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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81화 (81/241)

81화. 수련 (2)

에우리우스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호진은 살짝 당황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귀공도 알겠지만, 귀공의 성취는 괴이하네. 검기(劍氣)를 다루고 기사단장 고유기술과 비견되는 공격 기술을 쓸 수 있는 반면, 다른 방면에서 기(氣)를 활용하는 능력은 전무하지.”

에우리우스는 투구를 툭툭 두들기다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아마, 불의의 이유로 스승에게 기술들을 일부밖에 물려받지 못한 거겠지.”

“…….”

아니다.

‘불의의 이유는 무슨.’

호진은 스승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알아서 오해를 해주니 굳이 변명을 할 필요가 없어서 좋기는 했다.

호진은 다소 침울해진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를 본 에우리우스는 깍지를 끼더니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그러곤 호진의 손을 마주 잡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혹시 두 명의 스승을 모실 수 없다면, 괜찮네. 나는 그냥 조력자라고 생각하게.”

이에 호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한 사람이 쌓아온 인생의 정수를 배우는데 어떻게 그럴까요. 그거야말로 소천하신 제 스승을 욕보이는 일입니다. 에우리우스 님은 오늘부터 제 스승입니다.”

“오오. 어찌 그런 생각을……. 내가 귀공에게 더 배우는 게 많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네.”

경탄하는 에우리우스를 보며 호진은 마음속으로 조용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 그래도 기를 다루는 방법이 생각보다 어려워 진전이 없었는데 이런 기회가 찾아오다니.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일단 살아남으면 강해지는 법이다.

“한데, 제가 시간이 부족합니다. 스승님. 단기 속성 교육도 가능하신지요.”

“단기, 음?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거 위주로 해치워보지.”

어쨌든 1차 시도의 결과는 참패였다.

남은 시간은 29일 하고도 약간.

그 기간 동안 강해져야 한다.

그러고는 빌헬름을 쓰러트린 후. ‘얼굴 없는 자’를 해치우기만 하면 된다.

‘참 쉽죠?’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장난하나.

원래의 목표를 떠올린 호진은 몸에서 힘이 쭉 빠짐을 느꼈다.

수문장에 막혀 이렇게 헤매면 공왕 ‘얼굴 없는 자’를 잡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스승님 한 가지 더 여쭤보자면 빌헬름 공과 ‘얼굴 없는 자’를 비교하면 누가 더 강합니까?”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이군.”

“하긴…….”

공왕이 대장군보다 약할 리가 없다.

실력만으로 왕위를 얻은 자의 후손이니까.

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때, 에우리우스가 툭 하고 대답했다.

“당연히 빌헬름 공이네.”

“죄송합니…… 예?”

“일국의 왕이 되며 암살자들에게 신격화되긴 했지만 ‘얼굴 없는 왕’은 어쨌든 암살에 특화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네. 일대일 승부라면 당연히 빌헬름 공이 강하겠지.”

됐다.

가능성이 생겼다.

놈이 최종보스라니, 갑자기 없던 의욕이 샘솟았다.

“전 준비됐습니다. 스승님. 지금 당장 수련을 시작하시죠.”

“훌륭하군. 한데…… 나는 좀 반대일세.”

“……?”

호진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러십니까? 벌써 노을도 지는데 지금 아니면 언제 한다는 겁니까?”

어느새 붉어진 저녁 하늘.

곧 어둠이 찾아오고 밤이 되면 수련하기가 어려울 터였다.

“그게 문제네.”

“예?”

호진이 되묻자 에우리우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은 노을이 안 졌거든. 아직 해가 지려면 3시간은 더 남았네.”

“어……. 근데 왜 하늘이 붉죠?”

“하늘이 아니라 귀공의 각막이 붉은 거겠지. 이마에서 흐르는 피 좀 닦게나. 아니, 일단 그 옷부터 벗게나. 당장 지혈해야겠네.”

호진은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봤다.

몸에서 흘러내린 피로 신발에 피가 질척하게 고여 있다.

“이런 미친…….”

이를 본 호진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정신을 잃었다.

***

다음 날 이른 새벽, 대망루의 앞 공터.

새벽이슬에 젖어 희미하게 일렁이는 모닥불 주위에 네 명의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자네들, 기절했던 사람들 맞나?”

에우리우스가 개운한 표정으로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세 사람에게 의아해하며 물었다.

흔히 기절한 다음 날이면 피곤해야 정상이거늘, 다들 숙면을 한 듯 얼굴이 매끈했다.

처음 만났을 때 눈자위를 검게 물들인 다크서클도 이젠 보이지 않는다.

용제와 도훈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호진은 민망한 듯 뺨을 긁적이며 답했다.

“상황이 좋지 않아 한동안 잠을 좀 못 잤습니다. 이렇게 깊게 자본 게 얼마 만인지…….”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한동안이 아니라 게이트가 터진 이후,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잠든 적이 없었으니까.

‘안전한 곳 따위는 없었지.’

깊게 잠든다는 것은 그만큼 무방비해진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이 세 명 중 불면증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함께이기에 여기까지 온 게 아니겠는가.

호진이 낯 뜨겁지만 가슴에서 살며시 차오르는 동료애를 느끼던 찰나였다.

“아, 우리는 형이 안 재운 거지. 다 자기 같은 괴물인 줄 아나. 툭하면 정찰, 툭하면 불침번.”

“동의한다. 사람은 로봇이 아니다, 조카. 앞으로는 최소 수면시간을 보장해 주도록.”

“…….”

취소다.

자신이 아니었으면 저 인간들은 옛 저녁에 몬스터 밥이 됐을 거다.

‘진짜 감동할 틈을 안 주네.’

어째 어른스럽던 도훈마저 용재를 닮아가는 느낌이다.

호진이 안타까움이 섞인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으하하하하! 정말 재밌는 가족이야. 아무튼 컨디션이 좋다니 다행이군.”

“예, 스승님. 그럼 저희는 뭘 배우는 겁니까?”

호진의 정중한 물음에 에우리우스가 역으로 호진에게 물었다.

“그걸 알아봐야지. 귀공이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아는지 말이야.”

“음, 우선 기가 뭔지 정도는 압니다. 사용도 할 수 있고요.”

“아니지. 아니야. 자신의 수준도 모르고 있군. 귀공은 기가 무엇인지 모른다네.”

“예? 아니, 하지만…….”

어제 호진은 에우리우스에게 절(切)베기를 선보인 것을 상기하며 당황했다.

분명 기를 썼을 텐데 모른다니, 무슨 말일까.

“기(氣). 이 신비한 힘에 대해선 나를 비롯해 그 누구도 모른다네. 그저 오랜 기간 축적된 경험들과 지식들로 그것을 쌓고 활용하는 체계만이 구축되었을 뿐.”

“……아.”

확실히 기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면 호진은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저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검을 더 예리하고 단단하게 하며, 상식을 뛰어넘는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 모든 것은 기가 가지는 현상이지, 본질이라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알려 줄 것은 그 경험들과 지식들. 즉 체계라네. 귀공은 내게 그것을 배우고도 끊임없이 기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게야.”

“명심하겠습니다.”

호진이 고개를 숙이며 답하자 에우리우스가 만족스럽게 웃음 지었다.

“좋네. 그럼 이제 정말 기본부터 시작해보세. 우선은 기를 느끼는 과정이네. 어디 한번 귀공의 심법을 보여주게나. 우리가 그 정도 신뢰는 쌓았지 않은가.”

“……예?”

“어허, 내공 심법 말일세. 물론 귀공의 스승으로부터 남들에게 보이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겠지만, 괜찮네. 제자의 무공을 도둑질할 생각은 없네.”

망했다.

‘내공 심법? 무공?’

갑자기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용어가 등장했다.

검도 할 때 배웠던 단전 호흡 말고 아는 호흡법 따위는 없다.

호진은 한참을 망설이다 의아한 표정을 한 에우리우스에게 이를 실토했다.

“……저는 내공 심법이 뭔지 모릅니다.”

“아, 또 농담인가? 정말 농담엔 재능이 없군. 으하하하!”

“…….”

잠시간의 정적 후 에우리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설마 진심이라고?”

“예.”

“아니, 그러면 어떻게 검기를 쓴단 말인가?”

“어쩌다 보니 어느 날부터 그냥 됐습니다.”

“……어쩌다? 어느 날? 그게 무슨…… 어억!”

“스, 스승님!”

호진은 뒷목을 잡은 에우리우스를 부축했다.

잠깐의 소동 후, 간신히 진정한 에우리우스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믿기 쉽진 않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체내에서 기를 느껴본 적도 없겠군.”

“검으로 흘려 내보내는 것 말고는…….”

“정말 미친 재능이군. 귀공은 검의 화신(化身)이라도 되는 겐가?”

에우리우스의 질문에 호진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화신은 아니고, 검의 교단 광신도이긴 합니다만.’

속으로 대답을 삼킨 호진은 이어 설명하는 에우리우스에게 집중했다.

“그럼 우선은 체내의 기를 느끼고 내공심법을 익히도록 하겠네. 귀공, 기감은 일깨웠나?”

‘기감? 그건 또 뭐지?’

호진은 에우리오스와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서야 기감이 ‘초감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우리우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 이것마저 모르면 어떡하나 했네.”

“저는 그게 뭔지 모르는데요.”

“나도 모른다.”

용재와 도훈이 손을 들며 말하자 에우리우스가 침음을 흘렸다.

“기감 수업은 내 부하들이 도와줄걸세. 흠, 제시간에 익힐 수 있을지 모르겠군. 감을 잡는 데만 수십 개월이 걸리기도 해서…….”

수십 개월은커녕 한 달조차 남지 않은 시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그때 문득 무엇인가 호진의 뇌리를 스쳤다.

‘음?’

호진은 인벤토리에서 ‘맹인 악사의 눈가리개 헝겊’을 꺼냈다.

“에우리우스 님. 혹시 이걸 쓴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이 천 쪼가리는 뭔가?”

눈가리개를 받아든 에우리우스는 호진의 설명에 따라 투구 위로 눈가리개를 착용했다.

그리고 잠시 뒤.

“이…… 이건, 대단하군. 이거라면 한 달로 충분하겠어.”

“오오!”

에우리우스의 말에 반색하는 용재와 도훈은 기쁘게 물었다.

“그럼 저희는 부단장님에게 수련을 받으러 가면 됩니까?”

“아니, 우선은 기사단 막내에게 도움을 받게나.”

“예? 하지만…….”

용재가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하자 에우리우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뭐 원한다면 부단장에게 받아도 되지만. 아플 걸세.”

“……?”

“이 헝겊을 뒤집어쓰고 목검에 두들겨 맞는 훈련인데, 덜 아프게 맞는 게 낫지 않겠나?”

“……그게 수련이라고요?”

“그런 수련이라네.”

단호한 에우리우스의 대답에 용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훈도 티는 내지 않았지만 두 발 정도 뒤로 물러나 있다.

어지간히 싫은 모양.

“뭐 자네들이 원한다면 내가 해줄 수도 있네.”

“정말인가요?”

에우리우스가 인자하게 웃자 용재가 기뻐하며 되물었다.

이에 에우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정말이고말고. 아, 참고로 나는 12살 이후로 목검을 들어본 적이 없네. 이제 와서 들 생각도 없고.”

─찰칵

옆구리에 패용한 검의 크로스가드를 소리 나게 밀어 올리는 에우리우스.

그는 사색이 된 용재에게 말을 이었다.

“죽을 걱정은 말게나. 적당히 베겠네. 적당히. 으하하하.”

“……아, 그, 바쁘신데 실례인 것 같아서, 저는 막내 기사님에게 부탁드려보겠습니다.”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막내 기사님과 사제의 연을 맺었다.”

용재와 도훈은 빠르게 에우리우스와 거리를 벌리곤 황급히 대망루 안으로 몸을 피했다.

“짓궂으시군요.”

“으하하하. 전부 진심이네. 귀공이라면 알지 않은가? 기감을 얻기 위해선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호진은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비처럼 쏟아지던 화살.

살갗을 스치던 수많은 창날과 도끼.

적어도 수십, 어쩌면 수백에 이르는 죽음의 고비들.

이를 떠올린 호진은 씁쓸한 미소를 띠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목숨의 위기 없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축복이겠습니다.”

“그럼, 그렇고말고.”

둘은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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