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수련 (7)
─띠링
「나가의 내단을 완전히 흡수했습니다.」
「특수한 방법으로 아난타의 영향력을 배제했습니다.」
「내단이 사라집니다. 사용자가 사망해도 회수가 불가능합니다.」
「중독내성이 크게 증가합니다.」
「냉기내성이 크게 증가합니다.」
「화염내성이 크게 증가합니다.」
‘이건……?’
내공심법의 운용을 천천히 멈춘 호진은 눈앞에 떠오른 알림들을 읽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아이템의 정보대로라면 ‘나가의 내단’은 사용자가 죽은 후에도 회수가 가능했었다.
그 내용이 달라진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내공심법 구결의 변형 때문이겠지.’
호진은 구결을 변경해 자신의 신격을 높이는 것으로 기운을 다스렸다.
그나저나 아난타의 영향력이라니…….
‘원래라면 복용 후 아난타에게 종속되는 거였나?’
자칫하면 꽤 곤란한 상황이 될 뻔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호진은 천천히 자신의 상태를 조망했다.
이전보단 수배는 커진 단전과 넓어진 기맥들.
그 기맥을 타고 청량한 기운이 노도처럼 내달렸다.
“훌륭하네.”
호진이 뿌듯함에 젖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던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난 겐가?”
“아, 스승님.”
호진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곳엔 눈을 감기 전의 모습 그대로의 에우리우스가 석상처럼 서 있었다.
“아슬아슬했네. 으하하하!”
“무엇이 말입니까?”
에우리우스는 바이를 올리며 크게 웃자 호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긴 뭐겠나? 기한이지.”
“예? 기한이라면…… 아!”
호진은 급히 퀘스트 창을 살폈다.
「A─3 지역 중 ‘강화도’를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기. 제한 시간: 12시간 30분」
“……이런 미친.”
심법을 운용하며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설마 8일이나 지났을 줄이야.’
호진은 황급히 채비를 하며 에우리우스에게 말했다.
“동생이랑 삼촌을 데려오겠습니다.”
“그건 걱정 말게나. 며칠 전에 먼저 찾으러 와서…… 아, 저기 있군.”
에우리우스의 손가락을 따라가자 공동을 향해 고개를 내민 누군가 속삭이듯 물어왔다.
“에우리우스 님. 형 일어난 거예요? 저희 들어가도 돼요?”
용재였다.
이곳에서 왕성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컨디션도 최상인 상태.
지금이라면 빌헬름도 ‘얼굴 없는 자’도 두렵지 않았다.
도훈과 용재가 이곳에 있다면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출 수 있을 듯했다.
‘쟨 근데 왜 저래?’
답지 않게 속삭이듯 예의 바르게 묻는 용재를 의아하게 보고 있자니, 에우리우스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운공을 하는 동안 들어오려 해서 조금 혼냈다네.”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잔뜩 기죽은 용재를 본 호진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들어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훈과 용재가 공동 안으로 들어섰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 윽. 이게 무슨 냄새야.”
반갑게 손 흔들며 달려오기도 잠시, 용재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
이에 호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뭔 소리야?”
“형, 이건 며칠 안 씻은 수준이 아닌데? 바지에 쌌어?”
“싸긴 뭘 싸 인마.”
내공심법을 운용하는 동안 다른 장기의 활동들은 거의 시간이 멈춘 듯 흘렀다.
그리고 몸 안에 있던 음식물들은 쌀 한 톨만큼의 양분도 모두 몸을 보존하는 데 쓰였다.
즉, 지렸다는 말은 근거 없는 모함이었다.
“냄새도 안 나는구만.”
호진이 팔을 들어 옷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
그러자 용재보다 정확히 열 발자국 뒤로 물러난 도훈이 미간을 모으며 답했다.
“후각이 어떻게 된 모양이군. 지금 자네에게선 썩은 시체 같은 냄새가 난다.”
“……설마요.”
호진이 고개를 돌려 에우리우스를 보자 그가 투구 위를 긁적이며 답했다.
“기를 운용하는 동안 몸 안의 탁기가 빠져나온 걸세. 냄새는…….”
“……혹시 씻을 데가 있을까요?”
“근처의 물은 다 오염됐네. 우선은 식수로 간단하게 씻고 환복을 하세.”
“감사합니다.”
호진은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
에우리우스가 준비해준 제국 정복으로 갈아입은 호진은 빠르게 왕성으로 향했다.
왠지 왕도가 지난번에 비해 텅 비어있었기에 시간은 더욱 단축됐다.
호진들은 순식간에 성문 앞에 도착했고 제한시간은 정확히 11시간이 남았다.
“가능할까, 형?”
“보고만 있어.”
오면서 들은 바에 의하면, 용재는 기감을 깨우치고 추가로 청랑심법까지 터득했고, 도훈은 기감을 깨우치는 것에서 그쳤다고 한다.
훌륭한 성취이고 성장이었지만, 아직 빌헬름을 같이 상대하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호진은 아쉬워하며 성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냥 그렇게 들어간다고?”
용재가 놀라서 묻자 호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노크할 수는 없잖아.”
엷게 웃은 호진은 용재와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준비는 충분해. 이제는 부딪칠 때지.”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다.
죽음의 고비를 넘어가며 단련했다.
이제 와 한 달 전으로 시간을 돌린다 하여도 이보다 더 준비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호진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커다란 공터에 우둑하니 거대한 방패를 짚고 서 있는 철갑을 두른 거인이 보였다.
빌헬름.
망국의 기사, 철벽공이라는 이명을 지닌 전(前)대장군은 한결같았다.
공터로 들어서자 인기척을 느낀 듯, 몸을 일으켜 꼿꼿하게 섰다.
그러곤 묵묵히 침입자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호진은 마치 거대한 성벽이 다가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가겠습니다.”
호진은 죽어서도 명령을 이행 중인 기사에게 예우를 갖춘 후 검을 다잡았다.
단전에서 기가 흘러나와 검과 몸에 깃들었다.
그러자 다가오는 녀석의 흉흉한 기세가 눈에 들어왔다.
‘저런 거와 싸웠었나.’
이제 보니 자신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느껴진다.
호진은 저번과 달리 천천히 녀석과 거리를 좁혔다.
거리가 좁혀들자 순간 녀석이 호진을 향해 뛰어올랐다.
대검에 불어넣은 기의 양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막기라도 하면 낡을 대로 낡은 호진의 검은 단숨에 부러지고 말 것이다.
막는다면 말이다.
─스륵
호진은 얇은 기를 덧씌운 검을 휘둘러 대검과 부딪쳤다.
그러자 빌헬름의 대검은 호진의 검이 이끄는 대로 검로(劍路)를 틀었다.
검이 옆으로 비켜남과 동시에 호진은 발을 끌어 빌헬름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쾅!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녀석이 휘두른 대검이 바닥을 으스러트린 것이다.
하나, 호진은 조금도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빌헬름의 겨드랑이를 베고 지나갔다.
대검이 땅에 닿기 직전 발과 땅 사이에 유형화된 기를 두른 덕이었다.
─후두두둑
공격에 실패한 빌헬름이 천천히 몸을 돌리자 진득한 피가 갑옷을 타고 흘러내렸다.
분명 치명적인 상처였으나, 여느 불사의 신의 봉사자들이 그렇듯 빌헬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호진이 검에 묻은 피를 털고 있는데 망설임 없이 재차 달려들었다.
횡으로.
대각에서 다시 대각으로.
마지막으로 수직으로 내려찍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연속공격.
하지만 그 공격의 아주 조금도 호진에겐 닿지 않았다.
‘보인다.’
빌헬름의 공격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기의 흐름은 마치 어떤 공격을 해올지 말해주는 것과 같았다.
무엇보다…….
“너무 동작이 큽니다.”
수직으로 내려찍는 대검을 피한 호진은 안쪽으로 파고들어 검을 휘둘렀다.
─서걱
공터에는 예리한 절삭음이 울려 퍼졌다.
거대한 대검을 쥔 빌헬름의 팔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까 전 남겨놨던 겨드랑이의 검흔을 재차 벤 것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팔이 떨어지자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던 빌헬름은 방패를 틀어쥐고 호진에게 달려들었다.
이 시점에서 싸움은 이미 끝난 것과 진배없었지만, 호진은 방심하지 않았다.
호진은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자세를 잡았다.
빌헬름도 마지막임을 직감한 것인지, 아니면 본능인지 방패에 힘을 그러모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칼집에서 예리한 기운이 터져 나오며 전방의 공기를 찢어발겼다.
─콰직
절(切)베기.
호진이 펼칠 수 있는 최강의 공격이 빌헬름의 방패를 갈랐다.
철이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반으로 갈라진 방패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어 한쪽 팔을 잃은 빌헬름의 신형도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끝이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철벽공 빌헬름을 쓰러트렸습니다.」
「플레이어의 격이 오릅니다.」
‘따로 보상은 없군.’
보상 조건은 세 가지.
퀘스트 깨기, 던전 클리어 하기, 보스 몬스터 잡기
‘검은 뱀’은 보스 몬스터로 인식된 반면, 빌헬름은 아니었나 보다.
‘하긴.’
빌헬름은 퀘스트의 과정이지, 보스 몬스터라 보기엔 어려웠으니까.
어찌 됐든, 죽어서도 명령을 이행하던 그의 의지만큼은 진짜였다.
호진은 약간의 애도하는 마음을 담아 빌헬름을 훑은 뒤 몸을 돌렸다.
그러자 경악하는 세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귀공은 자꾸 나를 놀라게 하는군. 이러다 제 명에 못 살겠어. 으하하하!”
“……전 이상한 게 보여요. 뭘 잘못 먹었나 봐요.”
“저건…… 괴물이다. 원래도 괴물이었지만…….”
그나마 에우리우스는 그간 호진의 성장을 지켜봐 온 덕분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지만, 다른 두 사람은 넋이 나가버렸다.
그도 그럴 게 한 달 전까지 반격은커녕 도망치는 데 목숨을 걸어야 했던 적이었다.
그런 적을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웠으니 믿기지 않는 것도 이해는 갔다.
‘……나도 신기하니까.’
호진은 기가 흐르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 정도일 줄이야.
기를 이전보다 3배 이상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절삭력도 강도도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전체적인 전투 감각이 달라졌다.
빌헬름의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인 것은 물론이고, 예측마저 가능했다.
마치 자신보다 한참 약한 적을 상대하는 것처럼.
‘아니, 진짜 차이가 나기는 했지.’
10번을 다시 싸운다 해도 전부 이길 자신이 있었다.
즉, 호진과 빌헬름의 사이에는 그만큼의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이제 남은 적은 하나뿐.
두려울 것은 없었다.
퀘스트 종료까지 남은 제한 시간은 10시간 50분.
호진은 고개를 돌려 높이 솟은 왕성을 보며 검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