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87화 (87/241)

87화. 얼굴 없는 자 (1)

왕성의 그레이트 홀.

하얀 대리석 기둥이 높이 솟은 홀에는 무언가 씹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아그작 빠각 쩝쩝

그 소리의 근원지는 집채만 한 아기였다.

다만 오동통 살이 오른 아기의 얼굴엔 애벌레 같은 곤충 형상의 머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3개의 홑눈과 2개의 겹눈을 지닌 녀석은 얼굴에 비해 작은 턱을 쉴 새 없이 까딱이며 손에 들린 무언가를 열심히 잘게 부숴 삼켜댔다.

그런 아기의 뒤편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떨고 있었다.

“엄마아……. 무서워어요.”

한 아이가 엄마의 치마폭을 파고들며 작게 속삭였다.

이에 엄마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여기 아빠도 있고. 아빠가 힘센 기사인 거 알지?”

“존. 이 아빠 못 믿어? 아빠가 반드시 지켜줄게.”

두 부모의 목소리에 안심한 아이는 치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 모습에 부부가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지었다.

분명 지옥 같은 상황이었지만 아이의 귀여움은 당장의 공포마저 잊게 해줬다.

하나 그때 아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곤 몸을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다.

─덜덜덜덜

“존? 왜 그렇게 놀라……!”

아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기사는 숨을 삼켰다.

자신의 바로 뒤에 하얀 가면의 사내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면의 사내는 묵묵히 그를 응시하다 문득 입을 열었다.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지난 며칠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눈앞의 하얀 가면의 말 한마디에 살고 죽었다.

이를 너무나 잘 아는 기사는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그건 대답이 아닙니다. 당신은 신을 믿냐고 물었습니다.”

하얀 가면의 질문에 기사는 눈을 굴렸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질문이었다.

하나, 다른 이들은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동안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없었다.

잘만 대답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생겨났다.

이내 기사는 묻는 대로 답하기로 마음먹었다.

“예, 예! 저, 저는 여명의 여신을 믿습니다.”

“흐음. 대표적인 선신이군요. 그럼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건 뭔가요?”

“가, 가족입니다!”

기사의 대답에 하얀 가면은 잠시 가만히 그를 지켜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랑 내기 하나 하시죠.”

“내기라 하면……?”

“당신을 살려드리겠습니다.”

“뭐, 뭐든지 하겠습니다!”

신나서 대답하기도 잠시 하얀 가면의 이어지는 말에 기사는 딱딱하게 굳었다.

“대신 가족을 죽이십시오.”

“……예?”

기사가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자 하얀 가면의 남자는 다시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5분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못 죽이시면 당신이 죽습니다.”

얼어붙었던 기사의 몸이 점차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곤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기사는 몸을 획 돌려 자신들의 왕이었던 이를 바라봤다.

홀의 끝 화려한 왕좌에 철로 된 가면을 쓴 공왕이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폐하! 당신을 위해 수십 년간 봉사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제 아이의 이름도 왕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제발, 제발 저희를 구해주십시오.”

기사의 절규에도 공왕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몇 번이나 더 부르짖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 무심함을 느낀 기사는 더 이상 왕에게 간청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모두가 저 악마 같은 하얀 가면과 아기의 형상을 한 괴물에게 죽어갈 뿐이다.

기사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

“모두 싸웁시다. 차라리 싸우다 죽읍시다.”

그가 광인처럼 주변을 둘러봤으나 그와 눈을 마주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아내와 아이만이 황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

‘아…….’

이곳은 이미 무덤이었다.

살아서 조금이라도 더 짧은 삶을 연명하려는 이들만이 남은 무덤.

그제야 기사는 자신조차 방금까지 그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냈다.

“3분 남았습니다.”

하얀 가면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악마 같은 속삭임에 기사의 어깨가 움찔했다.

‘……정말 살 수 있는 걸까?’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예 포기했다면 또 모를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걷잡을 수 없는 들불처럼 번져갔다.

기사는 천천히 자신의 가족을 향해 다가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사의 아내는 아이의 눈을 가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기사는 꽉 쥔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목울대를 울렁거리며 침을 삼켰다.

과연 기사가 주먹을 내려칠 것인가, 말 것인가.

경멸, 공포, 호기심.

하얀 가면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만족스럽게 즐겼다.

인간이란 이렇게도 어리석고, 이기적이며 나약한 존재들이다.

도덕적인 듯 이성적인 듯 굴지만, 한 꺼풀만 벗겨내면 추잡한 면모를 드러내고 만다.

똑같은 처지임에도 자신의 일이 아니라 여기며 안도하고 회피하는 저 모습들을 보라.

무엇보다 살기 위해 자신이 살아온 신념을 뒤집어엎는 저 기사를 보라.

‘자, 보아라. 이제 저 기사의 가죽장갑은 자신이 아끼는 자들의 피로 물들…….’

앞으로 펼쳐질 장면을 기대하며 기사를 바라보던 하얀 가면은 그대로 굳었다.

기사가 천천히 팔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놀라게 해서 미안해.”

가족을 있는 힘껏 끌어안은 기사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촛대를 집어 든 기사는 하얀 가면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뭐 하는 짓입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는 안 해. 이 개자식아.”

기사는 그 대답을 끝으로 하얀 가면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사는 있는 힘껏 기를 끌어올렸다.

그도 한때는 공국의 기사단장 후보였던 남자다.

비록 촛대지만 기를 둘러 그 끝은 아주 예리했다.

‘놈이 광신도건 뭐건 결국은 인간.’

놈을 죽이면 가족들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얀 가면은 이런 기사의 반응을 예상치 못했는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됐다.’

그러나 놈을 찌르기 바로 직전 갑자기 시야가 반전됐다.

“어……?”

몸이 붕 떠오르는가 싶더니 공중에서 멈췄다.

자신을 움켜쥔 포동포동한 아기 손이 보였다.

한 손에 성인 남성의 몸이 쏙 들어갔으니, 아기의 손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었지만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외관상 그것은 분명 아기의 손이었으니까.

“어, 어?”

기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쉴 새 없이 검은색의 턱과 더듬이를 까닥거리는 곤충의 머리가 있었다.

“실망스럽네요. 이건 규칙 위반입니다.”

하얀 가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안타깝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당신 다음에 곧바로 아내와 자식도 먹이로 주겠습니다.”

“이런 개……!”

기사는 그 말을 듣고 욕을 하려 했다.

하지만 기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짐승 같은 비명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득, 오도독, 빠득, 빠각.

거대한 손에서 빠져나와 있던 기사의 오른팔이 단단한 검은색 턱에 뼈째로 부숴 삼켜졌다.

괴물은 입안에서 기사의 살점을 굴리면서도 쉴 새 없이 3개의 홑눈을 뒤룩거렸다.

먹고 있지만 아직 부족하다는 듯, 탐욕스럽게.

“히이이익, 끅, 으으으으아아아악!”

홀에는 기사의 비명과 뼈를 부수고 삼키는 소리만이 울렸다.

이에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수백 번이나 반복된 짓거리다.

이제 곧 기사의 비명은 잦아들고 괴물이 사람을 씹는 소리만이 계속해 들려올 것이다.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왕궁의 사람들.

그렇기에 그들은 하얀 가면이 괴물에게 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빨리 드세요. 곧 약속 시간입니다. 그전까지는 여기 있는 모두를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 말을 못 들은 건 아니었다.

기사를 구하기 위해 덜덜 떨면서도 돌을 움켜쥔 기사의 아내만은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다섯 살배기 아이가 자신의 치마를 붙잡고 있었기에 망설여졌지만, 이대로 남편이 죽는 모습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결국 모두 저 괴물의 먹이가 되는 거였네.’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도망친 이들은 결국 붙잡혀 더 빨리 괴물의 먹이가 됐다.

남은 이들은 괴물이 배가 차면 자신들을 살려줄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며칠간 이 홀에서 대가리를 처박고 현실을 외면해왔다.

마치 가축처럼.

하지만 역시 부질없는 희망을 연장해왔을 뿐이었다.

더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가 벌떡 몸을 일으키는 그 순간.

─서걱

예리한 절삭음이 메아리처럼 홀에 울려 퍼졌다.

‘어?’

그녀가 의문을 가지기도 잠시.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익!”

곧이어 고통과 찬 울음이 괴물의 부들거리는 턱에서 터져 나왔다.

괴물은 아이처럼 주저앉아 연신 울음을 터트렸다.

괴물의 아기같이 포동포동한 팔이 반쯤 잘려 덜렁거리고, 쥐고 있던 기사는 바닥에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고통에 기절한 듯 보였지만 그래도 기사는 천천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사람을 살아있는 채로 잡아먹는 괴물의 괴이한 식습관 덕분이었다.

무엇보다 남편은 기사. 한쪽 팔이 잘려나가도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기사의 아내가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을 끔벅이던 그때.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더럽게 시끄럽네. 생긴 것도 X같이 생겨서.”

“어허, 용재야. 예쁜 말.”

“……많이 시끄럽구나. X같이 생긴 친구야?”

“그게 예쁜 말이냐?”

“그래서 형은 저게 어떻게 생겼다고 생각하는데?”

“……음.”

“그렇다니까.”

언제 열렸는지 모르는 홀의 문 앞.

4명의 인형이 두런거리며 홀의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너무 홀에 익숙해진 탓일까? 그들의 뒤에서 쏟아지는 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그러나 홀의 모두는 남자들에게서 조금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앞에 선 남자의 복장이 눈에 익었다.

금색 자수가 들어간 하얀색의 코트.

제국 기사단의 정복이다.

지금만큼 눈앞의 기사들이 그 어떤 신화 속의 인물보다 위대해 보였다.

“신이시여.”

기사의 아내는 성호를 그으며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