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얼굴 없는 자 (5)
신격(神格).
짙은 절망 속에서 찾아낸 한 줄기의 빛과 같은 희망.
그 기운이 호진의 안에서 조용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느껴진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다루느냐인데…….
호진이 고민하는 사이에도 굴라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캉 카강 캉
이제 막는 것조차 쉽지 않다.
열 번의 공방이 오가면 두세 번은 호진의 몸에 상처를 남겼다.
이미 팔다리는 피가 흘러 축축하게 젖은 지 오래였다.
폭풍처럼 공격을 몰아치던 녀석이 문득 공격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나았다. 팔.”
굴라는 자신의 왼팔을 내려다보며 손을 쥐었다 폈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호진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먹는다. 먹이.”
녀석은 트라이던트를 양손으로 쥐고 자세를 취했다.
아마도 리자드맨이 지닌 기술 중 하나일 터다.
호진의 피부가 굴라가 쏘아 내는 살기에 따끔거렸다.
마무리를 지으려는 모양.
“이거 어쩌지. 아직 신격을 쓰는 법은 감도 안 오는데…….”
그때 호진의 중얼거림을 들은 에우리우스가 소리쳤다.
“귀공! 신의 힘을 빌릴 땐 그 신의 권능과 본질에 대해 떠올리게나.”
권능? 본질?
호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자신이 지금 사용하려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호진, 자신의 격이다.
‘내 권능은 뭐고 본질은 또 뭔데?’
호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을 바라봤다.
검(劍).
예리하게 빛나는 칼의 형상이 한눈에 담긴다.
그는 검이 지닌 아름다움에 홀려 취미로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곤 깨달았다.
게이트 이후에 종종 느낄 수 있었던 감각.
그것은 검을 들고는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었다.
창보다는 짧다.
망치보다는 가볍다.
활보다는 느리다.
검은 최강이라 불리기에 적합한 무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검(劍)은…….
─띠링
「검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이 발동합니다.」
호진의 심상 속 권능은 한 자루 검의 형상을 취했다.
그 검은 푸른빛을 은은하게 흩뿌리며 고고히 우뚝 섰다.
아직은 날이 뭉툭하고 조잡하지만, 틀림없는 검이었다.
호진은 천천히 심상 속의 검을 움켜쥐었다.
순간 온몸에 전능감이 흘렀다.
베는 것.
그것에 한하여 호진이 할 수 없는 것은 없었다.
호진은 잠에서 깨어나듯 눈을 떴다.
그리고 준비를 마친 듯 굴라가 호진을 향해 창을 내지르고 있었다.
‘세상이…… 무채색으로 보인다.’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다른 이들의 모습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신격의 힘일까.
호진은 손에 쥔 검을 힐끗 바라봤다.
예리하게 빛나던 롱소드는 온데간데없고 뭉툭한 검 한 자루가 푸른빛을 흘리고 있었다.
예상한 바는 아니지만 당황스럽진 않았다.
지금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이 나뭇가지라 하여도 두려울 것은 없었다.
호진은 그저 검을 위에서 아래로, 가볍게 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림처럼 멈추었던 세계가 반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틈을 기점으로 세계는 서서히 색을 되찾았다.
돌아온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이상을 느낀 것은 다름 아닌 굴라였다.
“……?”
분명 눈앞의 먹이를 꿰뚫고 먹는 일만 남았을 텐데.
자신과 먹이와의 거리가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눈을 뒤룩거리기도 잠시.
─쩌억
굴라의 몸이 세로로 쪼개졌다.
호신강기도, 리자드맨의 단단한 비늘도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았다.
굴라는 점멸하는 시야 속에서 어렴풋이 깨달았다.
포식자가 뒤바뀌었다는 것을.
아니, 처음부터 포식자는 녀석이었다는 것을.
굴라는 흐려지는 의식의 끝에서 끝없는 허기를 느끼며 죽음을 맞이했다.
“…….”
“…….”
홀에는 오직 정적만이 흘렀다.
움직이는 것은 오직 호진뿐이었다.
다시 유수처럼 흐르는 시간 속.
호진의 손에 들린 검은 뭉툭하고 평범한 롱소드였다.
‘이것이 나의 본질인가.’
호진이 이룬 신격(神格).
‘그리고 권능은 벤다는 행위 그 자체이고.’
어느새 온몸을 채웠던 전능감과 신격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텅 비어버린 우물일지라도 메마르진 않았다.
한 번 물이 차올랐던 우물은 사라지지 않고 그곳에 자리하며 천천히 기운을 회복하고 있었다.
호진이 만족스럽게 웃고 있자 하얀 가면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어떻게 한낱 필멸자의 몸으로, 한낱 검 따위로 신의 사도를 벨 수 있는 겁니까?”
그 질문에 녀석을 뚫어지라 응시하던 호진이 툭 하고 대답했다.
“검(劍)이니까.”
분명 부족한 것도 많지만…….
창보다 변화무쌍하다.
망치보다 빠르다.
활보다 연속적이다.
검은 강하다.
그리고 검을 든 자신도 강하다.
호진은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검은…… 검이기에 강하다는 것을.
─뿌드득
하얀 가면의 이 가는 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시선을 교차하기도 잠시 하얀 가면은 문뜩 탄식했다.
“……그렇군요. 당신은 어쩌면…….”
말끝을 흐린 녀석이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는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이젠 정말 위험해지셨습니다. 다음엔 꼭…… 데니토께 당신을 바치겠습니다.”
“너에게 다음이 있을까?”
호진이 검을 치켜들었다.
녀석도 흐릿하게 웃으며 단검 한 자루를 들어 올렸다.
“그걸로 되겠어? 차라리 아까 그 책을 들지 그래.”
“이거면 충분합니다. 그럼 다음에 뵙죠.”
여전히 목소리에 웃음기를 띈 녀석은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잠깐…….”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호진이 손을 뻗었지만, 녀석은 순식간에 단검을 자신의 목에 쑤셔 박았다.
사방으로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치며 하얀 가면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젠장.”
호진이 급히 달려가 녀석을 살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건 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썩은 지 오래된 시체뿐이었다.
“분신…… 혹은 인형 같은 건가.”
아난타가 대족장에게 빙의했던 것과 유사해 보였다.
호진은 가볍게 혀를 차고는 몸을 돌려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호진은 자신을 바라보는 수백 명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호진을 바라보는 사람들.
한참이 지나도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정적이 흘렀다.
‘……음.’
호진은 짧게 침을 삼켰다.
‘뭔가 말해야 하나?’
식은땀이 등을 축축하게 적셔왔다.
이렇게 주목받는 것은 정말 자신과 맞지 않았다.
안심하라고 할까? 아니면…….
“오오…… 신이시여. 우리들의 새로운 왕이시여.”
호진이 고민하던 그때 앞으로 나온 한 노파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눈을 천으로 가린 노파의 시선은 정확히 호진을 향했다.
“저희를 가엾게 여겨 구원하소서.”
수백의 사람들이 호진을 향해 일제히 몸을 숙이고 손을 모았다.
─띠링
「시리온 왕가의 정통성을 잇습니다.」
「새로운 교도들이 합류합니다.」
「플레이어의 격이 큰 폭으로 상승합니다.」
‘무슨?’
호진이 당황하기도 잠시 시스템 창은 쉴 새 없이 새로운 창을 띄워댔다.
─띠링
「불사의 신의 사도 후보, 굴라를 처리했습니다.」
「퀘스트 ‘성역 선포’를 성공적으로 처리했습니다.」
「실질적으로 지배 중인 지역에 성역이 선포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불가능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이 가산됩니다.」
「퀘스트 보상이 인벤토리에 수납되었습니다.」
「보상이 인벤토리에 수납되었습니다.」
「칭호 ‘패왕(覇王)의 길을 걷는 자’을 획득합니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확신 LV1 → 확신 LV2」
‘정신이 하나도 없네.’
호진은 눈앞에 보이는 창들을 모두 치워버렸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당장 급한 일들을 모두 해결했다는 것.
그 사실을 인지하자, 무릎에 힘이 풀리며 비틀거렸다.
어느새 다가온 용재가 호진을 지탱했다.
“수고했어, 형.”
“아, 고맙다.”
용재가 호진을 옆에 있던 왕좌에 앉히려 하자 호진이 기겁했다.
“야야. 딱 봐도 거긴 앉으면 안 돼. 그냥 바닥에 앉을래.”
“그런가? 편해 보이는데.”
호진이 고개를 저으려던 찰나, 에우리우스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으하하하. 그냥 앉게나. 귀공.”
“예? 아니, 여기 왕좌 아닙니까?”
호진이 이 세계 사람은 아니라지만, 왕좌가 힘들다고 앉을 곳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맞네. 한데 방금 귀공은 시리온 공국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않았나.”
“……제가요?”
미간을 좁히던 호진은 문득 빠르게 넘긴 상태창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아, 분명 시리온 왕가의 정통성 어쩌고 하던 내용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설마.
문장의 의미를 곱씹던 호진의 눈이 커지기도 잠시, 에우리우스가 마저 대답했다.
“저 노파는 공국의 예언자이자 성녀. 왕가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인물이네. 공국이 제정일치 국가다 보니 왕 다음으로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지.”
잠시 말을 끊었던 에우리우스가 호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귀공은 공국의 왕이 된 걸세.”
***
“형, 새로 받은 옷도 걸레짝이 됐네.”
“내가 일부러 그랬냐.”
“이쯤 되면 취향 아니야? 나한테만 말해봐. 존중해줄게.”
“……그냥 내가 하는 말을 존중해주지 그러냐.”
“물론입니다. 지고하신 국왕 폐하.”
“너 일로 와, 이 자식아.”
“아 뭘 장난친 것 가지고……. 어라, 형 옆구리 상처 또 터졌다.”
“아, 피 겁나 쏟아지네. 붕대 줘, 붕대.”
“아까 사람들 다 나눠줬는데?”
“야, 내 거 남겨두라고 아까 말했잖아. 아, 어지러워…….”
“형? 형! 정신 차려!”
에우리우스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동생과 실없이 웃고 떠드는 남자.
‘아…….’
방금 기절했으니까, 웃고 떠들던 남자라고 해야 할까.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에우리우스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에우리우스는 그가 100년에 한 번 나올 법한 무재(武才)를 타고난 인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방금 호진이 보여줬던 것은 무재로도, 신실한 태도로도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곳의 몇 명이나 그가 보여준 힘의 진실을 파악했을까.
에우리우스는 확신했다.
예언자라 불리는 노파조차도 그 힘의 편린만을 보았을 뿐이다.
‘하긴 누가 본다고 믿을 수나 있을까?’
제국의 교황을 직접 본 적이 있는 에우리우스만이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보여준 것은 고유한 신위(神威).
눈앞의 남자는 평범한 신도도 신의 대리자도 아닌, ‘신’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정말 다양한 각국의 비사와 전설에나 나올 법한 세계의 비밀들까지.
이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호진과 함께할수록 믿을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그는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하지만…….
‘왠지 괜찮을 것 같군.’
이유는 없다.
그냥 그런 기분일 뿐.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당황스러웠지만,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닐 터다.
에우리우스는 그저 엷게 웃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