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심연을 유영하는 자 (2)
폭격이 멈췄다.
군의 차례가 끝난 것이다.
‘결국 군은 실패했나.’
국장은 입술을 너무 꽉 깨문 탓에 입안의 비릿한 혈향을 느껴야만 했다.
이제 기회는 헌터들에게 넘어왔다.
‘이렇게 된 이상 이를 악물고 해보는 수밖에.’
국장의 시선은 연기를 뚫고 다가오는 녀석에게 고정됐다.
거대하다.
마치 빌딩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까 느꼈던 무력감과 절망감이 어느덧 옅어졌다는 것.
“시작하게.”
국장이 입을 떼자 드루이드는 기다렸다는 듯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장소를 정하고 일주일 동안 준비한 술식.
숲 곳곳에 박아둔 토템들이 일제히 영롱한 빛을 뿜어냈다.
─쿵!
동시에 육중한 소리와 함께 녀석이 멈춰 섰다.
뭔가에 가로막힌 듯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는 녀석.
녀석의 주위에 낮게 깔린 칠흑색의 연기들도 마찬가지로 헌터들의 주위로 다가오지 못한다.
연기들과 부딪치며 헌터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라즈(Uraz), 투리사즈(Thurisaz).’
영역을 지키고 수호의 힘을 지닌 룬어들.
글자 자체에 마법의 힘이 깃든 그것들을 토템으로 형상화했다.
조각으로 양각하고 그림을 새겨 넣었다.
이 정도의 물건들은 쉬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드루이드 직업을 가진 그가 하나당 최소 여드레씩 시간을 들여 만들어낸 물건들이다.
즉, 그의 전력을 개방한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장담컨대 이 정도 술식이면 이곳의 다른 모든 S랭크가 덤벼도 며칠은 버틸 수 있을 터다.
드루이드는 내심 기대했다.
‘어쩌면 호진 님이 나오실 때까지 버텨줄지도 모른다.’
눈앞의 측정 불가급 괴물은 상식을 초월하는 괴물이지만, 자신도 인류의 정점이라 불리는 S랭크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이나 자부심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기대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쩌적
괴물이 뭔가를 한 게 아니었다.
그저 놈과 맞닿아 있는 것만으로 방어막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얼마 못 버팁니다.”
“……그래 보이는군.”
씹어 뱉듯 한 드루이드의 말에 국장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아마 국장도 드루이드와 같은 기대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우리들 차례일세.”
국장이 다른 S랭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장 먼저 답한 것은 경호 차장이었다.
“명령하시죠.”
검은색의 창을 든 그녀의 뒤로 20명 남짓한 창병들이 나열해 있었다.
검은색의 코트와 창이 유일한 공통점인 그들은 그 외의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나이도, 성별도, 그리고 국적마저도.
‘흑색창 부대.’
전원이 A급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그들은 이 절망적인 상황에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흩트림 없이 대기하는 그 모습은 마치 기계 같기도 했다.
‘굉장하군.’
국장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경호 차장이 이끄는 흑색창 부대 하나면 전국의 캠프들을 통합하고 남는다는 소문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이것이 정부가 가지고 있던 또 다른 히든카드…….’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휘어진 눈매를 지닌 남자가 빙긋 웃어 보였다.
“이건 조금 예상외인데요. 군부대가 이렇게 무력할 줄이야.”
그는 경호 차장이 노려보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걸 보여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쁘군요.”
그가 손짓하자 부하 중 하나가 다가와 상자를 내밀었다.
─달칵
열린 상자 속에 있는 것은 한 자루의 카타나였다.
“그건?”
국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카타나를 들어 올린 그가 검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답했다.
“아메노하바키리(天羽々斬).”
“……?”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가볍게 한숨을 내쉰 세종 대표가 첨언했다.
“일본의 주신 이자나기가 불의 신 카구츠치를 죽일 때 사용했다는 신살(神殺)의 무기입니다.”
그 설명을 들은 국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 게 실제로 있을 리가…….”
“있습니다.”
국장의 말을 끊은 것은 경호 차장이었다.
“일본의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의 금족지(禁足地)에서 발견되어 봉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가품일 가능성이 크고, 무엇보다 저런 형태의 검은 아니었지만요.”
경호 차장의 말을 들은 세종 대표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그 물건이 맞습니다. 물론 일본에서 받은 건 낡은 철 조각이었지만, 제가 받은 연계 퀘스트의 최종 보상으로 다시 재탄생했죠.”
“어떻게 얻은 거죠?”
경호 차장의 질문에 세종 대표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꽤나 고생했습니다. 일본에서 요구하는 게 워낙에 많아야죠. 뭐 기본적으로는 그쪽의 괴물들을 처리해주고 얻은 거라고 보면 됩니다.”
그 대답에 국장은 불편한 심기를 감춰야만 했다.
정부에서 지원 요청을 할 때 온갖 핑계를 대며 오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으니까.
‘이쪽 요청은 무시하고 일본까지 넘어가서 사냥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그래도 지금은 그런 것을 질책할 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퀘스트를 깨기 위해서였다면 아주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게 무엇이건 중요한 건 능력이네. 자신 있나?”
국장의 물음에 세종 대표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며 웃었다.
“신을 베었다는 검입니다. 저런 고래 정도는 가볍게 베지 않겠습니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국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으로 부산 대표를 바라봤다.
“자네도 뭔가 준비한 게 있나?”
국장과 눈이 마주친 부산 대표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 한 몸으로 충분합니다. 다들 이것저것 많이 준비하셨는데, 아마 쓰실 기회도 없을 겁니다.”
─깡 깡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먹을 맞부딪친, 부산 대표의 주먹이 달군 쇠처럼 붉어졌다.
어떤 무기도, 방어구도 없다.
강철 같은 몸은 그 자체로 흉기였다.
‘몬스터든 사람이든 일대일로는 아직까지 진 적이 없다고 하지.’
국장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그가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먼저 갑니다! 늦게 오시면 국물도 없을 겁니다.”
“잠깐…….”
국장이 말리기도 전에 멀어져가는 부산 대표.
이를 지켜보던 예은은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저 사람, 너랑 잘 맞겠는데?”
“내가 닮았다고? 다짜고짜 돌진하는 저 사람이랑?”
용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표정을 찡그리자,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똑같다.”
“이참에 타산지석 좀 해봐. 그 거울 치료라고 있잖아.”
“나 참, 억울하네, 진짜. 안 되겠다. 여기 못 있겠어. 나 먼저 간다!”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던 용재는 대뜸 도끼를 들쳐 메고 부산 대표를 뒤따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예은과 도훈도, 국장과 다른 S랭크들도 할 말을 잃었다.
“……고생이 많군.”
“그쪽도요.”
국장과 눈이 마주친 예은은 동질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더 망설일 수도 없겠군. 가보지.”
국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고, 그 뒤를 다양한 헌터들이 뒤따랐다.
하지만 겁이 없는 두 사람의 돌격 덕분이었을까.
괴물을 향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덜 경직되어 있었다.
나쁘지 않은 분위기.
막이 올랐다.
***
“지금.”
국장은 자동차만 한 얼음송곳을 허공에 만들어내며 외쳤다.
다음 순간 예은의 화살이 바람을 갈랐다.
그리고 그 뒤를 수많은 불덩이와 투창 그리고 화살 등이 뒤따랐다.
관리국 직속 헌터들과 지역의 대표들 혹은 그에 준하는 실력자들로 구성된 화력 부대다.
인원은 대략 100여 명.
A급들과 B+급이 뒤섞인 최상위 전력들이다.
─쾅!
방어막에 가로막히던 폭탄들과 달리 투사체들이 이번엔 놈의 몸에 직접 닿았다.
“먹히는군.”
국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나 헌터들의 공격도 아까 전의 폭격처럼 가로막히면 어떡하나 고민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러면 아낄 필요 없겠지.”
그는 힘을 쏟아부어 아까보다 거대해진 빙산과 같은 얼음송곳을 쏘아냈다.
─콰직
처음으로 그럴듯한 타격음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후둑 후두두둑
공중에서 붉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국장이 쏘아낸 거대한 얼음 조각이 녀석의 턱 아래에 박힌 것이다.
“됐, 됐다! 피다!”
꿈쩍도 않던 괴물에게 타격을 줬기 때문일까.
헌터들의 분위기가 순간 화악 달아올랐다.
“좋아, 이대로 계속…….”
밀어붙이자는 말을 하려던 한 국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뒤룩
이제껏 눈길도 주지 않던 녀석의 눈이 그들을 향했기 때문이었다.
순간 몸이 빳빳하게 굳었던 국장은 놈이 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외쳤다.
“놈이 잠수하지 못하게 막아!”
국장의 명령이 끝나기 무섭게 머리부터 서서히 검은 안개 속으로 집어넣으려는 녀석.
그 순간.
“어딜 가려고!”
부산 대표와 용재는 화력 부대가 시선을 끄는 사이 놈의 몸에 올라탔다.
그리고 자신들의 힘을 아낌없이 보여줬다.
─쾅!
─콰직
용재는 놈의 등에 매달려 거대한 도끼로 살을 헤집었고, 부산 대표는 머리를 정권으로 내리꽂았다.
그러자 놈이 처음으로 비명과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끼이이이이이이익
고통스러운지 잠수도 멈추고 몸을 비트는 녀석.
이를 지켜보던 헌터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몇몇은 지금 상황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쉽다고?’
대한민국의 모든 전력을 모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준비도 충분히 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일이 너무 쉽게 흘러가고 있었다.
‘국내뿐만이 아닌 해외에서까지 악명 높은 이 괴물이, 정말 이게 다라고?’
그 사실이 국장을 비롯한 몇몇에겐 더할 나위 없이 찝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위화감은 실체가 되어 나타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으아아아악! 사, 살려…….”
─우직
꽉 다물어진 입에서 반으로 잘린 사람의 상반신이 툭 소리를 내며 굴러 떨어졌다.
화력 부대의 일원 중 하나였다.
─키이이이이익
허리까지 오는 짙은 안개 속에서 거대한 형체들이 솟아올랐다.
눈도 코도 없는 붕장어 같은 외형에, 꿈틀거리는 촉수와 날카로운 이빨들이 달려있다.
‘그래, 놈들을 잊고 있었군.’
각지에서 올라왔던 보고들.
그 보고서들 중 유일하게 강화도 보고서에만 적혀있던 생명체, ‘웜’이다.
보고에 따르면 측정 불가급이 나타나기 전, 감염자들과 함께 나타났다고.
‘이번에는 나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짙게 깔린 칠흑색의 안개 너머 녀석들이 언뜻언뜻 머리를 내비치며 다가온다.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