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헌터 등급 심사 (2)
다음 날 아침, 호진은 의자에 앉아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봤다.
‘결국 한숨도 못 잤네.’
호진은 굳은 목을 풀다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샴에 대해 고민하다가 밤을 꼬박 지새웠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우선은 등급 측정 후에 고민해 봐야겠네.’
그나마 다행인 건 몸이 피곤하지는 않았다.
이제 하루 이틀 안 자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때마침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일어나셨나요?”
“들어오세요. 열려있습니다.”
“아, 실례하겠습니다.”
신입은 긴장되는 표정으로 삐걱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경직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인사를 했다.
“어젯밤은 잘 쉬셨을까요?”
이에 호진은 엷게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다행입니다. 대표님은 아침부터 엄청 깔끔하시네요. 마치 안 주무신 것 같습니다.”
신입이 침구류나 호진을 힐끔거리며 말하자, 호진은 쓰게 웃었다.
‘그야 안 잤으니까.’
침구도 어제 그대로고, 옷은 어제 관리국에서 준비해준 정장 차림 그대로다.
그러니 깔끔할 수밖에.
뭔가 눈을 반짝이며 동경하는 눈빛으로 호진을 바라보던 신입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 사실. 팬입니다, 대표님. 예전에 대표님 관련된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야기를 듣고 설레서 잠을 못 잤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마 과장된 소문일 것 같지만요.”
호진은 약간의 부담스러움을 삼키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이에 신입이 한층 더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 혹시 김포의 한 아파트에서 단신으로 수천의 감염자들을 막아내셨다는 소문은 진짜인가요?”
“……단신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감염자들은 지금과 달리 많이 약하기도 했고요.”
호진이 난처하다는 듯 대답했지만, 신입은 뒤에 말을 듣지도 않고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대표님이 있는 강화도가 부럽네요. 왠지 대표님이 있으면 서울도 안전해질 것 같아요.”
신입의 눈빛이 한층 더 부담스러워졌다.
이에 호진은 슬쩍 주제를 바꿔 물었다.
“심사 일정은 나왔을까요?”
“아, 네, 넵! 나왔습니다. 아침 식사 후에 11시까지 대강당으로 오시면 됩니다.”
“대강당이요? 등급 측정실이 아니라요?”
호진이 고개를 갸웃하자 신입도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입은 그렇게 호진에게 인사 후 빠르게 물러났다.
─띠링
「플레이어의 격이 미약하게 오릅니다.」
‘내가 뭘 했다고 또…….’
호진은 약간 황당했다.
그와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들의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조금 부담스럽지만 기쁜 일이다.
그들의 신뢰에 보답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가능한 하고 싶었다.
호진에게 최우선은 강화도에 있는 가족과 동료들의 안위이지만, 그렇다고 서울 시민들의 목숨을 가벼이 하고 싶지도 않다.
“이거, 조금 더 힘내야겠네.”
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한번 퀘스트를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
10시 50분쯤 호진은 일행들과 청사 앞에서 만나서 대강당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걷던 와중 용재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뭐지, 왠지 사람들이 우릴 쳐다보는 것 같은데.”
“그것만 눈치챘냐. 심지어 가는 방향도 같아.”
예은이 정면을 바라보며 입을 달싹거려 대답했다.
대강당은 본관과 떨어진 별관이기에 직원들이 대강당으로 갈 일은 별로 없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은 꽤 많은 사람이 대강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상하긴 하네요. 우선 신경 쓰지 마시죠. 우리랑 관련 없을 수도 있습니다.”
호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확신했다.
그들이 호진들의 등급 측정을 구경하러 모였다는 사실을.
기감으로 자신들을 향하는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걷다 어느새 도착한 별관의 문 앞에서 낯익은 사람을 만났다.
“과장님.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받은 3팀의 김 과장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뒤에는 금붕어 똥처럼 붙어 다니는 3팀 현장 감독관이 어색한 표정으로 슬쩍 목례를 해왔다.
그런 감독관의 정강이를 가볍게 걷어찬 과장이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제 등급 측정을 거부하더니 이런 수작질을 벌일 줄이야.”
‘이건 또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지?’
이에 호진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대놓고 기가 찬다는 듯 숨을 뱉은 과장이 말을 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뻔뻔한 구석이 있네. 그런데 자네. 후회할걸? 원래 등급 측정이 더 후하거든. 어중간하면 오히려 더 낮은 등급을 받을 텐데.”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
정말 궁금해진 호진이 되묻자 과장이 입매를 비틀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러시겠지. 그런데 그분은 매수가 안 돼. 주무관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호진은 과장의 말을 잠시 곱씹었다.
그러니까 지금 심사는 ‘그분’이라는 사람이 주관하는 거고, 주무관이 이 심사를 추진했다는 말인 것 같다.
‘그나저나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내가 주무관에게 청탁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네.’
호진은 엷게 미소를 띠며 과장에게 답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야말로 과장님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갑자기 뭔 소리냐는 듯 호진을 올려다보는 과장에게, 호진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세종 캠프 대표는 과장님을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이러시는 겁니까?”
순간 멍때리던 과장의 얼굴이 술이라도 마신 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뭐, 뭐? 야, 너 뭐라 그랬어?”
그의 턱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모습에 안 그래도 이목을 끌던 우리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보는 사람이 많은데, 다시 말씀드려도 될까요? 아, 혹시 이분들도 다 아는 사실인 건가.”
호진이 뺨을 긁으며 대답하자 과장이 미친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황급히 문을 열고 건물로 들어가다가, 멈칫하고 뒤로 돌아 씹어뱉듯이 입을 열었다.
“……후회할 거다.”
“그럴지도요.”
다른 건 몰라도 이젠 더 이상 과장을 놀리지 못할 것 같아서 그건 후회가 된다.
호진이 빙그레 웃으며 답하자 과장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과장의 뒷모습을 용재가 설레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등급 측정 후에 저 사람 어떤 표정을 지을까?”
“기대되는군.”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예은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저는 카메라도 준비했습니다. 저 사람 표정 구겨지는 거 볼 때마다 왠지 속이 뚫리더라고요.”
“어, 누나! 찍으면 나도 공유해줘. 소화 안 될 때마다 보게.”
아무래도 김 과장은 한동안 캠프 사람들의 소화제로 쓰일 듯하다.
호진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려 본 적이 없었기에 오히려 약간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근데 이 사람들은 내 등급 측정이 낮게 나올 걱정은 안 하네.’
하긴 이곳에 와서 제대로 된 헌터를 본 적이 없으니까 이해는 했다.
무엇보다 등급이 낮게 나온다 해도 별 상관없었다.
애초에 14일 뒤에 샴을 함께 막을 수준이 되는 사람은 호진들밖에 없었다.
‘그때가 되면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하게 되겠지.’
어깨를 으쓱한 호진은 강당으로 발을 내디디며 엷게 웃음 지었다.
“그럼 들어가 볼까요.”
***
안쪽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호진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시선이 쏠리고 소란이 잦아들었다.
‘역시, 우리를 보러 온 사람들이군.’
다들 뭔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강당의 단상과 호진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강당 단상 위에 주무관과 신입, 그리고 낯선 인물이 한 명 서 있었다.
허름한 가죽 로브에, 짐승의 뼈로 만들어진 것 같은 장신구들.
얼굴은 검은색으로 칠했고 다듬지 않은 수염이 덥수룩했다.
어깨에는 검은색 까마귀까지 올라탄 모습이 마치…….
“드루이드네.”
“드루이드군.”
용재와 도훈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예은이 난생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뭔데요.”
샤먼이자 주술사, 자연의 힘을 숭배하고 그들의 힘을 이용하는 이들.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에 자주 등장하는 직종이다.
이쪽 세상에서 저 정도로 판타지적인 복장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무엇보다.
‘제법 강하네.’
드루이드가 풍기는 기세가 남달랐다.
호진이 단상으로 다가서자 사람들이 갈라지며 길을 텄고, 일행들이 그 뒤를 뒤따랐다.
“안녕하세요, 주무관님.”
“앗,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이쪽은 오늘의 심사를 도와주실 분입니다.”
소개를 받은 중년의 남성, 즉 드루이드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서울 소속 헌터 김진섭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호진입니다.”
둘이 인사를 나누자 주무관이 이어서 설명을 시작했다.
“진섭 님은 서울에 단 세 분이신 S랭크 헌터들 중 가장 실력자이십니다. 최초의 S랭크라 불리시기도 하시고요.”
“그렇군요. 대단하십니다.”
호진이 놀라며 대답하자 드루이드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 과분합니다. 대표님이야말로…… 듣던 거 이상이시군요. 왜 주무관이 등급 심사도 안 치르고 저에게 심사를 요청했는지 알겠습니다.”
드루이드의 발언에 한차례 강당이 술렁였다.
“방금 들었어?”
“다른 S랭크 헌터가 나올 때도 저런 말을 하시지 않았었나?”
“오늘 어쩌면 새로운 S랭크가 나올지도 모르겠네.”
그 술렁임에 강당 가까운데 자리한 김 과장의 표정은 똥 씹은 표정이 됐고, 청양 대표는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주무관도 놀란 감정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이어서 설명했다.
“원래 한국의 S랭크 후보들은 모두 진섭 님에게 심사를 받습니다. S랭크라 불릴 자격이 있는지 아닌지요. 이번엔 제 독단으로 대표님에게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고 심사를 요청했는데, 다행히 맞았나 봅니다.”
호진은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직원들이 이렇게 구경 온 거구만.’
S랭크가 되면 재밌는 볼거리고, 안된다고 해도 주무관이 헛발질한 걸 구경할 수 있으니까.
“대표님 정도면 차고도 넘치시죠.”
드루이드는 허허 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확언을 받자 그제야 주무관은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숨을 토해냈다.
아무래도 일을 크게 벌인 만큼 걱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측정을 시작해 볼까요. 우선 다른 분들부터 측정하겠습니다. 원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해야죠.”
“저는 좋습니다.”
호진은 피식 웃으며 동의했다.
그러자 드루이드는 도훈의 앞에 다가가 섰다.
갑작스럽게 심사를 받게 됐음에도 도훈의 표정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역시 도훈…….
‘응?’
도훈의 입매가 경직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계속 붙어 다니는 호진이 모를 수는 없었다.
‘설마 긴장한 건가?’
이상한 데에서 소심한 사람이다.
그라면 분명 좋은 등급을 받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드루이드는 그런 도훈의 앞에 서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주머니에서 뼛조각을 꺼내 바닥에 뿌렸다.
그리고 다른 주머니에서 날고기 한 점을 꺼내 어깨 위 까마귀에게 먹였다.
그 순간.
까마귀의 부리가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