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귀환 (2)
한참을 머뭇거리던 에우리우스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잠깐 귀공에게 할 말이 있네.”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스승님.”
호진은 최대한 경청하는 태도로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에우리우스는 마음을 굳힌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 귀공은 여신님을 만나 뵙겠다고 했지. 사실 나는 그 말을 흘려들었네. 불가능하다고 여겼거든.”
어찌 보면 자신을 낮잡아보는 말임에도 호진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신을 만나려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꺼냈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호진의 목표에 도움이 될 말이 나올 것이기에, 호진은 기꺼운 태도로 에우리우스의 말을 들었다.
그런 호진의 태도에 에우리우스는 조금은 편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비단 귀공뿐이 아닌 그 누구를 만나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을 걸세. 여신님이 모습을 감추신 것은 이미 꽤 오래된 일이니까.”
호진은 울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상기했다.
고대 신들의 태동과 인간들의 타락.
그것을 보다 못한 인간들의 주신(主神) 릴리의 과오.
그 결과 망가진 여신과 균형의 비틀림까지.
아마, 여신이 모습을 감춘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아직, 이쪽 세계에선 아는 사람이 없나?’
단순히 에우리우스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고,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일 수도 있다.
호진은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 채, 계속 들어보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교단과 성국의 고위관계자들은 이런 사실을 은폐했지만, 이젠 점점 숨기기 힘들어지는 실정이지. 그사이 제국과 성국의 대립은 점점 심화됐고, 성국은 제국과 단교를 선포했네.”
“그런 정세도 여신님을 만나는 데 방해가 될까요?”
“그렇고말고. 여신님의 성역은 릴리온 성국에 위치해 있으니까. 어차피 그분께서 나오지 않는 이상 영접할 방법은 없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면 그곳에 가는 것뿐이겠지. 한데 지금 성국은 제국에서 성국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 실라시온 협곡을 봉쇄했네.”
‘좋았어.’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슬쩍 주먹을 움켜쥐었다.
드디어 여신을 만나기 위한 단초를 얻었다.
제국을 통해 성국으로 가는 길이 막혔다는 점은 아쉬웠지만, 여기까지 들은 이상 다음 얘기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길이 있군요.”
“정확하네. 제국을 통하지 않고 그곳으로 가는 방법이 있지. 그런데 그게…… 결코 쉽지는 않을 걸세.”
에우리우스는 찜찜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대사막 시칸이 나오네. 사막을 중간쯤 가로질러 그대로 북쪽을 향하면 산맥 사이로 길이 하나 나오는데, 그게 바로 동부 왕국연합으로 이어지는 길이지. 그곳에서부터는 성국까지 금방이고.”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대사막 시칸. 그 광활한 땅을 가로지르는 데만 꼬박 한 달은 필요할 걸세. 그리고 자네 정도의 격을 지닌 존재에겐 반드시 녀석이 반응하겠지.”
호진은 에우리우스의 말에 움찔했다.
그가 격(格)이라는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꺼낸 탓이었다.
하지만 호진은 최대한 모르는 척 질문을 늘어놓았다.
“녀석이요?”
“그래. 시칸의 은둔자 라멜의 사도 ‘심연을 유영하는 자 샴.’ 그게 놈의 이름이네.”
이번엔 호진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구겨졌다.
“반응을 보니 들어본 적이 모양이구만.”
“잘 압니다.”
들어보기만 했을까, 본 적도 있다.
강화초지대교에 위치했던 피난 캠프를 한 번에 집어삼킨 거대한 괴물.
‘샴’을 본 뒤 한동안 잠조차 쉽게 들지 못했다.
자는 사이 놈에게 집어삼켜지기라도 할까 봐.
녀석은 호진이 신과 관련된 이들, 특히 사도라는 이름에 두려움을 느끼게 한 장본인이다.
“자네의 표정을 보아하니 놈의 위험함에 대해 더 떠들 필요는 없겠군. 만약 자네가 놈을 상대할 수 있게 된다면 여신님을 영접할 희미한 가능성을 얻게 될 걸세.”
에우리우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푸른 창이 눈앞에 일렁였다.
─띠링
「연계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여신에게 향하는 길」
「1─1. 라멜의 사도 ‘심연을 유영하는 자 샴’에 대한 정보 얻기.」
아무래도 에우리우스가 이야기해준 방법이 맞는 듯했다.
여신 본인이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울타의 도움으로 여신의 낙인을 떨쳐낸 후로, 시스템은 호진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전과 달리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고, 호진에게 도움이 되는 길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줬다.
자신을 이용하려던 찜찜한 느낌이 사라졌다고 할까.
어쨌든 지금의 시스템은 신뢰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다행인 건 ‘샴’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알아보는 게 퀘스트의 목표라는 점이었다.
애초에 샴은 지금 지구에 있을 텐데, 어쩌면 어렵지 않게 대사막을 통과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호진이 이것저것 생각하는 사이 에우리우스는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걸세.”
“걱정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래, 그럼 조심히 다녀오게나.”
에우리우스는 ‘차원 이동문’을 평범한 포탈이라고 알고 있었다.
속이기도 전에 본인이 착각해준 덕분에 핑계 댈 수고를 덜었다.
호진에 이어 용재와 도훈도 차례로 에우리우스와 인사를 나눈 후, ‘차원 이동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
차원 이동문을 지나는 순간 머릿속에 울리듯 에우리우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귀공의 신격(神格)은 가능한 숨기도록 하게나. 아무리 사자라 할지라도, 갓 태어난 새끼 사자는 하이에나에게 물려 죽기도 하는 법이라네.]
뭔가 눈치를 챈 걸까?
에우리우스의 의미심장한 말에 호진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봤으나, 번쩍이는 차원 이동문의 빛무리를 넘어, 손을 흔드는 에우리우스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
이번 차원문은 이전과 같이 끈적하고 기분 나쁜 감각은 없었다.
그저 찬란한 빛무리가 일렁이는가 싶더니, 평범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여기는…… 숲인가?”
“어? 거기네. 우리가 들어왔던 차원문 있던 곳.”
다행히 호진과 일행들은 들어왔던 곳과 같은 곳으로 걸어 나왔다.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오랜만에 온 것처럼 어색했다.
“흐음.”
숲의 습한 흙냄새와 나무 냄새가 코를 간질거렸다.
저쪽 차원에선 온종일 피와 내장, 시체 썩는 냄새를 맡았던지라, 이런 평범한 공기가 너무 달콤하게 느껴졌다.
“근데 쟤네 뭐하냐.”
호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멀리 떨어진 곳의 우거진 나무 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게? 아, 혹시 은폐 중인 건가?”
“설마. 저렇게 대놓고 기운을 흘리는데?”
“……은폐 중인 거 맞다. 단장과 네 감각이 너무 좋아진 것뿐이다.”
용재와 호진의 대화를 듣던 도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두 사람의 잣대를 충족하는 단원이 몇 명이나 될까.’
한동안 교육을 새로 해야 할 것이다.
도훈은 꽤나 고생하겠다 생각하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정찰조, 특히 감시단에서 통용되는 아군임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에 화답하듯 호진이 바라보던 나무 위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곤 잠시 뒤, 꽤 낯이 익은 얼굴들과 처음 보는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장님! 부단장! 그리고 용재 씨까지……!”
분명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이는 감시단의 일원 중 하나였다.
호진은 간신히 그의 이름을 떠올리곤 인사를 건넸다.
“아, 제훈 씨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다.”
“오랜만이에요!”
호진에 뒤이어 도훈과 용재까지 인사를 하자 제훈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물어왔다.
“혹시 그럼 일은 전부……?”
“예, 잘 마무리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요?”
“아, 단장님이 말씀대로 모두 캠프에 모여 있습니다.”
호진은 제훈의 말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호진이 미리 돌아왔다면 모를까, 퀘스트의 종료일인 오늘까지 호진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를 대비한 명령이었다.
제훈의 얼굴을 보아하니 마음고생이 심했던 듯했다.
‘하긴, 이렇게 이곳에서 정찰을 하는 것도 반쯤 목숨을 내놓고 한 것일 텐데.’
호진은 제훈의 용기를 칭찬하며 말을 돌렸다.
“뒤에 두 사람은 누굽니까?”
익숙치 않은 얼굴들이다.
확실한 건 호진이 떠나기 전까지 헌터나 감시단에 있던 인물들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호진은 잔뜩 경직된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 두 사람은 피난민들입니다. 지난 한 달간 캠프의 인원이 많이 늘었습니다.”
“그랬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네, 넵! 잘 부탁드흡…….”
호진의 인사에 두 사람은 대답을 하다 혀를 씹었다.
꽤나 긴장한 모양.
그러면서도 호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들의 이런 모습에 호진은 부담감을 느끼며 슬쩍 이동하기 시작했다.
“형, 쟤네 표정 좀 봐. 뭐 거의 아이돌 바라보는 얼굴인데?”
“내가 보기엔 군대에서 이등병들이 말년병장을 보는 표정 같군.”
“……왜 저러는 겁니까?”
호진은 심히 당혹스러웠다.
간신히 왕의 위치에서 벗어나 이쪽 세계로 넘어왔는데, 처음 보는, 심지어 자신과 나이 차이도 거의 나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다.
딱히 질문을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호진의 말을 들을 제훈은 웃으며 대답했다.
“단장님은 전설이니까요. 새로 모여드는 피난민들은 모두 캠프에 대한 이야기보다 단장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옵니다.”
“어떤 이야기요?”
용재가 궁금한 듯 묻자 제훈은 신나서 말을 이었다.
“그야 단신으로 수만 마리의 괴물들과 싸워 이겼다든가, 검을 한번 휘둘러 호수를 갈랐다든가. 몬스터를 길들여 타고 다닌다든가. 또…….”
“됐습니다. 그만하시죠.”
“앗, 넵!”
제훈은 급히 입을 닫으며 호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제훈을 지켜보던 용재는 속삭이듯 말했다.
“아, 괜찮아요. 호진이 형, 부끄러워서 저러는 거예요.”
“예?”
“뺨 긁는 거 보이죠? 얼굴은 낯빛 하나 안 바뀌는데 부끄러우면 저래요.”
“아……!”
제훈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랄까 좋아하던 아이돌의 인간적인 모습을 본 기분이라고 할까.
괜히 호진에 대한 호감도가 더 오르는 기분이었다.
─띠링
「플레이어의 격이 미약하게 상승합니다.」
호진은 뒤통수가 뚫릴 것 같은 시선을 느끼며, 들려도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캠프를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가운 캠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못 알아보겠는데?”
호진이 바뀐 캠프의 모습에 놀라며 중얼거렸다.
거대한 해자에는 물이 가득 차 있고, 망루와 성문도 제대로 돌로 만들어져 있다.
“에이, 그래도 왕성이랑 너무 비교되는데.”
“그거랑 비교하면 안 되지.”
용재가 중얼거리자, 호진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조금 더 가까워지자 성벽 위로 긴장한 채 이쪽을 주시 중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찰병들이 무전으로 전달했을 텐데도 신중한 모습이다.
가장 높게 솟은 망루 위.
익숙한 얼굴이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예은이다.
애초에 그녀 말고는 저 거리에서 호진과 일행들을 알아보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호진은 피식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제야 아리송한 표정을 짓던,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예은이 옆의 사람에게 황급히 뭔가 전달하자 잠시 후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길게 한 번 울리는 나팔 소리.
호진들의 귀환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캠프의 안쪽은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도개교가 내려오고 성벽 위로 사람들이 너도나도 고개를 내밀었다.
하나같이 반가운 얼굴들뿐이다.
그 면면을 보고 있자니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호진은 용재와 눈을 마주쳤다.
용재의 눈가가 붉었다.
지금 자신도 용재와 같은 얼굴일까.
민망함도 잠시, 둘은 그냥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