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88화 (88/241)

88화. 얼굴 없는 자 (2)

호진은 인상을 찡그렸다.

공왕을 해치우러 왔더니, 의외의 상황과 맞닥트렸다.

끔찍한 형상의 괴물, 왕좌에 앉은 공왕, 수백 명의 사람들 그리고…….

‘하얀 가면.’

호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하니 이곳에서 흉수와 만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하얀 가면을 바라보기도 잠시, 의외의 인물이 움직였다.

─스릉

얼굴 없는 자, 공왕.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왕좌에서 몸을 일으킨 공왕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철로 만들어진 가면 아래 공왕의 시선이 느껴졌다.

명백한 적의와 살기였다.

분명 홀에 들어오기 전에는 미동도 않던 공왕이었다.

“뭐야, 갑자기?”

호진이 의아해하며 검을 고쳐 쥐자, 옆에 있던 에우리우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귀공이 그의 역린을 건드렸으니까.”

“……예?”

뭘 건드렸다는 걸까?

‘이곳에 들어와서 한 거라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을 벤 것밖에는…….’

호진은 알 수 없다는 듯 되묻다가 문뜩, 고개를 돌려 괴물을 바라봤다.

“키이이이이이이익!”

여전히 주저앉아 구슬프게 울음을 터트리는 괴물, 공왕은 그런 괴물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안쓰럽다는 듯이.

이를 지켜보던 에우리우스가 혀를 찬 후 입을 열었다.

“공왕에겐 아이가 하나 있었다지. 사별한 아내가 남기고 간 유일한 아이. 저주받았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네만……. 쯧, 그래서 공왕이 넘어간 거였군.”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시죠.”

“뻔한 이야기지. 아이를 치료해주겠다며 접근한 광신도에게 왕국을 팔아먹은 어리석은 왕의 이야기. 상태를 보니 이미 돌이킬 수 없겠군.”

호진과 에우리우스의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공왕이 괴물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왕좌에서 내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만.”

하얀 가면의 목소리가 홀에 울려 퍼지자, 공왕은 얼어붙듯 멈춰 섰다.

홀에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왕좌로 걸어가 앉은 하얀 가면이 호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나?”

호진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엷게 웃으며 답했다.

“기다리기 지루해서 마중 나온 사람.”

“…….”

하얀 가면은 갸웃하며 호진을 응시했다.

그러다 이내 손뼉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입니까? 제 계획을 번번이 방해한 사람이?”

“맞아.”

호진의 대답에 하얀 가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왠지 당신이라면 이쪽 세계로 넘어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이건 예상 밖이군요.”

비릿한 웃음을 터트린 하얀 가면은 이어 말했다.

“당신이 마을로 돌아가 죽은 사람들을 보며 절망하길 바랐는데. 설마 이곳까지 찾아오리라고는…….”

“유감이네.”

호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생각했다.

‘미친 놈이구만.’

생각하는 것부터가 싸이코패스가 따로 없다.

아니, 싸이코패스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을 못 한다지만, 저건 감정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어서 질이 더 나빴다.

“어떻게 온 겁니까? 제가 알기론 당신이 빌헬름을 꺾지는 못했을 거고, 뒤에 선 저 남자가 쓰러뜨렸습니까?”

“…….”

지목당한 에우리우스는 침묵을 지켰다.

지금 상황을 주도하는 건 호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감사하듯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호진이 앞으로 나서며 답했다.

“글쎄, 지금부터 보면 알겠지.”

“흠, 뭐가 됐든. 또 제 일을 망치시진 못할 겁니다.”

“아까부터 왜 자꾸 확신을 하지? 그것도 내가 못할 것처럼.”

“못할 것 같은 게 아니라 못합니다.”

“…….”

자신만만한 게 아주 마음에 안 들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

‘더 하고 싶지도 않고.’

호진은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돌연 하얀 가면이 제안을 건넸다.

“우리, 시합처럼 진행해 볼까요? 저희 쪽에서는 공왕을 내보내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전부 죽일 거니까.”

“방금 그 말 멋있었습니다. 마치 신화 속 영웅 같군요.”

감탄하던 하얀 가면은 갑자기 심판을 흉내 내며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른 차원에서 온 의문의 검사. 그 상대는…….”

확확 변하는 그 모습이 마치 광대 같았지만, 호진은 처음으로 그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종잡을 수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시리온 공국의 11번째 공왕이자 암살교단의 교주, ‘얼굴 없는 자’의 이름을 잇는 아셀라이트 티메리온.”

이름이 불린 공왕은 멈췄던 몸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뚝.

천천히 걸어오던 녀석이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다.

“뭐, 뭐야? 어디로 간 거야?”

“당황하지 마라, 호진. 우리가 뒤를 봐주겠다.”

공왕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용재와 도훈이 당황한 듯 소리쳤다.

하지만 호진은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됐어, 물러나 있어.”

다음 순간.

발밑에 고인 피 웅덩이에서 희미한 살기가 느껴졌다.

이에 호진은 슬쩍 물러나며 발끝에 기를 두르고, 바닥에서 찔러 올라오는 검을 걷어찼다.

─캉!

불꽃이 튀고 기습에 실패한 공왕의 검이 피 웅덩이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처음이라면 당황했을지도 모르지만…….’

익숙한 방식과 패턴이다.

‘‘검은 뱀’이랑 똑같군.’

검은 뱀은 왕실의 묘역을 지키는 수호자. 어쩌면 왕실에서 길러지며 비슷한 기술을 배웠을지도 몰랐다.

호진은 힐끔 시선을 돌려 에우리우스를 바라봤다.

‘이것까지 예상을 한 건가?’

아마 그럴 것이다.

호진은 에우리우스의 안배에 혀를 내두른 후,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그 후로도 호진은 두 번의 기습을 가볍게 흘렸다.

특히 마지막에는 호진이 피 웅덩이 안으로 반격까지 가하자, 공왕은 같은 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밖으로 나왔다.

“이게 전부면 실망스러운데.”

그래도 뭔가 대단한 게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빌헬름보다 한참 못했다.

공왕은 호진의 말에 답하지 않고 그의 검을 가슴까지 들어 올려 기수식을 취했다.

그러곤 천천히 다가왔다.

한 발.

두 발.

그러자, 그가 걸음을 뗄 때마다 왼쪽에, 다시 오른쪽에.

그와 똑같은 형상이 점점 수를 늘려나갔다.

‘환영?’

아니, 하나하나가 모두 실체를 지니고 기를 품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에우리우스는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치며 외쳤다.

“조심하시게, 귀공! 암살교단 출신의 근위대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게 뭐가 됐든.

“별로 위험하지는 않네요.”

─찰칵

호진은 들고 있던 검을 천천히 납검했다.

공왕의 모습을 한 녀석들은 호진의 무방비한 모습에 멈칫하기도 잠시, 일제히 검을 찔러왔다.

아니, 찌르려 했다.

에스터크 형식의 뾰족한 검의 끝들이 흔들렸다.

─기우뚱

“!”

호진을 둘러싸듯 좁혀오던 이들의 발걸음이 흐트러지는가 싶더니, 모두 피를 내뿜었다.

“……생각보다 위력이 조금 약하네.”

한 번에 양단할 생각이었는데, 그렇진 못했다.

‘상태를 보아하니 금방 죽을 것 같기는 하지만…….’

호진은 아쉬움에 쥐고 있던 검을 내려다봤다.

‘절(切)베기’를 얇고 넓게 변형해 주변으로 펼친 광역기술.

아직 이름은 짓지 못했다.

‘짓는다면 파(波)베기 정도가 되려나?’

─띠링

「새로운 스킬을 성공적으로 시연했습니다.」

「새로운 스킬의 이름이 지정되었습니다. 파(波)베기 LV.1」

“……별게 다 되네.”

잠시 중얼거리던 호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설마 방금 공격에 공왕이 당했을 리는 없다.

어딘가 몸을 숨기고 있을 터.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쓰러져 있던 녀석 중 하나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뭐야, 안 죽었…… 어?”

녀석은 가슴을 가른 상처를 빠르게 회복시키며 천천히 가면을 벗어던졌다.

그러자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공왕.”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춘필의 머리 부분.

호진은 그 행방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아……. 여, 엿이나 처먹어라, 이 괴물 새끼야.”

잠시 쉰 소리를 내던 녀석은 이내 춘필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캠프의 생존자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다.

괴물은 얼굴을 빼앗은 사람이 죽기 직전에 한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고.

‘춘필 아저씨…….’

분명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을 텐데.

“이미지 세탁 제대로 하셨네요.”

호진이 피식거리며 중얼거리자 공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엿이나…….”

“뭘 바라고 그 얼굴을 보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호진은 그런 녀석을 말을 끊으며 검을 치켜들었다.

그 모습에 공왕은 흠칫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호진을 바라봤다.

혹시 아는 사람의 얼굴을 내밀며 내가 망설이기라도 바랐던 걸까?

그렇다면 오산이다.

“나를 빡치게 하려고 한 거면 제법 성공적이지만.”

─콰득

호진은 응축한 기를 폭발시켜 바닥을 박찼다.

순식간에 다가온 호진을 피해 공왕은 황급히 뒤로 몸을 뺐지만, 이미 늦었다.

녀석도 그걸 깨닫고 손에 든 에스터크를 내질렀다.

이에 호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에 와 깨달은 묘리들조차 필요 없는 허접한 공격이다.

‘행엔오트(Hängenort).’

검을 몸에 감듯이 휘둘러 찌르기를 가볍게 흘린 호진은 검을 돌려 녀석의 목을 쳤다.

─서걱

목이 잘려 나간 공왕은 비틀거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들었던 대로 머리가 잘리고도 바닥을 더듬더듬 짚는 녀석.

놈이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떠올린 것을 해볼 차례였다.

“우선 머리, 몸통, 팔, 다리부터 시작할까?”

오체분시, 아니 능지처참을 해도 살아나는지.

“궁금하네.”

호진이 녀석을 향해 다가서던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덥썩

커다란 손이 바닥을 기던 공왕을 낚아챘다.

병풍처럼 주저앉아있던 아기 형상의 괴물이었다.

“키이이이익!”

“뭐야? 꼴에 아빠라 이거냐.”

호진은 인상을 찡그렸다.

‘하긴, 아무리 괴물이라도 아기 앞에서 부모를 죽이는 건 못할 짓이긴…….’

─콰득 으득 으드득 아닥 아작

호진은 생각을 멈췄다.

홀에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게 뭔?”

호진은 기가 차서 말을 잇지 못했다.

공왕을 잘근잘근 씹어 부수고 삼키는 괴물.

그 손에 들린 공왕의 몸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방증하듯 움찔거렸다.

이를 보던 호진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오해를 했네. 괴물은 괴물인데.”

기분은 더러웠지만 오히려 결정을 내리기는 쉬워졌다.

길게 끌 것 없이 공왕과 함께 저 괴물까지 베어버리고 하얀 가면을 해치우면 된다.

호진은 검을 고쳐 쥐고 괴물을 향해 다가갔다.

‘음?’

─슉

예상치 못한 기습에 호진은 황급히 몸을 비틀어 찔러오는 검을 피했다.

쇠 가면을 쓴 공왕의 레플리카, 암살교단 출신의 근위대들.

방금 전에 해치운 열 구의 시체들이 비척이며 검을 쥔 채 몸을 일으켰다.

“불사의 신의 봉사자들이 된 건가.”

호진이 가볍게 혀를 찼다.

한참 미동도 없이 호진과 공왕의 싸움을 관전하던 하얀 가면이 입을 열었다.

“……믿기지가 않습니다. 언제 그렇게 강해진 겁니까?”

“말했잖아, 확신하지 말라고. 금방 죽여줄 테니까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호진의 말을 들은 하얀 가면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당신은 확실히 위험합니다.”

어디선가 책을 꺼내든 하얀 가면이 책을 펼치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죽어주시죠.”

그가 뭔가를 중얼거리자 바닥이 검게 물들며 수십 개의 손이 뻗어 올라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