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헌터 등급 심사 (1)
‘저건 또 뭐야.’
호진은 겉으론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론 욕을 뇌까렸다.
헌터 관리국이 아니라 복마전이라 해도 믿겠다.
어떻게 한 사람도 제대로 된 인간을 보질 못했다.
‘그나마 이 사람이 정상이라니.’
무전으로 대화할 때까지만 해도 만나면 어떻게 갚아줄까 고민했는데, 만나고 보니 그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이 주무관이었다.
주무관에게 응어리진 것을 용재와 예은이 한껏 까줘서 속이 조금 풀리려던 찰나.
과장인가 뭔가 하는 인간이 나타나더니 한술 더 뜨고 있었다.
마주 앉은 지금도 계속해서 말이다.
“나이도 어리니 말은 조금 놓을게. 괜찮지?”
“네, 편하게 하시죠.”
이미 놓고 있으면서 왜 물어보는 건지.
웃는 낯을 한 호진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청양 캠프와 세종캠프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아아, 잠깐. 이거 어린 친구라 뭘 잘 모르네. 왜 이렇게 급해.”
호진의 말을 끊은 과장은 커피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어련히 다 말해줄 텐데. 호진 씨는 묻는 말에 대답만 하면 돼.”
“……그러시죠.”
호진은 간신히 참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안절부절 못하던 3팀 감독관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고, 반대로 청양 대표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주무관은 여전히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어디까지 참아야 할까.’
선을 정해 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참는 것도 어렵고, 판을 뒤집는 것도 어려우니까.
일행들의 표정은 이미 한계였다.
특히 용재는 아까부터 도끼를 쥐락펴락하는 게 심상치 않다.
‘나를 뜨내기 취급하는 것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만약 말로 교묘하게 장난질하며 이용해 먹으려 든다면, 그걸 참아줄 이유는 없었다.
그런 호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 헛소리를 주절거리던 과장은 그제야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래, 그러니까 호진 씨는 여기 등급 측정하러 온 거지? 내가 그쪽 관리자랑 조금 알아. 듣자 하니 김포를 오갈 정도 실력자라며? 내가 잘 말해줄게.”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호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다.
대놓고 청탁이라니, 꿍꿍이가 없을 리가 없다.
“에이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잘 부탁한다, 이 정도만 말하는 건데 뭘. 동생은 나만 믿으면 돼. 그보다 청양 캠프 쪽 사람들과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얼씨구, 언제 봤다고 동생인가.
‘호연이 형도 나를 그렇게 부르지는 않아.’
호진은 무시하고 덤덤하게 묻는 말에 답했다.
“오는 길에 만났습니다.”
“그래? 그럼 아는 사이는 아니구나?”
과장은 대놓고 안심하며 웃음을 흘렸다.
“강화도 캠프에서 청양 캠프 쪽이랑 병합 의사가 있다던데, 그럼 그건 내가 잘못 들은 거지?”
“그건 맞습니다. 저희 캠프가 마침 일손이 부족한데 가실 데가 없으시다 들었거든요.”
“그래……? 그러면 조금 곤란한데.”
과장이 수염을 가볍게 쓸었다.
“세종 쪽에서도 일손이 부족해서 병합 요청을 해온 지 꽤 됐거든. 이미 주거지나 일자리도 마련된 모양이고.”
“일자리요?”
그때 가만히 있던 청양 대표가 꽉 움켜쥔 주먹을 부들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일하고 감자 몇 개 주는 게 일자립니까?”
청양 대표의 말에 과장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적어도 하루 종일 일하면 밥도 주고, 안전하게 지켜주기도 하는데 지금 세상에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과장은 고개를 돌려 호진을 바라봤다.
“애초에 본인들이 강하면 이런 얘기 할 필요가 없지. 안 그래, 동생? 동생도 잘 생각해. 그쪽 캠프 규모가 크거든. 무엇보다 S급 헌터가 있다니까. 안전하기로는 그쪽이 훨씬 안전할 텐데, 데려가겠다고 하면 그건 욕심이지.”
“S급 헌터…….”
호진이 말을 흐리자, 과장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래, S급 헌터. 아무리 강화도에 인재가 많다지만 S급은 없을 거 아니야. 한국에 다섯 명뿐인데. 그러니까 동생도 청양 캠프를 위해서라도 그만 포기해. 청양 캠프도 양심이 있으면 감사한 줄 알아야지. 쯧.”
과장의 혀 차는 소리에 청양 대표의 굳어 있던 얼굴에 금이 갔다.
메마른 목소리에는 퍼석퍼석한 분노가 묻어났다.
“감사? 저도 들은 게 있습니다. 다른 캠프가 세종으로 가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요.”
청양 대표의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피식
돌연 딱딱하게 굳어 있던 과장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뭐야, 어쩐지 재심사를 보겠다고 매달리더구만. 이봐요, 청양 대표. 아니지 자꾸 청양 대표라 불러주니 뭘 착각하나 본데.”
과장이 입술을 가볍게 핥으며 말했다.
“어디 한번 말해봐. 뭘 들었는데? 헛소리하기만 해봐. 바로 세종 캠프 대표에게 전달해 줄게.”
그 말에 청양 대표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세종 대표가 그 S급인가? 도대체 누구길래 저런 반응이지?’
호진은 의아함을 가지기도 잠시,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과장님 말은 잘 알겠습니다. 청양 캠프가 저희와 함께할 수 없는 게 안전 문제라 이 말씀이시군요.”
고개를 돌린 과장은 기꺼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동생. 역시 말이 잘 통할 줄 알았어, 내가 심사는 관리자에게 잘 말해줄게.”
“아뇨, 그건 됐습니다. 그보다 그런 문제라면 저희가 세종보다 등급이 높으면 문제가 없겠네요.”
“……뭐?”
“말 그대롭니다. 청양 캠프분들은 저희가 모셔가겠습니다. 물론 본인들이 동의한다면요.”
호진의 선언에 희비가 교차했다.
청양 대표는 실낱같은 희망을, 과장과 감독관은 똥을 씹은 듯 와락 구겨진 표정을 지었다.
“그 말 진심인가?”
과장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마치 마지막으로 기회를 줬다는 듯이.
“진심입니다.”
호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과장이 벌떡 몸을 일으켜 문으로 걸어 나갔다.
문고리를 잡은 그가 고개를 돌려 호진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잘해보게.”
‘할 수 있다면 말이지’라며 작게 중얼거린 과장은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나갔고, 감독관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예은과 용재는 모두 여유로운 표정을, 청양 대표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직 주무관만이 어안이 벙벙한 채 눈을 끔뻑거릴 뿐이었다.
***
“그런 미친!”
주무관은 청양 캠프가 받은 재심사 이야기를 듣자마자 크게 분개했다.
“미친놈들이 사람을 죽일 생각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그런……. 이건 안 되겠어요. 당장 국장님을 부르겠습니다.”
“그…… 주무관님. 국장님 지금 출장 중이신데요.”
“아…….”
신입의 말에 제정신을 차린 주무관이 신입을 찌릿하고 노려봤다.
“너는 불러오랬다고 저런 인간을 불러오면 어떡하냐.”
“제일 높은 사람 불러오라면서요.”
신입이 억울하다는 듯 대답하자, 주무관은 입을 꾹 다물었다.
틀린 말은 없었으니까.
그런 그들을 보며 호진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보기 좋네요. 근데 저희도 할 이야기가 있는 걸로 아는데요.”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힌 주무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 네 물론입니다. 대표님. 지원 요청의 건과 등급 측정의 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리죠.”
마른침을 삼킨 주무관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지원 요청의 건입니다…….”
주무관은 한참이나 측정 불가급 괴물과 그 위험성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그건 ‘심연을 유영하는 자’가 분명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들은 호진 역시 강화도에서 녀석을 목격했던 이야기를 빠짐없이 전했다.
물론 신의 사도이니 뭐니 하는 정보들은 빼고 말이다.
군대와 함께 철수한 주 대위가 이미 전달한 이야기일 텐데도, 주무관은 끝까지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주무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최근 녀석의 목격 정보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뭔가 일이 터질 것처럼. 대표님. 서울이라면 놈을 막을 수 있을까요?”
호진은 잠시 녀석의 모습을 떠올렸다.
폭탄에도 총에도, 어떤 무기에도 상처 입지 않던 녀석의 모습을.
솔직히 놈이 쓰러지는 모습을 떠올리는 게 더 어려웠다.
하지만 호진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답했다.
“방법이 있을 겁니다. 분명.”
“그러겠죠? 감사합니다.”
별거 아닌 위로였음에도 주무관은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나 반대로 호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띠링
「여신에게 향하는 길」
「1─1. 라멜의 사도 ‘심연을 유영하는 자 샴’에 대한 정보 얻기.」(완료)
「1─2. 라멜의 사도 ‘심연을 유영하는 자 샴’에 대한 정보 얻기.」(완료)
「1─3. 라멜의 사도 ‘심연을 유영하는 자 샴’의 서울 침공 저지하기. 제한 시간: 15일」
‘설마 했는데.’
벌써 싸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호진은 최대한 당황을 숨기며 평정을 유지했다.
아무도 없었다면 벌떡 일어나 방 안을 빙빙 돌며 머리를 쥐어뜯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늘과 시스템에 대고 미친놈들이라며 소리를 질렀을 수도 있다.
지금 딱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으니까.
‘진정하자. 제한 시간이 있으니까.’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서울 사람들을 대피시킨다거나.’
조금 극단적이긴 하지만 생각할수록 나쁜 수는 아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샴’이다.
놈을 해치우지 않는 이상 같은 문제가 끝없이 벌어질 것이다.
결국 호진이 선택할 수단은 하나뿐.
‘놈이 서울을 공격하기 전에 처치하는 것’.
가능의 유무를 떠나, 도전할 수밖에 없다.
설마 죽기야 할까.
‘아니어야 하는데…….’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떨고 있었다.
“대표님?”
“아, 네.”
호진은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머리에서 멀어질수록 불안을 통제하기 어렵다더니.
표정은 잘 숨겼다 생각했는데, 다리를 자진모리장단으로 떨고 있었을 줄이야.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주무관에게 호진은 가볍게 양해를 구하며 되물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피곤해서. 어디까지 말씀하셨죠?”
“아닙니다. 피곤하실 텐데 너무 오래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그 헌터 등급 측정은 내일 보시는 게 어떠신지 여쭤봤습니다. 오늘 보시면 아마 3팀 과장님 입김이 들어갈 것 같아서요.”
호진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 씨근덕거리며 나가던 3팀 과장은 분명 뭔가 저지를 얼굴이었다.
등급 측정 결과를 조작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내일 시험 보면 뭐가 다른 겁니까?”
“다를 겁니다. 내일은 헌터 등급 측정 중에서도 가장 정확한 방법을 제가 준비해놓겠습니다.”
“방법이 여러 개가 있나 보네요?”
“그런 건 아닌데…… 내일 보시면 알 겁니다.”
주무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 푹 쉬십시오. 신입!”
“네, 넵.”
“강화도 대표단분들 숙소로 안내해드려,”
신입이 다시 한번 대답하려던 그때, 주무관은 ‘아 참’하며 말을 이었다.
“청양 대표단분들도 오늘은 푹 쉬시죠. 3팀에서 뭐라 하면 무시하시고 저를 찾아주십시오. 뭐 어차피 구린 짓 하던 게 딱 걸렸으니 더 허튼짓은 안 할 것 같지만요.”
“저, 정말.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하게 불린 청양 대표는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약간 목이 메인 청양 대표는 허리 숙여 호진과 주무관에게 감사를 표했다.
호진은 그런 청양 대표의 어깨를 토닥거려주며 생각했다.
이 사람과 자신의 차이는 뭔가.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작고 위태롭게 만드는가.
고민할 필요도 없다.
너무 명확하니까.
힘.
오로지 그것이 사람들 간의 관계를, 위치를, 가치를 정하고 있었다.
호진이 그토록 바랐던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유달리 입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