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얼굴 없는 자 (3)
“더 물러나세요. 더.”
“호진이 형, 이거 언제까지 해?”
도훈과 용재는 홀 안에 사람들을 보호하며 달려드는 시체들을 베어 넘겼다.
“말…… 걸지…… 말라고!”
호진의 입에선 이를 악문 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거대한 워해머를 든 기사와 힘겨루기를 하는 호진의 옆구리로 트라이던트가 미끄러지듯 찔러 들어왔다.
‘이화접목(移花接木)!’
워해머를 물 흐르듯 흘린 호진은 찔러오던 트라이던트를 한 손으로 잡아서 당겼다.
그리고 곧장 발에 기를 담아 트라이던트를 쥔 적을 걷어차 버렸다.
─쾅!
굉음이 울려 퍼졌지만, 리자드맨의 단단한 비늘을 뚫지는 못했다.
그사이 자세가 흐트러진 호진을 향해 시체들이 달려들었다.
이에 호진은 롱소드를 집어던져 가장 앞에 달려오던 놈에게 맞춘 후, 뒤로 물러나며 허리에 찬 낡은 도(刀)를 휘둘렀다.
─서걱
달려들던 시체들은 호진을 주위로 호(弧)를 그리며 우르르 쓰러졌다.
호진은 즉시 도를 다시 납검하고 롱소드를 회수했다.
‘생각보다 힘드네…….’
하얀 가면이 불러낸 불사의 신의 봉사자들.
대부분은 묘역에서 만날 법한 수준이었지만 그중 두 명이 유달리 강했다.
워해머를 쓰는 기사와, 트라이던트를 쓰는 리자드맨.
놀랍게도 빌헬름보다는 밑이지만 엄연히 절정(絶頂)의 경지에 다다른 강자들이었다.
‘맘만 먹으면 둘을 상대하는 것도 할 만은 한데, 문제는 사람들이군.’
호진은 홀에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을 힐끗 바라봤다.
어림잡아도 300명은 돼 보인다.
에우리우스와 용재, 그리고 도훈까지 분전하고 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적의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사람들을 지키며 싸우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끝이 보였다.
“다 했어. 좀만 버텨. 저 녀석, 왜인진 몰라도 더 이상 소환을 못 하고 있어.”
호진은 달려드는 적을 베며 소리쳤다.
하얀 가면의 주위에서 샘처럼 솟아나던 적들도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온 녀석들만 해치우면 된다는 말이었다.
“오, 간만에 좋은 소식이네!”
용재가 웃으며 황금 도끼를 휘두르자 달려들던 적들이 터져나갔다.
청랑을 타지 못한 도훈은 핸드건 대신 단검과 손도끼를 연신 휘두르며 적을 분쇄했다.
기를 쓰지 못하지만, 초감각을 얻은 만큼 전투력의 증가는 확실해 보였다.
“나쁜 소식도 있다. 저것, 방금 꿈틀거렸다. 시간이 없다.”
적의 목을 도끼와 검을 교차하며 비틀어 뜯어낸 도훈이 손도끼를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치열한 전투에서 떨어져,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하얀색 고치.
이를 확인한 호진은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그 고치에는 예의 괴물이 들어있었다.
공왕을 잡아먹은 녀석은 그대로 하얀 실을 토해내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실로 자신의 몸을 뒤덮어버렸다.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진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 신경 쓰였다.
아까까지는 괴물에게서 강력한 기가 느껴졌었다.
한데 지금 저 고치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고치가 기를 차단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 말은…….
‘갑자기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지.’
호진은 가볍게 혀를 차고, 재차 달려드는 기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호진이 기사의 워해머를 흘리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기사의 뒤에서 나타난 트라이던트가 호진의 검을 낚아챘다.
리자드맨이 트라이던트의 홈을 이용해 검을 단단히 옭아맨 것이었다.
이에 호진은 검을 놓고 바닥을 굴러 워해머를 피해냈다.
‘젠장.’
뻔하지만 대응하기가 어려운 조합이었다.
호진은 바닥을 구르면서도 곧장 단검을 뽑아 기사를 향해 휘둘렀다.
최소한 발목의 힘줄만 끊어 놔도 각자 상대할 수 있을 터.
─깡!
단검은 기사에게 닿기도 전에 불꽃을 튀기며 튕겨 나갔다.
반탄력에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였다.
기사가 주위에 두르고 있는 초록색의 막 때문이었다.
‘……무협지에 나오는 호신강기 같은 기술인가?’
공격에 실패한 호진은 재빨리 두 녀석에게서 거리를 벌리려 했다.
곱게 놓아 줄 생각은 없었는지, 리자드맨이 호진을 향해 트라이던트를 휘둘렀다.
‘빠르지만 막으면 그만…… 어?’
일직선으로 날아들던 트라이던트가 일렁이더니 궤도가 바뀌었다.
마치 신기루처럼.
호진은 간신히 단검을 휘둘러 트라이던트를 쳐냈다.
겨우 직격은 면했지만, 대신 팔뚝에 꽤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것도 분명 기를 활용한 기술일 것이다.
‘내가 쓸 때는 좋더니, 적이 쓰니까 번거롭기 짝이 없네.’
기를 사용하는 자들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기를 활용하다 보니, 어떤 기술인지 모르면 마술에 당하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제 대충 너희 능력이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호진은 피식 웃으며 바닥에 굴러다니던 공왕이 떨어트린 검을 집어 들었다.
***
실력의 차이는 명확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리자드맨과 기사는 넝마가 되었다.
팔다리가 하나씩 사라진 녀석들.
이젠 정말 마무리만 남은 단계였다.
간신히 서 있는 녀석들을 향해 걸어가던 그 순간, 호진은 강렬한 이질감을 느꼈다.
고요.
마치 한없이 깊은 심해에 빠진 것 같은 중압감과 적막에 소름이 돋았다.
─찌직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호진이 고개를 돌리자 하얀 고치를 찢고 나오는 하얀 손이 보였다.
그리고 고치의 벌어진 틈에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도대체 무슨…….’
기(氣)의 총량만 따지면 최소 호진의 10배는 넘을 것 같았다.
상대할 만한 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와 도망이 무슨 소용일까. 호진은 숨도 쉬지 못한 채 고치를 응시했다.
─쩌적
곧이어 고치가 마저 찢어지고, 안에서 한 청년이 걸어 나왔다.
곱상한 체형과 하얀 피부.
다만 한 가지 이질적인 모습.
그 눈만은 곤충의 겹눈을 하고 있었다.
녀석은 눈이 부신 듯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멍하니 섰다.
적막을 깬 것은 다름 아닌 하얀 가면이었다.
“어떠십니까? 저의 걸작이.”
하얀 가면은 홀린 듯 그 청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불사의 신 데니토께서 가라사대, ‘필멸자여 내게 기대어 주어진 죽음의 속박을 벗을지어다.’라 하셨습니다. 제가 그분의 이름 아래 수많은 이들을 구원하려 나섰습니다.”
“……학살을 잘못 말한 게 아니고?”
호진은 여전히 고치에서 나온 괴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대답했다.
그러자 하얀 가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데니토시여, 당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필멸자를 용서하소서.”
기도를 한 녀석은 한탄을 쏟아냈다.
“당신은 하픈덤에서 만들던 ‘이어붙인 왕’이 허무하게 죽고 제가 얼마나 슬펐던지 모를 겁니다. 몇 시간이면 신의 레플리카가 탄생할 수 있었는데……. 이번엔 성공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름다운 자태를.”
청년은 여전히 멍하니 있었다.
호진은 이때다 싶어 재빠르게 ‘감시자의 눈’을 사용했다.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을 터.
─띠링
「불사의 신의 사도 후보」
「탐(貪)/ Gula」
「종족: 언데드」
「특징: ■■?」
‘사도 후보?’
호진은 눈이 커졌다.
들어본 적이 있다.
아마 리자드맨 대족장도 사도 후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진짜 사도라면 모를까, 어쩌면 해볼 만할지도 모르겠다.
호진의 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하얀 가면은 여전히 말을 주절거리고 있었다.
“정말…… 이 녀석 하나 만드는 데 든 수고를 당신이 아십니까? 일반인은 세지도 않았지만 최소 만 단위, 양질의 병사들도 일천이 들었습니다. 절정에 도달한 녀석들도 둘이나 갈아 넣었고요. 아, 공왕까지 합하면 세 명이군요.”
‘시끄러운 녀석이네.’
그런 녀석을 보며 인상을 쓰기도 잠시.
─저벅
탐(貪), 또는 굴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호진은 검을 바로 잡고 몸을 긴장시켰다.
우선은 탐색전이다.
놈이 어떤 식으로 공격해올지 감조차 오지 않았으니까.
수십 개의 대처방식을 떠올리던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뭐야?”
호진은 당황한 나머지 눈을 끔뻑였다.
지금 굴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호진을 본 체도 하지 않고 지나쳐, 팔과 다리를 잃고 비틀거리던 기사와 리자드맨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우직
손을 휘두르자 두 명의 목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리고 목이 사라진 기사를 잡아들고 피가 흐르는 절단 부위에 입을 가져다 댔다.
─쩝쩝, 아그닥, 오독
“…….”
호진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그것은 식사라기보다는 흡수에 가까운 행위였다.
굴라가 입을 몇 번 놀리자 놀랍게도 기사의 상반신이 전부 사라질 정도였다.
마치 지우개로 기사를 지우듯, 놈이 입을 가져다 댄 부위는 사라져갔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싸움보단 먹는 것에 집중하는 건가?’
그렇다면 기회다.
호진은 망설이지 않고 전력으로 기를 운용해, 검기가 담긴 검을 휘둘렀다.
─콰직
“키이이이익!”
굴라는 정말 무방비하게 등을 베였다.
베인 상처에서는 피가 울컥 쏟아질 정도로 꽤 깊은 상처였다.
하지만 호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 그 초록빛은?’
희미하지만 굴라를 베던 그 순간, 초록색의 막이 녀석을 보호했다.
마치 기사가 쓰던 그 호신강기 같이.
‘설마…….’
호진의 눈이 커지던 그 순간, 굴라가 바닥에 널브러진 리자드맨의 시체를 낚아채더니 그대로 피 웅덩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젠장.”
호진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재빨리 놈을 향해 ‘절(切)베기’를 사용했다.
─서걱
“케에에에엑!”
‘절(切)베기’는 적중했다.
그러나 굴라는 한쪽 팔이 잘려 나가면서도 멈추지 않고 달려, 피 웅덩이 속으로 몸을 날렸다.
리자드맨의 시체를 가지고 피 웅덩이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뭐, 뭐야?”
한동안 숨조차 쉬지 못하며, 굳어 있던 용재는 참아왔던 숨을 터트렸다.
그러곤 연신 사라진 녀석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끝난 거야, 형?”
“아니.”
용재의 질문에 호진은 입술을 짓씹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시작인 것 같은데.”
굴라는 아기 형상의 괴물일 때부터 유난히 먹이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적을 무시하고 식사에 집중할 정도로.
단순히 식탐이 많은 거였다면, 그저 약점에 불과했겠지만.
녀석은 지금 자신이 섭취한 먹이의 능력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