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대비 (3)
“아직 모자랍니다. 시간이 더 필요해요.”
호진의 말에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국장은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을 벙긋거릴 뿐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이거 계획을 새로 짜셔야겠네요.”
복도에 울려 퍼지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
이윽고 그 목소리의 주인은 드루이드와 정장을 입은 여자 그리고 처음 보는 남자와 함께 단련실 안으로 들어왔다.
드루이드를 제외하고는 전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호진은 별로 어렵지 않게 이들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들이 가진 기운이 결코 용재보다 못하지 않았으니까.
‘이자들이 S급들.’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그중 일본식 갑옷과 카타나를 착용한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세종 대표 윤주형이라고 합니다.”
“네, 반갑습니다. 이호진입니다.”
호진은 세종 대표가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회답했다.
그러기도 잠시, 호진은 그에게서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는지, 손을 마주 잡은 세종 대표의 손도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호진?”
세종 대표의 가늘게 뜬 눈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일 지경이다.
‘누구였지?’
호진은 티 나지 않게 미간을 모으며 과거를 곱씹다가 겨우 그 정체를 떠올렸다.
어째서 이제야 알았을까.
지난 수년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데.
호진이 검도를 포기하게 된 계기를 제공했던, 숨겨진 본능을 끄집어냈던 상대.
바로 전국 대회에서 만나 손가락을 부러트렸던 그 상대였다.
호진은 악수한 손을 놓으며 두어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그날의 일을 떠올리지 않았다.
왜일까.
호진은 그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본능을 경계하지 않게 되어서야.’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그 날의 사건은 호진에게 죄책감과 더불어 자신의 본능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줬다.
하지만.
게이트가 터지고 모든 게 변했다.
계속 부정해 왔지만, 호진은 이제 자신의 본성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자신은 투쟁을 즐기고, 상대의 약점을 무자비하게 물어뜯는 것을 좋아하며, 그 능력을 이용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속이 비틀리고 욕지거리가 목구멍 안쪽에서 들끓었다.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경기 때 자신은 분명 본능에 이성을 잡아먹혔었다.
그것은 지극히 위험했고 지양해야 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 본능이 이 뒤바뀐 세계에서 너무나 유용했다는 것이다.
받아들일수록 전투가, 투쟁이, 생존이 쉬워졌다.
그렇기에 호진의 경각심은 점점 옅어져만 갔고 그것을 막기 위해, 그날의 경기를 일부로 곱씹고는 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절 기억하십니까?”
세종 대표는 언제 굳었냐는 듯 다시 침착함을 되찾고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이에 호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합니다. 그때는 정말 죄송합…….”
“됐습니다. 이제 와 그런 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세종 대표는 호진의 사과를 자르며 어깨를 으쓱였다.
“중요한 건 지금이지요.”
말이 끝나기 섬뜩한 살기가 호진의 목을 훑었다.
세종 대표의 실눈이 반개하며 미소 짓던 입도 무표정하게 변했다.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시죠.”
─촤악
한순간 번쩍이는가 싶더니.
세종 대표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와키자시를 호진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에 아무도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호진도 마찬가지였다.
호진은 그저 날아드는 검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칼끝은 정확히 호진의 턱 아래 멈춰 섰다.
“쯧, 겨우 이 정도인가.”
세종 대표는 혀를 차며 작게 중얼거리고는 검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얼어있던 국장이 정신을 차리곤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인가!”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전력을 체크해 본 것뿐입니다. 그리고 방금 깨달았습니다.”
“……뭐?”
“저는 저 사람을 중심으로 짠 토벌 계획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괴물은 저희가 따로 잡겠습니다.”
“기다리게 그게 무슨…….”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토벌 계획의 수정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세종 대표에 이어 경비 차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두 사람이 몸을 돌려 단련실을 빠져나가자, 부산 대표 역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뒤를 이었다.
단련실에 남은 것은 어두운 안색의 드루이드와 국장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주무관, 마지막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태연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예은과 도훈이었다.
“큰일 났군. 계획이 엉망이 됐어.”
국장은 머리를 쓸어 넘기다 문뜩 호진을 바라보며 손을 저었다.
“아, 그래도 걱정하진 말게. 내가 저들을 잘 설득해 보겠네.”
“그래, 나도 잘 말해보지. 저들도 자네의 힘을 봤다면 저리 행동하진 않을 텐데.”
드루이드도 말을 보태며 고개를 저었다.
호진은 그런 그들을 잠시 지켜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버려 두시죠.”
“그래, 그래 내가 내버려 두도록 잘 말해…… 음? 뭐라 했나?”
국장은 호진의 말에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오히려 국장님과 드루이드님도 도와주시죠.”
“왜 그러나? 혹시 마음이 상한 거라면 내가 대신 사과하지.”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지금 제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자처해서 놈과 싸운다는 것은…….”
“좋은 시간 벌이가 되겠군.”
드루이드가 답하자, 호진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종 대표를 만나며 잊었던 죄책감과, 본능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번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세종 대표는 자신이 했던 실수와는 별개로 지금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다.
청양 대표에게 전해들은 대로라면 말이다.
그리고 이제 와 본능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 또한 옳지 않았다.
호진의 투쟁 본능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호진의 목숨을 구해줬다.
무엇보다, 앞으로 그 어느 때보다 그 본능이 필요로 하는 순간이 올 테니까.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사고하는 것이었다.
본능이 가지는 해로운 면과 유익한 면을 구분해서 말이다.
그렇게 정한 이상, 호진이 해야 할 것은 이전과 다름없었다.
“저는 이만 수련을 이어나가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호진의 축객령에 다른 이들은 등 떠밀리듯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국장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실례를 무릅쓰고 예은에게 물었다.
“……설마, 방금 보여준 게 강화 대표의 전부는 아니겠지?”
그 춤은 확실히 대단하긴 했지만, 방금 보여준 게 전부라면.
그렇다면 샴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국장의 떨리는 음색에도 예은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덤덤하게 답했다.
“저도 모릅니다.”
“……음?”
국장이 황당해하며 되묻자 예은은 재차 말을 이었다.
“저도 대표님이 준비한 게 뭔지, 그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잠시 말을 끊은 예은은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리며 말했다.
“준비 중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이상 믿을 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예은과 도훈은 호진을 데리고 숙소로 이동했다.
단련실에 남은 국장과 주무관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내 주무관이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사람을 저렇게까지 믿죠? 가족이라도 되는 걸까요?”
“가족은 무슨. 저건…….”
광신도의 눈빛이라는 뒷말을 삼킨 국장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해도 뜨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 아침.
예정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아직인가?”
국장이 신음을 삼키며 묻자, 주무관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준비가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그래, 혹시나 해서 물어봤네.”
그때 둘의 대화를 들었는지 세종 대표가 천천히 다가왔다.
“이제 그만 포기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뭘 말인가?”
“그 남자, 어제 보셨다시피 저랑 아는 사이입니다.”
“그래 보이더군.”
안 그래도 어제 둘의 대화를 들으며 궁금히 여겼던 부분이다.
국장이 가볍게 수긍하며 더 말해보라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
“조금 솔직해지자면, 제가 아는 그는 비열하고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상대의 약점을 물어 채고 죽을 때까지 놓지 않죠.”
“……지금 세상에서 그러지 않는 사람도 있나?”
“그는 지금 세상이 아닐 때조차 그랬으니까요. 일종의 본성이라고 볼 수 있죠.”
어깨를 으쓱한 세종 대표는 실눈을 뜬 채로 빙글빙글 웃음 지었다.
“그는 자신의 투쟁심을 충족하기 위해서라면 주변이 죽어 나가든 말든 전투를 벌일 겁니다. 그런 그를 신용하는 건 바보 같은 선택. 아예 전력에서 배제하는 게 좋겠죠.”
“……상대는 측정 불가급 괴물이네.”
“저도 준비해온 게 있습니다. 그 괴물은 제 손으로 죽일 겁니다.”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짓는 세종 대표.
이를 지켜보던 국장은 조금 딱딱해진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종 대표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정말 그를 배제하는 게 옳을지도 몰랐다.
최초의 측정 불가 등급을 받은 인간이다.
드루이드가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하긴 했지만, 떨떠름한 감각을 전부 떨칠 수는 없었다.
다만 강화 대표에 대해 이야기하는 세종 대표의 표현은…… 피해망상인가 싶을 정도로, 어딘가 과한 점이 있었다.
‘그렇게 이상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예전에 얻어맞기라도 했나?’
그때 몸을 풀던 부산 대표가 입을 열었다.
“하, 살다 보니 세종 대표와 의견이 같을 때도 있군요.”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저희도 S급 아닙니까. 아무리 상대가 측정 불가니 뭐니 해도 결국은 괴물. 쳐 죽이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부산 대표는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어제 보니 그 호진인가 뭔가 하는 사람도 별로 대단해 보이지는 않던데요. 지금까지 안 나오는 걸 보면 단순히 겁먹은 거 아니겠습니까.”
“…….”
국장은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의자에 앉아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경호 차장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S랭크를 포함한 주변의 사람들이 국장에게 쏠리자,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아니라고 보네만. 그렇든 아니든 달라질 건 없네. 자네들 뜻대로 먼저 싸우는 건 우리가 될 테니. 가장 최선은 우리 힘만으로 녀석을 제압하는 거겠지. 한번 그렇게 해보세.”
─오오오!
국장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한껏 기세를 올렸다.
그런 이들을 뒤로하고 국장은 못 박힌 듯 어스름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드루이드에게 다가갔다.
“자네는 아직도 그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국장의 말을 들은 드루이드는 그제야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무기를 치켜들고 괴물에게 자신이 먼저 꽂아 넣겠다며 큰 소리를 내는 이들.
드루이드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저들 중 누구도 측정 불가급 괴물을 본 적이 없을 겁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국장을 포함해 그 누구도 그 괴물을 실물을 본 적이 없다.
괴담 같은 소문만을 접해왔을 뿐.
“저는 본 적이 있습니다.”
“자네가? 왜 말하지 않았나?”
“말한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까요. 오히려 지금 분위기가 낫습니다.”
“그렇지 않네. 다들 너무 방심하고 있어. 지금이라도 자네가 저들에게 경고해준다면…….”
허탈하게 웃음을 흘린 드루이드가 국장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경고라……. 제가 해줄 수 있는 경고는 하나뿐입니다.”
“……그게 뭔가?”
국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묻자, 드루이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답했다.
“살고 싶으면 지금 당장 도망치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