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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80화 (80/241)

80화. 수련 (1)

‘……어?’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눈앞의 장면이 전환됐다.

─삐이이이

귀에선 이명이 사이렌처럼 끊임없이 울려댔다.

등이 따갑다고 생각하기도 잠시, 머리가 하얘지는 통증이 몸을 덮쳤다.

불에 지져지는 듯한 감각.

“크으으윽!”

벌어진 입술 틈으로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미 진통성 호르몬으로 범벅이 된 뇌는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 정확한 판단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후두두둑

호진이 허리를 펴자 등에 박히지 않은 성벽의 파편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두 발에 힘을 주고 넘어지지 않게 버티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에.

‘……적은 어디에?’

시시각각 다채로운 색으로 점멸하는 시야 속에서도 호진은 적을 찾아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자 어렵지 않게 가만히 서서 이쪽을 응시하는 철벽공, 빌헬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멀뚱히 선 녀석을 보며 호진은 끊어진 기억을 반추했다.

분명 검을 휘두른 건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막혔어.’

마치 단단한 벽과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게 끝이었다.

그리고 기억이 끊겼다.

확실한 건 그 이후 성벽을 부술 기세로 날아갔다는 것뿐.

성벽에 반쯤 처박힌 몸이 그 사실을 말해줬다.

“……살아있는 게 행운이었네.”

전투 중 적에게 당해 기억을 잃었다.

심지어 뭐에 당했는지도 모른다.

안 죽은 게 신기한 상황이었다.

‘아, 안 되겠다. 이거 더 하면 죽겠다.’

호진은 고개를 돌려 피가 섞인 진득한 침을 뱉어냈다.

실력 차이는 명확했다.

지금은 물러날 때였다.

“……물론 상대가 그걸 허락해 준다면 말이겠지만.”

호진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빌헬름을 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놈이 든 거대한 검이 그르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끌렸다.

검이 지나간 자리엔 검흔이라기보다는 고랑에 가까운 흔적이 생겨났다.

저 검에 스치기라도 한다면 틀림없이 올겨울은 지옥에서 몸을 지지게 될 터였다.

‘옆에 한가득 쌓인 다른 시체들과 함께 말이지.’

호진은 땅에 짚고 있던 롱소드를 바로 들었다.

검은 그 난리 통에도 이 하나 나가지 않았다.

왕실 기사가 쓰는 검이 다르긴 다른가 보다.

무기를 확인한 호진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꽝인가.”

자신이 날아온 방향은 성문과 정 반대쪽.

생각해보면 놈의 뒤를 잡은 후 튕겨 나갔으니 당연하다.

그리고 그 말은 즉, 빌헬름을 다시 지나쳐야 도망이라도 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좋네.”

목표가 생존으로 바뀌었기 때문일까, 미약하지만 의욕이 다시 생겨났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서 왜 이딴 호승심이 발동하는지 모르겠지만…….’

경직된 관절에 윤활유를 들이부은 것처럼, 몸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게이트가 나타나기 전에는 위험하다고만 생각했던 이 본능이, 지금은 이렇게나 유용하다.

‘조심하기는 해야겠지만…….’

이 정체 모를 본능에 대한 거부감이 어느 순간부터 옅어지고 있었다.

이성과는 거리가 먼, 충동에 가까운 본능.

마땅히 경각심을 가지고 경계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감시자의 눈’

초감각과 함께 감시자의 눈을 사용하자 기감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그러자 다가오는 빌헬름의 모습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놈을 둘러싼 견고한 하얀색 막.

처음에는 뭔지 몰랐지만, 점점 가까워질수록 강렬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기(氣)구나.”

호진이 사용하는 기는 늘 검에서 일렁이는 형태였기에 금방 눈치채지 못했다.

‘저런 형태로 사용하다니.’

감탄하기도 잠시.

녀석의 검에 하얀색 기운이 쏠리는 게 보였다.

‘온다.’

녀석은 끌고 다니던 검을 들어, 돌이 깔린 바닥을 무서운 기세로 후려쳤다.

그리고…….

─콰지지지지짓 쾅!

땅이 폭발했다.

호진은 이미 옆으로 뛰기 시작했다.

놈의 검에 기가 모일 때부터 공격이 올 것이라 짐작한 덕이었다.

그리고 그 짐작이 호진의 목숨을 살렸다.

─콰과과과과쾅!

뿌연 먼지를 뚫고 탄환처럼 빠른 돌무더기가 호진이 서 있던 곳을 지나쳤다.

호진이 등을 기댔던 성벽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

그 모습에 호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놈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갔다.

마음 같아선 물러나고 싶지만, 활로는 앞에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잠시 그 자리에 붙박인 것처럼 서 있던 녀석도 화답하듯 호진을 향해 빠르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활로 맞겠지?’

호진은 오랜만에 자신의 판단을 의심했지만, 결국 자신의 판단을 믿고 더욱 가속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빌헬름의 방패에 거대한 기가 몰리기 시작했다.

30m, 20m, 10m.

일촉즉발의 상황.

빌헬름이 방패를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모였던 기가 전방을 향해 퍼져나가듯 방사됐다.

안 그래도 놈과의 거리가 좁혀지던 상황.

놈의 공격은 흡사 쓰나미와 같았다. 위도, 옆도 이미 피하기에는 늦었다.

그때 호진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다.

아래만큼은 아슬아슬한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검을 쥔 상태로는 늦는다.

호진은 검을 내던진 채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몸을 던졌다.

─촤아아악

아슬아슬하게 하얀색 방벽이 호진의 코끝을 스쳤다.

회피에 성공한 호진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놈을 살폈다.

빌헬름은 방패의 기운을 쏘아낸 자세 그대로 멈춰 있다가 천천히 호진을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에 호진은 몸을 미끄러뜨리며 얻은 힘을 줄이지 않고 그대로 성문을 향해 내달렸다.

이 또한 운이었다.

만약 녀석이 방패를 휘두르고도 계속해서 움직일 수 있었다면 호진이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호진이 무방비하게 정신을 잃었던 순간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전에 기를 끌어모아 바닥을 후려치는 공격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빌헬름은 기를 사용해 큰 공격을 한 후 잠깐이라도 경직이 생긴다.

호진은 그 패턴을 깨닫고 판돈을 걸었던 것이다.

‘도박도 확률 싸움이라니까.’

호진은 엷게 미소 지으며 빌헬름과 점점 거리를 벌렸다.

성문을 향해 달려가니 에우리우스가 호진을 보며 놀랐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 믿기지 않는다고 중얼거리며 박수까지 쳤다.

‘……왠지 열 받네.’

죽다 살아오긴 했지만, 자신을 어떤 수준으로 봤길래 저런 반응인 걸까.

‘일부러 저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때 에우리우스가 손을 뻗어 호진의 뒤를 가리켰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호진을 쫓아오던 빌헬름이 서 있었다.

그는 돌로 조각된 조각상 하나를 장난감처럼 뽑아 들고 이쪽을 향해 던지고 있었다.

─쾅!

폭발음과 함께 호진보다 커다란 조각상이 호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지만, 만약 피한다 해도 에우리우스가 위험하다.

호진은 달리던 자세에서 그대로 몸을 돌려 허리에 찬 진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예리함을 응축시킨 검을 뽑아 휘둘렀다.

‘절(切)베기.’

─서걱

호진의 목전에 다다랐던 거대한 조각상이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뒤따라 날아들던 돌들은 모래처럼 잘게 부서져 사라졌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무형의 기운은 날아오던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이를 확인한 호진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하자 누군가 어깨를 붙들어줬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다가온 에우리우스가 호진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그는 호진을 부축한 채 왕성에서 물러났다.

빌헬름은 성문을 넘지 못하는 듯,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

“방금 그건 대체 뭔가?”

에우리우스가 다급하게 묻자 호진은 통증을 참으며 힘들게 대답했다.

“뭘 말입니까.”

“마지막에 그 공격! 아니, 우선은 놈의 공격을 어떻게 피할 수 있었는지부터 이야기해주게. 귀공은 견습 팔라딘이 아니었나?”

“……왜 그렇게 생각하셨죠?”

“아까 전까지만 해도 기를 못 보지 않았는가!”

아, 그 시험.

아까 용재를 가리켰던 그 손동작은 기를 볼 수 있나 확인하는 시험이었나 보다.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집중을 해야 해서 그렇지.”

“그게 무슨……? 한번 봐보게.”

에우리우스는 손을 들어 올렸다.

이에 호진은 지쳤지만 재차 ‘감시자의 눈’을 사용했다.

─화악

시야가 변하며 목 밑까지 들이 밀어진 검이 나타났다.

호진이 움찔 물러나자 에우리우스가 미간을 좁힌 채 입을 열었다.

“봤군. 한데 이상해. 기를 써서 보지 않았어. 어떻게 한 겐가?”

“…….”

‘감시자의 눈’은 울타의 권능이고, 이 세계에서 울타는 악신으로 분류된다.

유명하진 않은 듯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기에 호진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에우리우스는 됐다는 듯 손을 저었다.

“말하기 싫으면 괜찮네. 하지만 귀공은 ‘그것’을 쓰는 동안 움직임이 제한되더군. 전투 중에는 안 쓰는 게 좋겠어.”

정확한 통찰이었다.

‘감시자의 눈’을 쓰는 동안엔 권능에 집중하느라 움직임도 느려질 뿐만 아니라 기(氣)도 잘 쓸 수 없었다.

“……조언 감사합니다.”

“이 정도 조언은 백 번이라도 더 해주지. 그보다 그 마지막 공격. 그건 뭔가?”

“절(切)베기라고 합니다.”

“처음 듣는군. 쓰는 검술도 기술들도 하나같이 이색적이야.”

에우리우스가 재차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의심을 산 걸까.

그렇다면 곤란했다.

지금 호진은 한없이 무방비하기에.

그때 에우리우스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하. 재밌군. 재밌어. 아무렴 어떤가. 절(切)베기! 그 공격은 훌륭했네. 팔라딘 견습은커녕 웬만한 기사단장 급의 위력이었어.”

“……과찬이십니다.”

“역시 겸손하군. 으하하하하.”

에우리우스의 호탕한 웃음에 호진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에우리우스가 적대적으로 변할 일은 없을 듯했다.

“다른 애들은 어디 있나요?”

호진이 용재와 도훈을 찾자 에우리우스가 턱 끝을 까딱이며 답했다.

“저기 있군.”

청랑의 곁에서 고이 잠든 두 사람.

“귀공이 빌헬름에게 두들겨 맞고 날아가자마자 전장으로 달려들더군. 그래서 냅다 기절시켰네. 내버려 뒀으면 지금쯤 성 정문에 송장 두 구가 더 늘었겠지.”

“……그건 곤란하네요. 감사합니다.”

호진이 고개를 깊이 숙이자 에우리우스는 손을 저으며 웃음을 흘렸다.

아마 한번 웃음이 터지면 멈추지 않는 타입인 듯했다.

아니면, 지금 기분이 매우 좋던지.

“으하하하하. 됐네, 됐어. 감사 인사는 나중에 깨면 직접 받도록 하고.”

잠시 말을 끊은 에우리우스.

그는 천천히 웃음을 멈추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귀공……. 내 제자가 되어보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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