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귀환 (1)
“형, 킵(Keep)은 정리가 끝났어.”
“예배당과 성 외곽도 정리가 됐다.”
용재와 도훈은 왕좌에 앉은 호진에게 보고했다.
“수고하셨어요.”
호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그레이트 홀에 안팎으로 모인 사람들을 훑었다.
그레이트 홀을 중심으로 왕성을 정리하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호진이 상처를 회복하는 동안 두 사람과 에우리우스가 성을 돌아다니며 남은 적을 해치우고, 사람들을 구조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띠링
「시리온 공국 실질적 지배 48%」
「공국의 시민 653/3402」
「수복한 영토 8%」
푸른 창에 머무르던 호진의 시선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영역 지배율과 수복 영토율.
성역을 선포하는데 필요한 기준이다.
강화도는 이미 지배율이 100%가 넘기 때문에 곧바로 성역을 선포했다.
반면, 공국도 내가 지배 중이라 인식했는지, 부족한 조건들이 창에 표시됐다.
왕성을 정리한 덕분에 영토와 시민의 수가 늘어 지배율은 30%대에서 48%까지 올라왔다.
‘사실, 여기까지 성역을 선포할 이유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이곳의 왕이 되어버린 듯했으니.
그게 아니더라도 이곳의 사람들을 이대로 방치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찌 됐든 그들도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뭐, 이쪽 세계에 거점이 하나쯤 있어도 나쁘지 않지.’
어깨를 으쓱한 호진은 용재와 도훈을 보며 말했다.
“한 시간쯤 있다가 돌아갈 거니까. 좀 쉬어둬.”
“됐어, 안 힘들어. 별로 센 놈들도 없더라. 에우리우스 님이랑 피난민들이나 도울래.”
“나도 괜찮다. 혹시 모르니 주변 정찰 좀 하고 오도록 하지.”
용재와 도훈이 고개를 젓자, 호진은 민망함에 뺨을 긁었다.
“둘이 그러면 내가 뭐가 됩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하는 두 사람.
“형은 지금 회복하는 게 일이야. 가만히 있어.”
“왕은 옥체나 보존해라.”
말을 끝낸 두 사람은 홱 하고 뒤돌아 나갔다.
그런 그들을 보며 호진은 엷게 웃음을 지었다.
참 좋은 사람들이다.
무슨 복으로 저런 사람들과 만났는지.
호진은 잠시 자신의 상처들을 살폈다.
구멍이 뚫렸던 발바닥도, 내장이 보일 때까지 찢어진 옆구리도 이젠 거의 다 회복했다.
“상태창.”
─띠링
「상태창」
「이호진」
「나이: 24」
「레벨:47」
「근력:60 민첩:63 지구력:30」
「스킬: 감시자의 눈 LV.1 절(切)베기 LV.4 파(波)베기 LV.1 투구 가르기 LV.9 체력 회복 LV.10 확신 LV.2 검술의 묘리 LV.1 검의 정수 LV.1 정신 내성 LV.7 초감각 LV.6 출혈내성 LV.10 화염내성 LV.6 중독내성 LV.6 냉기내성 LV.5 중급 기(氣) 검술 LV.2 투검 LV.4 기승전투 LV.4 파마의 검식 목엽참(木葉斬) LV.4, 이화접목(移花接木) LV.2 차원 이동문 LV.1」
「직업: 검의 교단 광신도(Fanatic)」
「가호: 감시하는 자 울타의 가호, 여신 릴리의 가호」
「칭호: 패왕(覇王)의 길을 걷는 자」
「잔여 포인트: 12」
이쪽 세계로 넘어온 지도 한 달, 그간 얻은 게 너무나 많았다.
우선 기를 능숙하게 다를 수 있게 됐다.
나한심법을 익혀 기의 절대값을 늘릴 수 있게 된 것도 큰 수확 중 하나다.
그 외에도 내성 관련 스킬들이 크게 올랐다.
이 또한 심법을 운용한 덕이 컸다.
구결에 적힌 내용 때문인지 심법을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내성 숙련도가 올랐으니까.
숙련도를 위해 자해도 종종 하기는 했지만…… 에우리우스 눈치를 보느라 티 나게 하진 못했다.
그게 아니었으면 이미 화염내성은 LV.10을 찍었을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수많은 실전을 통해 검술의 깊이 또한 한층 더 깊어졌다.
얻은 스킬은 이화접목뿐이지만 다양한 묘리들을 조금씩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에우리우스가 얼마나 강한지는 아직도 확신이 안 들지만, 그가 보여준 검의 깊이는 알면 알수록 심오했다.
‘강화도 쪽이 정리되는 대로 다시 돌아와 검을 배워야지.’
‘차원 이동문’ 스킬도 얻었다.
이번 퀘스트를 깨고 얻은 보상이었는데, 스킬북 형태로 들어와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신성력을 사용하여 본인이 한 번이라도 갔던 곳이라면 현재 위치와 연결이 가능한 차원문을 설치하는 기술이었다.
한번 만들어 놓으면 호진이 철거할 때까지 반영구적이라 편리했다.
다만 만들 때 신성력, 즉 신격이 꽤 많이 소모됐다.
그래서 체력 회복도 할 겸, 신성력을 모으고 있었다.
레벨 때문인지 설치 가능한 차원문의 개수는 한 개뿐이지만, 그거로도 충분했다.
‘차원 이동문’ 외에도 보상이 하나 더 있었다.
굴라를 잡고 얻은 보상인 왕의 옥새였다.
「왕의 옥새」
「종류: 아티팩트」
「정보: 왕가의 정통성을 증명하며, 시리온 국가 한정 절대적인 명령권을 지닌다. 추가적으로 착용자의 위엄을 증폭한다.」
지니고 있기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에 존경심이 담긴다고 해야 할까.
호진은 관심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담스러워서 싫었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사실 정보에서 나오는 효과가 전부였다면 그냥 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기대되는 부분들이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우선은 그 모양.
어디서 봤다 싶었는데, 왕가의 묘역에 있던 육망성과 흡사했다.
어쩌면 이게 열쇠일지도 몰랐다.
지금 당장은 못 가지만, 돌아오게 되면 가장 먼저 확인해봐야 할 것 중 하나였다.
그리고 위엄을 증폭한다는 것.
이것이 칭호의 효과와 연결됐다.
「패왕(覇王)의 길을 걷는 자」
「정보: 다른 지배자들의 영토를 공격할 때 모든 공격력, 지구력 보너스. 휘하 병력의 사기 증가, 중립 및 적을 상대로 ‘위엄’ 효과 일시적으로 사용 가능.」
다른 정보들이야 다 대충 이해가 가능한데, ‘위엄’의 효과만큼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증폭시켜준다니 소중하게 지니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근데 내가 뭘 했다고 패왕이냐.’
누가 보면 내가 전쟁이라도 일으킨 줄 알겠다.
강화도에서는 멋대로 자리를 깐 리자드맨들을 처치했을 뿐이고, 이곳에선 미쳐버린 공왕을 쓰러뜨렸을 뿐인데.
뭔가 억울했다.
“귀공, 표정이 왜 그렇소?”
생각을 정리하던 그때, 이쪽을 힐끔 바라본 에우리우스가 큰 소리로 물었다.
“……제 표정이 어떻습니까?”
“돈을 빌려주고 욕을 얻어먹은 사람 같군.”
에우리우스의 말에 피난민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호진을 따라다니던 세 사람의 태도 덕분에 호진을 대하는 시민들의 반응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이건 분명 좋은 일이었다.
“그래도 내가 패왕(覇王)이랑은 거리가 멀지 않나?”
호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가 웃는 것을 보고 시민들도 한층 더 밝아진 모습으로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던 중, 한 가족이 호진의 앞으로 나왔다.
“새로운 주군을 뵙습니다.”
한쪽 팔이 없는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청하자, 그의 아내와 아이도 뒤따라 인사를 해왔다.
주군이라.
숨이 턱 막히는 칭호였지만 호진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반갑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와 가족들의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진은 남자의 모습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낯이 익었다.
‘아.’
호진이 홀에 들어설 때 굴라에게 붙들려 있던 남자였다.
“남편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는 엄마를 따라 아이도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해왔다.
“됐습니다. 제가 더 빨리 왔어야 하는데, 미안합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살펴주셔서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제발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전하의 백성이옵니다.”
너무 안절부절못해서 미안하긴 했지만, 초면인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 것은 호진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게 편해서. 노력하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냥 편하게 하소서.”
남자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황송해하자, 호진은 급히 그를 말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의 아내와 아이는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호진이 둘에게 시선을 돌리자 남자의 아내가 고개를 재차 숙이며 말을 이었다.
“저희 공국을 잘 부탁드립니다.”
“……?”
저희 공국이라니…….
마치 공국을 대표하는 듯한 그녀의 말에 호진이 의아해하기도 잠시 그녀의 입에서 말이 이어졌다.
“부족하지만, 전(前)왕의 먼 사촌으로 왕가의 피를 잇고 있습니다. 남편은 공국의 자작 작위를 지녔고요.”
“아. 이런……. 이거 어찌 말씀드려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의도한 적은 없지만, 호진은 명백한 왕위 찬탈자다.
그런 그의 앞에 왕가의 혈통이 나타나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호진의 이런 분위기를 읽은 그녀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건네 왔다.
“그리 당황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말 그대로 먼 사촌으로 전(前)왕과는 접점이 거의 없었던 데다가, 망국의 왕 같은 부담스러운 자리는 원치도 않습니다. 저와 제 남편은 전하께 그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무엇이든 하명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녀의 말을 듣던 호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구심점.
그녀와 그녀의 아이는 호진의 정통성을 위협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이렇게 순종하는 모습을 취한다면 오히려 정통성을 더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어차피 호진은 시리온 공국에 오래 머무를 수 없다.
그렇다면 호진이 부재하는 동안 이곳을 대신 관리할 관리자가 필요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라면 좋은 구심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부탁이 있습니다.”
호진은 그녀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진 뒤 이들보다 더 적합한 대리인은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호진의 제안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지만, 명령을 내리자 어쩔 수 없이 순응했다.
부담스러운 자리는 원하지 않는다는 사람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또한 호진은 예언자 노파를 불러 그녀를 자신의 대리자로 삼았다.
에우리우스의 말대로 예언자의 말이 가진 힘은 대단했다.
어렵지 않게 다른 생존자들은 그녀를 호진의 대리자로 인정했다.
그리고.
어느새 시간은 흘러 어느새 ‘차원 이동문’을 사용할 만큼 신격이 회복됐다.
“이젠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호진은 시간에 맞춰 돌아온 용재와 도훈과 함께 에우리우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에우리우스가 머뭇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