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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90화 (90/241)

90화. 얼굴 없는 자 (4)

‘어디지?’

호진은 굴라의 기척을 느끼기 위해 기감을 확대했다.

이미 홀의 내부는 피로 도배를 한 듯 시뻘겠다.

천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곳에 피가 질척거리고 있었다.

즉, 위를 제외하면 언제 어디서 공격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슥

호진은 천천히 피가 최대한 피가 적게 튄 곳을 찾아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홀에는 고요한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호진은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녀석은 리자드맨의 능력마저 흡수해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팔 한쪽을 잘라놓기는 했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꾸만 들었다.

‘어디서 기습해 올까?’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할 필요가 없었다.

녀석은 기습을 하지 않았으니까.

─스륵

굴라는 호진과 약간 떨어진, 피 칠갑이 된 기둥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까 호진을 무시할 때와는 달리, 명백하게 호진을 인지하고 있었다.

마주 노려보던 호진은 문뜩 이질감을 깨달았다.

녀석의 잘린 절단면이 회복을 넘어 재생 중이라는 것을.

“……공왕의 능력인가.”

아니, 어쩌면 이전에 먹었다는 다른 사람의 능력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시간을 끌수록 녀석의 팔은 점점 회복할 거라는 사실이다.

호진이 검을 바로잡던 그 순간이었다.

녀석이 돌연 손을 들어 올리더니 호진을 가리키며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먹이.”

“…….”

싸늘한 적막이 흘렀다.

호진은 녀석의 입에서 사람의 말이 흘러나왔다는 사실에 한 번.

그리고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

“쯧.”

호진은 혀를 찼다.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녀석이 자신을 무시했던 이유를 말이다.

“내가 먹이라고…….”

먹잇감이었으니까.

위협이 될 만한 적이 아니라, 그저 아무 때나 먹어도 되는 밥이었으니까.

‘그래서 기습조차 하지 않고 나타난 건가.’

─으득

호진은 이를 악물었다.

오만하다.

하지만 호진은 한편으로 그 오만함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녀석의 잠재력은 그러고도 남았으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이곳에서 죽여야 한다.

“먹이.”

녀석이 재차 중얼거렸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호진은 그저 천천히 호흡하며 기를 최대로 운용했다.

들고 있던 롱소드에 검기가 어렸다.

‘노릴 곳은 녀석의 좌상단.’

아직 팔꿈치 아래로는 재생하지 못한 왼쪽 팔로는 방어가 어려울 터였다.

호진이 자리를 박차자 녀석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별다른 이동 기술이 있는 건 아니지만, 폭풍과도 같은 기세였다.

민첩이 60을 넘은 이후 몸이 바람처럼 가볍고 빨라졌다.

처음부터 노림수를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호진은 놈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검을 비스듬히 내리쳤다.

놈은 태연하게 오른손을 휘둘러 검을 쳐냈지만, 이미 예상한 바다.

호진은 멈추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의 궤도를 바꿔 휘둘렀다.

‘즈버크하우(Zwerchhauw).’

수평으로 휘둘러진 검은 오른쪽에서 순식간에 왼쪽 목에 드리워져 있었다.

‘됐다.’

이제는 손을 들어 올려 막기는 너무 늦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 순간.

─깡!

검이 힘없이 튀겨져 나왔다.

초록색의 일렁이는 막과 목에 뒤덮인 비늘 모양.

기사의 호신강기와 리자드맨의 비늘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흠집도 나지 않는 건 조금 너무한데.’

호진은 쓰게 웃으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카강 캉!

놈의 팔과 검이 교차하며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속도는 미묘하게 놈이 더 빨랐지만, 다행히 한쪽 손이 없는 탓에 방어가 허술했다.

‘가능하겠네.’

이 정도 차이면 해볼 만했다.

호진은 이번엔 몸에 두르고 있던 기를 검에 쏟아부었다.

─슥 삭 서걱

아까와 달리 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튀었다.

굴라의 방어가 뚫린 것이다.

‘좋아. 이대로만 하면…….’

호진인 엷은 미소를 띠던 그 순간이었다.

“멍청이.”

녀석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발을 굴렀다.

─푸욱

“어?”

발이 후끈했다.

자신도 모르게 돌아간 시선에 비친 것은 붉은색의 얇은 쇠꼬챙이.

딱 양꼬치의 꼬챙이만 한 길이의 말뚝이 호진의 발등을 관통해 솟아올라 있었다.

그제야 아찔한 통증이 척추를 따라 머리로 전달되었다.

“끄윽.”

눈에서 불이 튀고 입에선 비명이 새어 나왔다.

통증만큼은 아무리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나마 전투로 인해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몸에 돌고 있는 덕에 통증이 완화됐다.

아니었다면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을 터.

호진은 발에 통증을 잊기 위해 혀를 짓씹으며 계속 검을 휘둘렀다.

아프다고 멈추는 순간이 죽는 순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배고파, 먹이. 끈질겨.”

쓰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을 맞받아치자 녀석의 얼굴이 처음으로 찡그려졌다.

굴라가 재차 발을 굴렀다.

또다시 바닥에서 쇠꼬챙이가 올라왔다.

─카강

하지만 쇠꼬챙이는 호진의 발을 뚫지 못하고 옆으로 비껴서 솟아올랐다.

호진이 발에 기를 둘렀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이 피로 만들어진 쇠꼬챙이가 대단한 위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아까 전에도 기를 전부 검에 쏟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굴라는 이걸 노리고 자신의 빈틈을 보여줬고, 호진은 그것에 끔뻑 넘어갔던 것.

‘쯧.’

속이 쓰릴 정도로 자신의 안일함을 후회했지만 그건 그거고.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굴라는 점점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배고파, 배고파아. 배고파아아악!”

녀석의 투정은 점점 짜증으로, 짜증에서 분노로 이어졌다.

그러더니 돌연 멈칫한 녀석은 호진의 뒤쪽에 놓인 시체에 홀린 듯 눈을 고정했다.

─파밧

굴라는 호진과의 전투는 까맣게 잊은 채,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곧장 시체를 토막 내어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호진은 황당해하기도 잠시, 입에선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살았다.’

뼈를 부수고 살을 씹어 먹는 역겨운 놈의 모습이 순간 기꺼웠다.

잠깐이지만 유예기간이 생긴 거다.

호진은 재빨리 발등 위로 솟아난 쇠꼬챙이의 윗부분을 검으로 잘라냈다.

그러곤 발을 빠르게 들어 올렸다.

“크윽.”

통증에 근육이 오그라들어 종아리에 쥐가 났다.

아까 혀를 씹은 탓에 입안에는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통증 때문인지 아까부터 숨을 쉴 때 단내가 난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등을 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우득 아닥 오도독 까득 찹찹

눈앞의 녀석이 벌써 식사를 마치고 다음 먹이를 찾아 눈을 뒤룩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운이 좋아 바닥에 떨어진 시체를 주워 먹었지만, 만약 용재나 도훈, 다른 사람들이 녀석의 눈에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그땐 늦는다.

“저걸 어쩌지.”

호진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녀석과 시선이 교차했다.

─우뚝

먹는 것을 멈춘 녀석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먹이. 맛있는 먹이.”

녀석이 호진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나 먹으면 지지야, 자식아. 한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굴라는 여전히 호진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녀석은 그대로 피 웅덩이에 위에서 발을 굴렀다.

그러자 피가 천천히 바닥에서 쇠꼬챙이 모양으로 솟아오르더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그 크기와 형태를 바꿨다.

‘저건……?’

호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3개의 창날이 달린 무기, 트라이던트.

리자드맨이 다루던 무기가 굴라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하하. 미치겠네.”

이미 녀석이 피를 다루는 능력은 공왕을 한참 뛰어넘었다.

실시간으로 능력이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놈의 호신강기와 비늘이 뚫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를 것이다.

‘그리고…….’

호진은 어느새 팔꿈치 아래까지 자란 녀석의 왼팔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시간이 없었다.

놈은 점점 강해지고 자신은 점점 지쳐간다.

이대로 시간을 끄는 것은 무의미했다.

호진은 재빠르게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검토했다.

‘늪지대의 마법을 쓸까? 바실리스크의 독니는?’

안 된다.

마땅히 떠오르는 수단이 없었다.

‘뭔가…… 뭔가 없을까?’

그 순간, 호진은 문뜩 어떤 가능성의 편린을 찾았다.

항상 호진이 지니고 있던 것. 계속 쌓아왔지만 정작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은 없는 힘.

신격(神格).

막연하기만 하던 그것이, 얼마 전 내공심법을 운용할 때 어렴풋이 느껴졌다.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아 내버려 뒀지만, 지금 호진에게 반전의 수가 있다면 오직 이것뿐이리라.

호진은 그 감각을 떠올리기 위해 천천히 심법의 구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만약 어떤 이가 나의 이름을 듣고 귀의한다면, 물에 떠내려가지 않으며, 불에도 타지 않고, 독으로 중독되지 않으며,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에…… 크윽.”

당연하지만 굴라는 구결을 외는 호진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호진은 날카롭게 찔러오는 트라이던트를 피해 물러났다.

구멍 뚫린 발을 타고 온몸을 태우는 듯한 통증이 번져나갔다.

하지만 호진은 구결을 멈추지 않았다.

“……게도 해를 입지 않으니 천수를 누리리라. 임종의 때가 다가오면 그 직전 아난타, 카인, 시스, 세쿤탈리. 샤카하, 이자리온, 얀, 릴리가 사람과 사람이 아닌 형상으로 나타나.”

─카강.

트라이던트와 호진의 검이 교차했다.

한쪽 팔로 휘두르던 굴라의 어색하기 짝이 없던 창술이 점차 예리해져 갔다.

그뿐만 아니라 점점 기교와 기술이 공격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스킬뿐만 아니라 생전의 기술까지 습득하는 것이다.

굴라가 내지른 트라이던트가 팔뚝에 깊은 상처를 내며 호진을 뒤로 밀어냈다.

아프긴 하지만 기회였다.

“설법하니, 다섯 가지의 가장 높은 진리를 깨우치어 죽음도 두렵지 않으리라.”

구결을 끝맺은 그 순간.

예의 그 기운이 가슴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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