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귀환 (4)
“마법으론 이런 게 되지.”
불도 전기도 아닌데 왠지 따사로운 기운.
아이들의 시선이 홀린 듯 그쪽을 향했다.
그러자 그곳엔 시들었던 보라색 들꽃이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며 꽃잎을 피워내고 있었다.
그 밝은 빛의 출처는 다름 아닌 용재였다.
기(氣).
생명의 근원과도 그 힘은 각자 다른 특성을 지닌다고 알고 있기는 했지만…….
‘저런 식의 활용도 가능한 건가?’
호진도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벌리고 바라볼 뿐이었다.
“저게 무슨……?”
그나마 기의 존재를 알고 있던 호진과 도훈과 달리, 예은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눈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얼마나 크게 떴는지 뒤통수를 치면 눈이 데구르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와아아아아아아앙으아앍!”
그때 감탄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아이들이 너도나도 용재를 향해 몰려들었다.
“아저씨, 아저씨 마법사예요?”
“아저씨, 하늘도 날 줄 알아요?”
“아저씨는 아닌데…….”
용재는 아이들이 쏟아내는 질문의 폭격 속에서도 아저씨라는 단어에 꽂힌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기도 잠시, 금세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잘 돌보는군.”
도훈이 부럽다는 눈빛으로 용재를 바라보며 말하자, 예은이 어깨를 들썩이며 답했다.
“잘 돌보는 게 아니라, 잘 노는 거 아닐까요? 보호자보다는 동네 친구 같은데요.”
방금까지만 해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던 예은은 아이들의 소란을 보며 김빠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쩌면 평소와 같은 용재를 보고 진정했는지도 모르겠다.
호진이 웃으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은과 눈이 딱 맞았다.
그러자 예은이 재차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잠깐 왜 그러나 고민하고서야, 방금까지만 해도 다 같이 자신을 조리돌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연애 좀 못해봤기로서니 다들 너무 박장대소했다.
‘그렇게 웃겼나.’
하긴 웃겼을 것 같기는 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얼 타던 게 생생했으니까.
떠올렸더니 괜히 다시 목덜미가 따끔거리는 기분이었다.
“다 웃으셨나 봐요?”
호진이 입으로만 미소 지으며 묻자, 잠깐 움찔한 예은이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답했다.
“제가요? 안 웃었는데요.”
……시치미를 떼기에는 너무 크게 웃지 않았나.
호진이 빤히 바라보자, 예은은 급히 도훈에게 도움의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도훈은 어느새 핸드건을 꺼내 들고 손질 중이었다.
예은이 배신당했다는 표정으로 노려봤지만, 도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핸드건에 시선을 고정했다.
갈 길을 잃은 예은의 시선은 허공을 방황하다가 결국 얌전히 호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곤 호진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달싹였다.
“아까는 사레가 들려서…….”
“농담입니다.”
호진이 피식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더 얘기해봤자 결국엔 자신 얼굴에 침 뱉기였다.
뭐 좋은 얘기라고 끄집어낼까.
부끄럽기만 하지.
“그보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박 순경님 오시면 다 같이 이야기해볼까 했는데, 예은 씨가 간단하게 이곳 상황 좀 정리해주세요.”
“아, 네. 그럼요.”
예은도 바뀐 화제가 달가웠는지 냉큼 대답을 이어나갔다.
***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런 거네요.”
호진은 예은이 말한 상황들을 천천히 정리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한 달.
캠프는 강화도를 안정화하는 데 전력을 집중했다.
다행히 추가적인 게이트는 발생하지 않았기에, 캠프는 기존에 남은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생존자들을 규합하는 데 힘을 쏟을 수 있었다.
가장 저항이 거셌던 건, 잔존 리자드맨 세력.
나머지 몬스터들은 이미 리자드맨과 캠프 쪽 인원들에게 철저하게 토벌당해, 세력이라 부를 것도 없었다고 했다.
그 와중에 착실하게 캠프의 방비를 준비했다고 한다.
물론 아직 부족한 점들도 있지만, 호진이 보기에도 지난번에 비해 훨씬 발전한 게 눈에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강화도는 이제……?”
“우리밖에 없어요.”
원하던 대답을 들은 호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캠프에는 700여 명이 전부지만, 감시단과 헌터 일부가 강화대교 쪽 캠프로 이동해 다리를 지키고 있고요.”
‘군부대가 빠지며 텅 빈 곳을 임시 거점으로 삼은 건가.’
나쁘지 않았다.
이제 성역이 작동하기에 웬만한 몬스터들은 못 들어오겠지만, 그래도 감시는 유지하는 편이 좋다.
역시 이들에겐 일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아, 그리고 3일 전쯤 정부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정부요?”
예상치 못한 이름에 호진은 눈이 커져 되물었다.
“네, 간단히 줄이자면 지원을 요청하는 거긴 한데…….”
예은은 뭔가를 떠올린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흐렸다.
“한데요?”
호진이 궁금한 듯 묻자 예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우선은 대표님이 자리를 비우셨으니 나중에 다시 연락 달라고 했어요.”
“잘하셨습니다. 필요하면 조만간 연락이 오겠죠.”
호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캠프의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괜찮았다.
안 그래도 저쪽 차원에서 아직 해결 못 한 일이 많이 남았기에 한숨 돌린 기분이었다.
‘간단하게 정부 쪽 일만 처리하고 다시 돌아가도……. 아니다.’
호진은 들뜨던 머리를 차분히 식혔다.
퀘스트니 단련이니, 묘역의 숨겨진 방까지 저쪽 세상에 놓고 온 것들이 눈에 어른거렸다.
당장에라도 가고 싶었지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호진에게 소중한 것은 캠프에 있다.
호진이 강해지고자 하는 이유도, 캠프를 만들어 성장시키는 이유도.
모두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함이다.
최근 들어 강해지고 성장하는 것 자체에 집착하다 보니 종종 목표를 잊어버리곤 했다.
다시 한번 목표를 잡은 호진은 시선을 돌려 아이들과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평화로운 광경.
예전에는 이토록 소중한 것들인지 몰랐다.
호진은 가슴속 깊이, 지금 보이는 장면 하나하나를 새겨 넣었다.
***
축제 같은 밤이 지나고,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흘렀다.
의외로 호진의 손이 필요한 곳이 많았다.
캠프 규모의 확장, 헌터와 감시단의 충원과 훈련, 새로운 캠프 장소 물색, 공방 방문 및 골렘 제작 진행도 파악까지.
이미 진행 중인 일들도 다 호진의 컨펌이 필요했다.
그간 공왕의 습격으로 지체됐던 일들이 호진의 복귀로 탄력을 받았는지, 엄청난 기세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이호진입니다.”
무전기 앞에 앉은 호진이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고, 그런 호진의 주위로는 캠프의 핵심인사들이 둘러 앉아있었다.
[아, 헌터관리국의 이한 주무관입니다. 그쪽이 강화도 캠프 담당자 맞죠?]
무전기에서 흘러나온 주무관의 말에 사람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호진의 인사를 안 받은 건 둘째치고, 느긋한 음색에서 왠지 깔보는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담당자가 아니라 대표입니다.”
예은은 침착하게 호칭을 정정했다.
그러자 무전기 넘어서 가벼운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아, 예. 대표님. 원하시면 그렇게 불러드려야죠. 기왕이면 수령님은 어떻습니까?]
주무관의 한껏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용재가 험악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 했다.
호진은 살며시 손을 들어 일행들은 진정시키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편하실 대로 부르시죠.”
[하하하하. 농담입니다. 별로 재미없으셨나 보네요.]
호진이 대답하지 않자, 주무관은 조금 더 실없는 소리를 해대다가, 충분히 만족했는지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번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연락을 드린 건 지원 요청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가볍게 한숨을 쉰 주무관은 계속 말을 이었다.
[별로 뭔가를 기대하는 건 아니고요. 목격 정보를 모으기 위함이니까 편한 마음으로 와주시면 됩니다.]
말을 마친 주무관은 ‘별 도움도 안 될 사람들을 왜 부르는지…….’라며 가볍게 혀를 찼다.
혼잣말이라기에는 너무 잘 들렸기에 일행들의 얼굴은 한층 더 험하게 구겨졌다.
“어떤 목격 정보 말입니까?”
[……예? 그것도 못 들었습니까? 하아…… 그냥 오셔서 들으시면 됩니다. 어차피 헌터 관리국에서 등급 측정도 하셔야 하니까. 겸사겸사 오시죠.]
“네, 그러죠. 그럼 일정은…….”
호진이 말을 하는데 주무관이 귀찮다는 듯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한 이 주 뒤쯤 헬기를 보내겠습니다. 육로는 막혀있으니까요. 그럼.]
삑, 소리와 함께 신호가 끊겼다.
지지직 소리만 내는 무전기 앞에 사람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도 잇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정적을 깬 건, 얼굴이 붉어진 박 순경이었다.
“저거 순 미친놈 아닙니까? 지네들이 말을 안 해줬는데 무슨 일인지 우리가 어떻게 안다고. 아니, 그보다 주무관 주제에 말투가 왜……!”
“진정하세요, 박 순경님. 그보다 주무관이면 순경님보다 높은 거 아닙니까?”
호진이 웃으며 말하자, 박 순경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들겼다.
“제 상관도 아니고 행정부 소속인 것 같은데 뭔 상관입니까. 군대에서도 타부대 선임은 그냥 아저씨죠. 아니,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호진 씨!”
“…….”
호진이 대답하지 않고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박 순경이 용재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용재야, 너도 뭔가 말 좀 해봐. 넌 화도……?”
화도 안 나냐며 물으려던 박 순경은 입을 다물었다.
용재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탓이었다.
“만나면 반으로 접어버릴 거야.”
도끼를 꼬나쥐며 용재가 중얼거리자, 박 순경의 출타한 이성이 돌아왔다.
지난 함께한 세월 동안 그를 지켜본 결과, 저건 진심이었다.
“……우선은 진정하자, 용재야. 예은 씨도 좀 말려주세요.”
박 순경이 도움을 청하자 예은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봐봐, 용재야. 예은 씨도 진정하라잖…….”
“화살을 어디에 쏴야, 가장 아플까요?”
“……예?”
박 순경이 멍청한 소리를 내며 예은을 바라보자 예은이 예의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급소는 피해야 하는데…… 역시 처음은 허벅지가 좋겠죠?”
다들 제정신이 아니다.
박 순경은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얼굴이 하얘졌다.
‘그러고 보니 여기 이 사람들 전부…….’
호진의 광신도들.
자신도 이호진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사람이지만, 이들은 차원이 달랐다.
본인들을 모욕하는 건 참아도, 호진이 무시당하는 건 못 참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호진은 신이자 종교였으니까.
박 순경은 그 순간 뭔가 박탈감을 느꼈다.
자신도 호진과 관련된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린다고 생각했는데…….
잠깐의 반성 후, 다시 고개를 든 박 순경의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좋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전쟁입니다! 주무관을 잡는 그날까지 우린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좋아요.”
광신도들의 대통합이 이뤄지는 그 순간, 호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진정들 좀 해봐요. 정신 사납습니다.”
“……넵.”
끓어올랐던 막사 안의 분위기가 팍하니 식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진은 여전히 턱을 괸 채로 눈앞에 뜬 퀘스트 창을 응시할 뿐이었다.
「여신에게 향하는 길」
「1─1. 라멜의 사도 ‘심연을 유영하는 자 샴’에 대한 정보 얻기.(완료)」
「1─2. 라멜의 사도 ‘심연을 유영하는 자 샴’에 대한 정보 얻기.(2)」
방금 주무관과의 대화가 끝나는 순간 갱신된 퀘스트 창.
확실히 주무관의 태도가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헌터관리국에 가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아니, 서둘러 가야겠지.
마음을 굳힌 호진은 자신을 응시 중인 일행들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내일 관리국으로 출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