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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84화 (84/241)

84화. 수련 (5)

─저벅 저벅

어두운 지하묘실에 발자국 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기네.’

한참을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자 호진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왜 이렇게 묘가 많은 겁니까? 묻을 왕이 이렇게나 많지는 않았을 텐데요.”

“왕가의 묘역 아닌가. 왕의 가족들도 묻히는데 당연히 길겠지.”

“아.”

호진이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잠시,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꺼냈다.

“그나저나 메고 계신 그 보따리는 뭡니까?”

─꿈틀

자신 얘기를 하는 걸 듣기라도 한 듯.

에우리우스가 들쳐 멘 가죽 보따리 속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건 비밀일세.”

에우리우스가 허허 웃더니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뒤따르던 호진은 목소리를 죽이며 물었다.

“뭔가 있습니까?”

“음, 직접 보게.”

에우리우스가 옆으로 비켜서자 정면에 어디론가 이어지는 입구가 보였다.

그 너머에는 한눈에 봐도 꽤 넓은 공동이 있었다.

“……도착했군요.”

“바로 맞췄네. 이제 들어가 보게.”

“스승님은요?”

“나는 이곳에 있겠네. 안쪽엔 먼지가 조금 심해서. 크흠, 내가 먼지 알레르기가 심하다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에우리우스를 두고 호진은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안쪽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후욱

순식간에 짙은 어둠이 호진의 시야를 가렸다.

‘이건?’

이 어둠은 부자연스러웠다.

분명 입구 밖에서 본 공동은 이토록 어둡지 않았다.

무언가가 호진의 시야를 차단한 것이 분명했다.

호진은 침착하게 ‘감시자의 눈’을 사용해 주변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러자 정면에 꽈리를 튼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띠링

「묘역의 검은 뱀」

「종족: 바실리스크」

「특징: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온 먹잇감의 시야를 뺏는 타고난 사냥꾼이다.」

‘바실리스크라…….’

흔히 석화 능력을 지닌 것으로 유명한 괴물이다.

그 눈을 바라보면 몸이 굳기에, 신화 속에서는 거울이나 청동방패를 통해 녀석의 저주를 피한다고 했는데…….

‘……이곳에선 거울이 있어도 소용없겠네.’

놈의 영역에 들어선 것만으로 눈이 멀어버렸다.

마치 눈에 먹물이 번진다면 이런 느낌일까.

하나, 호진은 검은 뱀을 볼 수 있었다.

감시자의 눈이라는 권능.

그것은 시각이 아닌 세계를 관조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진은 이것 외에도 녀석을 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하나 더 지니고 있었다.

호진은 천천히 ‘감시자의 눈’을 해제했다.

그러자 기(氣)로 이루어진 뱀의 형상이 뚜렷하게 보였다.

권능보다는 못하지만 녀석을 볼 수 있었다.

전투를 하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그 순간.

검은 뱀은 스르륵 똬리를 풀며 둥근 공동의 벽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녀석은 호진이 자신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여유롭게 몸을 움직였다.

‘음?’

호진은 곧장 이상함을 느꼈다.

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색, 무취, 무음.

얼핏 그 길이만 해도 수십 미터에 달할 것 같은 거체가 움직이는데도, 모래알 하나 굴러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놈이 자신과 거리를 좁혀옴에도 몸은 평소 그대로였다.

이것이 타고난 사냥꾼이라는 걸까.

‘기를 쓸 수 없었으면 꼼짝없이 당했겠네.’

호진이야 ‘감시자의 눈’이 있으니 도망이라도 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기도 권능도 없는 이들이라면 손 하나 까딱 못하고 당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도 검은 뱀이 점점 다가왔다.

하나, 호진은 눈치채지 못한 척 기다렸다.

그러자 검은 뱀은 호진의 옆을 지나쳐 그를 휘어 감듯이 반원을 그리며 뒤로 이동했다.

몸을 곧추세운 녀석은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입을 벌리며 호진에게 그늘을 드리웠다.

지금이었다.

─서걱

예리한 절삭음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키에에에에에엑!”

‘절(切)베기.’

시작부터 전력으로 검을 휘두른 호진은 재빨리 후속타를 위해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놈이 고통에 몸을 비트는 지금이 기회…….

‘아니야.’

초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 속.

오로지 생사의 기로에서 다져진 직감이 말했다.

지금 다가서면 죽는다고.

─콰직

재빨리 몸을 비튼 호진은 뒤쪽에서 비스듬하게 날아든 녀석의 꼬리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사각을 노리고 날아든 꼬리에는 어마어마한 기가 실려 있었다.

그걸 증명하듯 공동이 크게 흔들렸다.

‘미친…… 괴물 녀석.’

절(切)베기에 당하고도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녀석이라면 다른 공격도 통하지 않을 거다.

장담컨대 지금 호진의 수준으로 덤빌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에 자신을 집어넣은 건지 에우리우스의 정신상태가 의심될 정도로.

호진이 거리를 벌리자 검은 뱀도 빠르게 물러났다.

예상치 못한 녀석의 움직임에 인상을 쓰기도 잠시.

‘어……?’

사라졌다.

호진은 녀석의 자취를 놓친 줄 알고 눈에 더 많은 기를 집중했지만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기도 잠시 호진은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이 교활한 녀석이.”

검은 뱀은 호진이 자신을 어떻게 본 것인 줄 알아채고 몸에서 흘리던 기를 숨긴 것이다.

기란 생명의 근원과 같은 것.

생명체라면 당연히 미약하게라도 흘러야 할 기를 어떻게 완전히 숨긴 건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감시자의 눈을 쓸까?’

고민하기도 잠시 호진은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머리에서 지웠다.

놈의 위치를 특정해도 못 피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은 그저 집중했다.

‘아무리 녀석이라도 공격하는 순간에는 기를 흘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스륵

‘위!’

찰나의 순간.

위에서 느껴진 희미한 기척에 호진은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날카로운 어금니와 검이 부딪치며 시리도록 청명한 소리가 공동에 울려 퍼졌다.

놈의 거력에 온몸이 삐걱거렸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기를 감춘 채 기습하다 보니 위력 자체는 반감한 듯했다.

“흡.”

호진이 검에 기를 불어넣어 검은뱀을 밀어냈다.

기습에 실패한 검은 뱀은 미련 없이 재차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만하진 않네.’

호진은 한숨을 쉬며 미간을 좁혔다.

녀석의 공격을 한 번이라도 놓치면 그대로 죽을 거다.

반면 호진은 녀석을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이것도 놈이 부상을 입어서 망정이지, 만약 멀쩡한 녀석을 상대로는 진즉 죽었지 싶다.

‘그래도 우선은…… 버틴다.’

애초에 그것 말고는 답이 없다.

아까부터 들어온 입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캉!

이번엔 옆에서 쇄도해온 녀석의 공격을 흘렸다.

역시 관절이 비명을 질렀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취익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호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재빨리 몸을 틀어 피했으나…….

─툭

팔에 알 수 없는 액체 한 방울이 튀었다.

끈적거리는 촉감의 액체에 닿은 부분이 왠지 뜨겁고 따끔거렸다.

등골이 서늘했다.

‘설마 아니겠지?’

호진은 애써 현실을 외면하며 검은 뱀의 다음 공격을 대비했다.

─쾅!

또다시 간신히 검은 뱀의 공격을 흘리는 호진.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호진은 녀석과 수십 번의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매 순간이 죽음의 위기였던 호진은 이제야 아까부터 부정해온 현실을 받아들였다.

어지러운 머리와 떨리는 다리.

빳빳하게 마비되어오는 손끝까지.

중독이다.

아까 전에 몸에 튀었던 액체가 바실리스크의 독인 듯했다.

“후우. 큰일 났네.”

호진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진짜 에우리우스는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여기 넣은 걸까.

이쯤 되면 검은 뱀에게 밥을 주려고 자신을 데려온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

“…….”

그럴싸한데?

‘이거 설마 뒤통수 맞은 건가?’

호진이 인상을 찌푸리던 그때였다.

─음메에에에

‘염소?’

뜬금없는 상황에 호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호진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정말 염소 한 마리가 겁도 없이 공동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그 순간.

─콰직

순식간에 나타난 검은 뱀이 염소를 물어 채더니 다시 사라졌다.

호진이 그 장면을 멍하니 보던 그때 뭔가가 호진의 팔목을 붙잡았다.

“……!”

호진이 비명을 삼키며 돌아보자 익숙한 기운의 사람이 팔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에우리우스.

그가 자신의 팔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호진은 얌전히 그가 이끄는 대로 비척이는 몸을 이끌고 따라갔다.

잠시 후, 둘은 어렵지 않게 공동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에우리우스는 숨을 거칠게 헐떡이는 호진에게 무언가를 건네며 말했다.

“고생했네. 훌륭하군. 자, 먹게나. 해독제일세.”

“가, 감사…….”

호진은 혀끝이 마비되어 말도 하지 못한 채 해독제를 받아마셨다.

─띠링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독 내성 LV1」

「스킬 레벨이 증가합니다. 초급 기(氣) 검술 LV2→ 중급 기(氣) 검술 LV1」

호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에우리우스를 바라보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이구만. 녀석은 공동에서 벗어나질 않으니 안심해도 좋네.”

에우리우스는 호진을 편하게 쉴 수 있게 벽에 기대게 해준 후 말을 이었다.

“자네가 궁금해했던 그 보따리 안에 든 것은 새끼 염소였다네. 바실리스크는 새끼염소만 보면 눈이 돌아가거든. 더군다나 지금처럼 상처를 입은 상태라면 더욱 그럴 거고.”

설명을 들은 호진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염소라니.

대비책으로는 너무 빈약했다.

‘만약에 바실리스크가 염소에 반응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려고…….’

호진이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에우리우스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물론 염소는 부가적인 준비물이었고, 사실 자네가 위험해지면 이걸 쓰려고 했네.”

에우리우스는 찰랑이는 무언가가 들은 유리병을 들어 보였다.

“드래곤의 피. 이거에는 바실리스크도 꼼짝 못 하지. 한데 이것을 사용하지 않을 줄이야. 귀공이 이 정도로 선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네. 으하하하!”

아, 에우리우스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의심했던 사실이 민망해질 정도였다.

호진이 부끄러움에 뺨을 긁자 에우리우스가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왜 그러나? 설마 내가 귀공을 함정에 빠트리기라도 했을까 봐?”

─움찔

호진이 가볍게 어깨를 떨자, 에우리우스가 시무룩해져서 되물었다.

“……진짜로 의심했나?”

이에 호진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몸이 마비돼서 그렇습니다.”

호진은 일부러 마비된 몸을 보여주듯 부들부들 떨었다.

“스승님이 아니면 제가 누굴 믿겠습니까. 바실리스크와 싸우면서도 구해주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호진이 떨리는 손을 들어 손가락을 치켜세우자, 에우리우스는 금방 빵긋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나? 하긴, 귀공에게 실전 같은 긴장감을 주기 위해 설명을 안 하긴 했지만. 귀공이라면 나를 끝까지 믿어 줄 거라 생각했지. 으하하하!”

에우리우스의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웃음에 양심이 찔리는 호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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