지 않았다.

‘공격이 아닌 수비니까. 당연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잠시, 주변이 적막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적도 아군도 모두가 호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메노하바키리’를 허리에 납검한 호진은 덤덤한 표정으로 인벤토리에서 황금색의 검을 꺼내 들었다.

아직 준비한 것은 보여주지도 않았다.

호진은 뽑아 든 검을 어깨에 슬며시 걸쳤다.

순간 주위에 감돌던 기류가 변했다.

“후우.”

입에서 한 차례 숨을 뱉어낸 호진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작은 진동이 조용하게 퍼져나갔다.

절이라도 올리듯 천천히 몸을 낮춘 호진.

그러다 돌연 튕기듯 허리를 들며 손을 하늘로 뻗어 올린다.

호진은 검을 여전히 어깨에 걸친 채, 휘적휘적 걷는 듯하더니 우뚝 멈춰 섰다.

다음 순간.

호진의 몸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가 걷어 올린 양팔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푸른색으로 빛났다.

“스읍.”

아까와 반대로 한 차례 숨을 삼킨 호진은 통통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비스듬히 걸친 검을 부드럽게 노를 젓듯 좌우로 휘둘렀다.

그러자.

마치 거센 바람 앞의 연기처럼 호진의 주위에 드리워진 안개들이 사방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모두가 홀린 듯 이 장면을 지켜보던 와중, 돌연 돌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직

‘와라.’

호진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반개했다.

눈에서 푸른색 기운이 옅게 일렁였다.

흔들림 없는 시선이 쇄도하는 ‘세 번째 머리’에 못 박혔다.

강신무를 끝까지 완성하기 위해서는 못해도 3분은 더 필요했다.

원래 계획은 강신무를 마치고 강신한 채 등장하는 거였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

그럴 여유도 없었고.

옅게 웃음 지은 호진은 여전히 춤을 추듯 느릿하게 검을 돌려 어깨에 얹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섬광 같은 찌르기가 호진이 있던 자리를 꿰뚫었다.

그러나 호진은 아슬아슬하게 괴물 쪽으로 몸을 기울여 공격을 피했다.

─후웅

세 번째 머리는 이번엔 창대를 돌려 창의 후미를 올려 쳤다.

그러나 이번 공격 역시 아슬아슬하게 호진을 비껴나갔다.

이에 괴물은 호진과 거리를 좁히며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공격은 하나도 빠짐없이 호진을 빗겨나가기만 했다.

마치 합을 맞춰 추는 춤처럼.

공격을 피하는 호진의 몸은 평소 검을 휘두를 때와 같이 올곧지 않았다.

취한 것처럼 휘청거리고, 춤을 추듯 몸을 꺾었다.

통통 튀어 오르거나 한 발로 균형을 잡기도 했다.

검에 힘을 실을 수 있도록 하체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검도에선 절대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강신무(降神巫).’

신을 받드는 무당의 춤이다.

강신무를 진정으로 익히고 나면 자연스럽게 트랜스 상태, 즉 신이 깃들게 된다.

─카강!

한 발로 땅을 디딘 채 휘두른 검에 ‘세 번째 머리’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 위력에는 놈도 놀랐는지, 몰아치던 움직임을 멈춘 채 호진을 노려봤다.

그리고.

‘……뭐지?’

검을 휘두른 호진 또한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왜 강신이 되지 않는 거야?’

강신무는 벌써 절반 이상 진행됐다.

몸에 새긴 문양도 충분히 빛을 뿜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호진은 몸에 신이 깃드는 것을 느끼고 있어야 했다.

그것이 ‘강신무’를 완전히 익힌 호진에게 스며든 정보였으니까.

분명 트랜스 상태는 진행 중이었다.

몸은 이상하리만치 힘이 넘치고, 육체의 피곤함이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모든 게 알고 있는 정보와 똑같은데, 신이 강림하지 않는 걸까.

‘울타’가 강신을 거부라도 한 걸까.

호진은 의문을 삼킨 채 끝까지 강신무를 이어 갔다.

점점 강해지는 빛무리는 주변의 안개를 멀리까지 밀어냈다.

빛무리가 거슬렸던 건지, 괴물은 재차 달려들었고 호진은 이를 악물고 공격을 피하며 춤을 이어갔다.

‘빨라진다. 아니, 정교해지는 건가.’

세 번째 머리는 갓 태어난 아이처럼 점점 호진의 움직임을 따라왔다.

솔직히 이미 트랜스 상태에 들어가기 전의 호진의 움직임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강신무가 완성되는 대로 놈과 승부를 봐야 했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던 어느 순간.

호진은 우뚝 멈춰 섰다.

‘세 번째 머리’는 기다려주기라도 하듯 함께 멈춰 섰다.

“후우.”

호진은 긴 날숨을 내뱉었다.

‘미치겠군.’

강신무가 끝나 버렸다.

트랜스 상태는 아직 유지 중이긴 한데…….

자신의 몸 어디에도 울타가 깃든 흔적이 없었다.

‘실패인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며 서울 시민들이 대피할 시간을 만들 수밖에.’

호진이 각오를 다지던 그때였다.

─푸드득

어디선가 날아온 이카루스가 호진의 어깨에 앉았다.

“이카루스.”

끝까지 함께 싸워주기라도 하려는 걸까.

호진은 기특한 마음에 이카루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이카루스가 호진을 빤히 쳐다보더니 별안간 부리를 열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다니 재밌구나, 아이야.”

갑자기 무슨?

호진이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벙긋거리자 이카루스가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는 표정이구나. 하지만 지금은 적에게 집중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울타 님?”

익숙한 음성에 호진이 되묻자 이카루스가 주억거리며 답했다.

“그래, 내가 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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