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대비 (1)
한차례 소동이 일어난 등급시험이 끝나고 한 시간 뒤.
국장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50대쯤 돼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들어섰다.
‘저 사람이 국장.’
한눈에 봐도 단련된 육체에 딱 맞는 정장은 그를 마치 할리우드 영화배우처럼 보이게 했다.
급하게 달려온 것인지 숨이 거칠고 머리가 흐트러졌음에도 어딘가 격식이 느껴졌다.
“늦었습니다. 헌터 관리국 국장 주지훈입니다.”
“별말씀을요. 강화도 대표 이호진입니다.”
호진은 국장이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 순간 국장의 마주 잡은 손에서 호진의 수준을 파악하려는 기색이 느껴졌다.
‘재밌네.’
국장은 기를 익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역시 서울에 다섯뿐이라는 S급 중 하나다웠다.
초면에 탐색부터 하려는 모양이었지만, 딱히 불쾌하진 않았다.
애초에 감출 생각도 없었기에 궁금하다면 보여줄 뿐이었다.
─스스슥
호진은 가볍게 기를 운용했다.
그러자 주위로 폭풍 같은 기세가 흘러나왔다.
이에 손을 마주 쥐고 있던 국장은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루이드가 혀를 차며 웃었다.
“그러게 왜 사람 말을 믿질 못합니까? 제가 보장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굉장하군. 듣던 것 이상이야.”
국장은 드루이드의 비난에도 순수하게 놀람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럼 다 모이셨으니 이야기를 시작해도 될까요?”
호진이 주위를 둘러보며 묻자, 그제야 국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내가 들은 게 사실이라면 한시가 급한 상황이긴 하지. 하지만 그게…… 정말인가?”
국장은 믿고 싶지 않다는 듯 되물었다.
외부 일정이 있던 국장이 모든 걸 중단하고 허겁지겁 돌아온 이유.
그건 S급과 측정 불가급이 나온 호진들의 심사 결과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가 더 컸다.
“정말 놈이 이곳으로 오는 건가? 그 측정 불가급 괴물이?”
국장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호진을 향했다.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호진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다름 아닌 시스템의 퀘스트니까요.”
“……아.”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호진들을 포함해, 주무관, 드루이드, 국장까지 모두 각성자다.
대부분 한 번씩은 시스템의 퀘스트를 받아봤다.
그렇기에 모두 한 가지 사실을 공유했다.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물론 이곳에서 시스템의 진짜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건 호진뿐이었지만 말이다.
정적 끝에 주무관이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저…… 혹시 타국에 지원을 요청하면 어떻습니까?”
“음, 지원이라…….”
국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호진이 급히 되물었다.
“잠시만요, 다른 나라들과 연락이 되는 겁니까?”
그 질문에 국장을 포함한 몇몇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강화도에 오래 있었으면 모를 만도 하겠군.”
그런 국장의 말에 동의를 표한 주무관이 말을 이어받았다.
“국력이 약한 국가들은 그대로 무너지기도 했지만, 대부분 국가들은 아직 정부가 건재합니다. 그중 일부와는 연락망을 재가동했고요.”
“그러고 보니 일본과 인도에서도 그 측정 불가급 괴물에 당했다 연락이 오기는 했었지. 아시아 순회공연이라도 할 셈인가?”
“일본은 그렇다 치고 인도까지 말입니까?”
국장의 혼잣말에, 드루이드와 주무관이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국장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애당초 작금의 상황에 숨길 만한 정보도 아니었다.
반면 호진은 그 이야기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전에 울타와 조우했을 때, 샴이 섬기는 고대신 ‘라멜’의 권능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라멜의 사도 샴이라……. 그렇게까지 권능과 어울리는 녀석도 없을 게다. 만약 지닌 권능이 아니었다면 평생 대사막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을 녀석이니.’
‘권능이라 함은……?’
‘놈이 몸에 두른 그 칠흑색의 안개를 보았느냐? 그것이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하게 해주는 라멜의 권능, ‘심연의 바다’란다. 놈이 ‘심연을 유영하는 자’라는 이명을 얻은 이유이기도 하지.’
신의 사도쯤 되는 녀석이 지구에 현현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권능의 힘이 컸을 것이라는 게 울타의 추측이었다.
‘차원도 넘나드는 녀석인데 다른 나라쯤이야.’
호진이 어깨를 으쓱하던 그때, 주무관은 밝아진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그렇다면 그들도 저희를 도울 이유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게 그렇게 쉽지 않네.”
국장이 미간을 찡그리며 답하자, 주무관이 쭈그러든 채 물었다.
“왜…… 그렇습니까? 녀석을 저대로 놔두면 결국 또 피해를 보지 않겠습니까?”
“불가능하다고 여기니까.”
국장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심지어 인도는 녀석을 몬스터로 여기지조차 않아. 그들은 놈을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창공과 물의 신 ‘바루나’라고 부르며 떠받들고 있지. 오히려 놈을 잡겠다고 하면 항의를 해올지도 모르겠군.”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상황인 거다.
신으로 떠받들지는 않더라도, 상대할 수 없는 놈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을 돕고자 자국의 전력이 깎이는 리스크를 지고 싶은 국가는 없을 터다.
호진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는지라 실망하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은 한층 더 표정이 어두워졌다.
“결국 우리 힘만으로 방비를 해야 한다는 건데…….”
국장이 말꼬리를 흐렸다.
“어디서 올지 모르니 방비도 사실상 불가능하지.”
워낙에 신출귀몰한 이동 능력을 지닌 만큼 대비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국장이 말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국장이 입을 닫자 정적만이 흘렀다.
잠시 고민하던 호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녀석을 끌어들일 방법이 있습니다.”
“뭣? 그게 어떤 건가?”
국장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가장 어려웠던 첫걸음을 뗄 수 있었으니까.
국장의 기대감이 가득 담긴 시선을 받으며 호진은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제가 미끼가 되는 겁니다.”
“……?”
호진의 대답에 국장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국장만이 아닌 모인 사람들 대부분의 표정이 밝아지다가 도로 의문으로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세히는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샴, 그러니까 그 괴물은 저를 원하고 있습니다.”
에우리우스는 호진이 대사막 시칸을 지나기 어려울 거라 경고했었다.
샴이 호진이 지닌 격에 민감하게 반응할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게 호기심이든, 아니면 호진이 지닌 격을 욕심내서이든.
호진이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 까닭에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충하고자 하는 말은 이해했다.
“그러니까…… 놈이 자네가 있는 곳으로 알아서 찾아올 거라 이 말인가?”
“정확합니다.”
호진의 태연자약한 대답에 국장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무섭지도 않은 건가?’
측정 불가급 괴물이다.
중국에서는 군단급 병력이 반나절도 안 돼 전멸했다는 보고까지 있었다.
당장 호진 본인부터가 직접 경험했다고 들었다.
수백의 사람을 한입에 삼키던 그 괴물의 모습을 말이다.
그렇기에 국장은 더더욱 호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미끼가 되겠다는 말을 편안한 얼굴로 말하는 심리를.
“두렵지 않나?”
국장은 끝내 입에서 맴돌던 의문을 뱉어냈다.
이에 호진은 엷게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무섭습니다. 의식하지 않으면 다리를 떨어버릴 정도로요.”
그 말에 무심코 호진의 다리를 쳐다보자, 두 손으로 허벅지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아까 주무관님의 말씀처럼 지금 막지 않으면 피해는 계속해서 커질 겁니다. 언젠가는 또 저희 캠프에 놈이 들이닥칠지도 모르고요.”
한 차례 숨을 고른 호진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서 녀석을 막고자 합니다. 나아가 이미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넋을 달래주고 싶기도 하고요.”
호진은 잠시 잊고 지냈던 기억의 파편을 꺼내 떠올렸다.
어두운 밤, 캠프를 드리운 칠흑색 그림자.
그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에 무력하게 얼어붙던 다리가 지금도 생생했다.
지독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코끝에 맴돌고, 옷을 적시던 비의 촉감이 떠올랐다.
태풍에 집어 삼켜진 촛불들처럼 순식간에 꺼져간 생명의 불꽃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러나 그 끝에 늘 남아있는 건…….
다름 아닌 백기환 중령과 휘하 군인들이 보여준 존재의 가치였다.
동료와 부하들의 허무한, 부조리한 죽음을 목격하고도 굴하지 않던 그들의 기치.
그 신념들은 호진의 정체성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존재하는 거겠지.’
호진의 흐릿한 미소를 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미소가 슬프면서도 단단한 의지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회상을 멈춘 호진은 이내 지도를 펼치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어디 한번 계획을 짜볼까요?”
“넵!”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한 사람들의 표정에는 이전과 같은 긴장이나 두려움 대신, 결의에 찬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
계획은 빠르게 진행됐다.
지원요청을 통해 헌터 전력을 소집하고, 병력들을 집결시켰으며 훈련을 시작했다.
계획의 내용만 간단하게 확인한 호진은 곧바로 단련에 매진했다.
어찌 됐든 이 싸움은 결국 호진과 샴의 대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후우.”
관리국에서 마련해준 단련실.
가부좌를 틀고 내공심법을 운용하던 호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단전의 크기가 상당히 커졌네.’
매일같이 운용한 덕일까, 단전은 점점 그 크기를 키워나갔다.
반면 격은 지구로 넘어오고 거의 늘지 않았지만 말이다.
기운을 얼추 갈무리한 호진은 그대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13일뿐.
여유롭게 준비할 시간은 없었다.
단시간에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평소에 호진이었다면 그런 게 어디 있냐며 고개를 저었겠지만…….
‘있어. 강해질 방법이.’
「검식 파편: 강신무(降神巫) : 0/10000」
대족장의 검을 통해 얻은 정수.
한동안 미뤄뒀던 그 스킬을 익힐 때가 됐다.
호진은 머릿속에서 강신한 대족장이 보여줬던 신위를 떠올렸다.
무수하게 쏟아지던 바람의 칼날은 성벽을 자르고 대지를 폭발시켰다.
그것은 강해졌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 힘의 근원이 바로 ‘신’이기 때문이다.
‘여신과는 척을 진 지 오래다.’
강제로 맺어진 계약의 굴레를 벗어던졌으니까.
어째서인지 아직도 그녀의 힘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호진이 확실하게 기댈 수 있는 신은 ‘울타’뿐이었다.
문제는 지금까지 봐왔던 울타는 신비롭고 영험하긴 했지만, 압도되는 무위를 보여준 적은 없다는 것이다.
호진은 불안한 마음으로 이카루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카루스, 울타 님을 믿어도 될까?”
“호오, 호오.”
이카루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할 애는 아니긴 한데, 왠지 불안한 마음이 조금 남았다.
자신이 모시는 신을 믿지 않는 신도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지금 걸어볼 수 있는 도박은 이것뿐이었다.
호진은 한숨을 내쉬며 강신무의 조건들을 상기시켰다.
우선 필요한 것은 무구(巫具)이다.
호진은 대족장에게 얻은 황금색 검을 꺼내 들었다.
이 무구는 신을 부르고 내려오게 하는 길잡이가 된다.
그다음은 좌정시킨 신을 모시는 신당(神堂)이다.
아난타가 강신했을 때 바닥에 그려졌던 기하학적인 모양의 원.
찬란한 황금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던 그 원이 신당이다.
‘정수를 통해 지식을 얻은 덕에 신당을 만드는 방법쯤은 알고 있지만…….’
대족장과 같은 방식을 쓰는 것은 너무 리스크가 컸다.
당장 강신한 울타가 어떻게 싸울 줄 알고 자리를 바닥에 고정한단 말인가.
고민 끝에 호진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몸에 새긴다.’
호진 스스로가 신이 기거할 신당이 되는 거다.
물론 이렇게 할 경우, 신당이 지녀야 할 부담을 몸이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는 메리트를 생각하면 충분히 감안할 만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신을 모시는 춤, 즉 검무이다.
지금부터 호진이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움직이는 거였나?’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움직임이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한 걸음 한 걸음, 느린 듯 걸음을 떼며 움직이다가도, 어느 순간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검을 휘두른다.
빙글빙글 돌고 통통 뛰기도 하며 가락에 맞춰 어깨를 들썩인다.
총 62세(勢)로 이루어진 동작들.
그런 동작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만 번.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뭐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일어서는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