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시리온 공국 (5)
에우리우스가 앞장을 서고 호진 일행이 그 뒤를 묵묵히 쫓았다.
다들 정면만 보고 가는 반면, 호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다른 이들과 달리 기절해서 끌려오느라 혼자 이 세계를 못 본 탓이었다.
한때는 잘 정비되었을 가도가 길게 이어지고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건물들은 하나하나가 크고 고풍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성벽 너머로 일렁이는 푸른 바다.
평범한 풍경이었지만, 빛을 잘게 부수며 반사하는 수면을 보자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아름다운 도시였겠습니다.”
호진이 입을 열자 에우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웠고말고, 보다시피 굉장히 부유하기도 했다네. 삼면이 바다인 데다가 대륙의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도시라 무역이 발달했으니까.”
“그렇군요.”
“여기서는 안 보이지만 날씨 좋은 날에는 북서쪽으로는 하픈덤이, 북동쪽에는 아훅쉬툭이 보인다네.”
하픈덤과 아훅쉬툭.
모두 귀에 익은 지역들이다.
“그럼 저기는 어딥니까.”
호진이 바다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땅을 가리키며 묻자 에우리우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겐가? 제국 남부가 아닌가.”
호진은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농담입니다. 제국이 넓다 보니 정말 어디서든 보이는군요. 황제 폐하의 은덕입니다.”
“으하하하. 자네, 농담에는 영 재주가 없군. 그래, 제국이 괜히 대제국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지.”
자국에 대한 칭찬에 에우리우스는 금방 웃음을 띠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단순한 사람이라 다행이야…….’
호진은 안도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한동안 먼저 질문하는 건 조심해야 할 듯했다.
괜한 오해는 피하는 편이 좋았으니까.
지금은 최대한 입을 닫고 귀를 열 타이밍이었다.
때마침 에우리우스가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거의 다 왔네. 이 앞이 자네를 데려온 왕가의 묘역이네. 더 나아가며 왕성이 나올 걸세. 자네들의 실력으론 왕성을 보긴 어려울 것 같네만,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건 어떤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호진은 패검한 검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비록 방심과 피곤 때문에 에우리우스에겐 손도 못 쓰고 당했지만, 아직 호진에겐 그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우선 호진의 목표는 그에게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쩌면 이를 본 에우리우스가 자신을 도와 ‘얼굴 없는 자’를 처리해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으하하하. 어쩔 수 없군. 그럼 죽기 살기로 싸워보게나.”
에우리우스는 더 말리지 않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아마 지금까지 본 그의 성격상 죽기 직전쯤에서야 도와줄 것 같다.
호진이 마음에 들어 죽는 것은 막고 싶지만, 말을 듣지를 않으니 어디 한번 당해보라는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표정에 드러났다.
볼수록 참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가겠습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보험까지 있으니 호진은 더욱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대비책이 있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달랐다.
만약 대비책이 없었다면 조금 더 신중하게 탐색하듯이 겉을 훑으며 내부로 갔겠지만, 지금 해야 할 건 명확했다.
‘있는 힘껏 닿는 데까지 실력으로 부딪쳐볼 것.’
이쪽 세계에서 왕의 자리에 오른 이와 그를 지키는 기사들까지.
퀘스트도 퀘스트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 호승심이 타올랐다.
마침 저 멀리 묘역에 서 있던 감염자, 아닌 불사의 신의 봉사자들이 호진을 발견하고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오오오오오오!
그 짐승 같은 울부짖음에 수백의 인원이 내달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용재가 정면에서 어그로를 끌어. 너한테 몰린 적들을 내가 벤다. 도훈 씨는 놈들의 포위에서 벗어나 밖에서부터 적을 깎아주시면 됩니다.”
“좋아!”
“쉽군.”
각자 대답한 일행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자 멀찌감치 떨어진 에우리우스가 살짝 감탄을 흘리며 우리를 지켜봤다.
‘벌써 놀라다니 아직 한참 멀었는데요. 기사님.’
호진은 살짝 웃으며 검 자루를 쥐었다.
***
─짝짝짝
“놀랍네, 아주 합이 뛰어나더군.”
“감사합니다.”
호진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검에 묻은 피를 닦으며 답했다.
수백의 시체 위에서 호진과 일행들은 당연하다는 듯 무기들을 갈무리했다.
“성검은 쓰지 않는 건가?”
에우리우스는 호진의 손에 들린 녹슨 한손검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에 호진은 쓰게 웃으며 답했다.
“검들을 정비할 새도 없이 쓰다 보니,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일본식 진검 두 자루도 날이 많이 나갔고, 성검은 폐기 직전이다.
투핸디드 소드는 내구도 자체가 좋은 편인지 험하게 다뤘음에도 아직 괜찮았지만 그게 전부.
나머지는 보조용 대거(Dagger)나 잘 쓰지 않는 한손검, 그리고 노획한 녹슨 검뿐이었다.
“안타깝군. 나도 무기가 여벌용 하나밖에 없어서 빌려주기가 어렵네.”
“마음만 받겠습니다.”
호진은 감사를 표하던 그때, 익숙한 모습의 기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빛의 풀 플레이트 메일을 두른 시리온 공국의 왕실 기사.
그는 처음 본 녀석과는 달리 롱소드를 양손으로 쥐고 있었다.
롱소드는 녀석이 입은 갑옷처럼 실용적인 형태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호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죠.”
“그게 뭔 소린가?”
“그런 게 있습니다. 아무튼 저 검은 이제부터 제 겁니다.”
호진은 평소보다 유난히 더 밝은 표정을 지으며 기사를 향해 나아갔다.
그에게 조심하라고 말하려던 에우리우스는 조용히 자신의 애검을 망토 속에 숨기며 뒤로 물러났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에우리우스는 호진이 아닌, 상대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속으로 삼켰다.
“내 무기 내놔!”
상대를 향해 달려드는 호진.
번들거리는 눈빛이 거의 광인과 진배없었다.
에우리우스는 처음으로 호진에게 두려움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상대의 무기를 뺏는 팔라딘이라……. 저자의 궁핍함과 절실함을 헤아려주십시오. 여신이시여.”
전투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애초에 방패와 검을 다루는 상대가 처음이라 까다로웠을 뿐, 검술에 대한 깊이라면 호진도 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에우리우스는 재차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호진이 선보인 처음 보는 형식의 검술은 흥미로웠다.
어쩔 때는 공격과 방어의 밸런스에 초점을, 또 다른 때는 방어는 뒷전으로 한 채 폭풍처럼 근거리에서 검을 몰아쳤다.
장거리, 중거리, 근거리 상대와의 거리에 따라서 천태만상의 모습을 지닌 검술.
마치 여러 개의 무기를 들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호진은 가볍게 왕실 기사를 제압하고 검을 빼앗았다.
“이제 무기가 부러질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에우리우스를 향해 기쁘게 웃어 보인 뒤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부터 호진은 황가의 묘역을 노도(怒濤)와 같은 기세로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호응하듯 일행 역시 말 한마디 없이, 호진을 보조하며 내달렸다.
매우 익숙하다는 듯이.
‘역시 가족이라는 걸까?’
호진 일행은 모두가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에우리우스가 연신 감탄하며 따라오는 걸 확인한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조금 남았다.
지금까진 꽤 성공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한 듯했다.
중간에 왕실 기사의 검을 보고 잠시 눈이 돌아갔을 때를 제외하면, 기사의 표정은 계속 좋았다.
‘아까는 너무 흥분했지.’
호진은 반성하며 앞의 적의 목을 베었다.
이젠 왕실 기사 정도는 별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니, 눈앞에 견고한 성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으하하하! 이거 내가 틀렸음을 인정할 수밖엔 없겠군.”
뒤에서 웃음을 터트린 에우리우스는 일행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왕성일세.”
시리온 공국의 왕성.
이제 목표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던 공왕, 그자가 여전히 대전에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순간 에우리우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정말 여기까지일세. 이 앞부터는 나도 안전을 책임질 수 없으니.”
“……뭐가 있는 겁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뭔가가 있다.
호진도 반쯤 열린 왕성의 문에서 서늘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에 에우리우스는 듣고 놀라지나 말라는 설명과 함께 입을 열었다.
“공국의 자랑이자 철벽공이라는 이명을 지닌 대장군, 빌헬름. 그가 이 앞에 있다네.”
잠시 생각에 잠긴 호진은 금방 즐겁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아주 약간의 허세도 들어있지 않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
‘대족장 이후 처음인가.’
얼마 전 화려하게 자신을 불태우고, 지친 듯 깊숙이 숨어있던 투쟁심이 다시 한번 일렁였다.
아직 에우리우스에게 보여주지 못한 것이 많았다.
아마 그 녀석을 쓰러트리면 자신의 실력을 인정하고 공왕을 잡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몰랐다.
단순 호승심을 제외하고도 빠르게 이루어진 계산에 호진은 담담히 앞으로 나아갔다.
호진의 미소를 본 에우리우스는 더 이상 말리지 못하고 호진의 뒤를 조용히 따라올 뿐이었다.
호진은 두껍고 거대한 성문의 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눈앞에 산처럼 쌓인 시체들이 보였다.
수천에 달하는 시체들이 성문 앞부터 내성으로 이어지는 문까지 수도 없이 쌓여있었다.
감염자들이었을까, 아니면…….
호진은 뒤에 말을 삼켰다.
시체들이 산처럼 쌓인 곳에서 누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호진의 1.5배는 될법한 거구의 인물은 자신의 몸 전부를 가리고도 남을 거대한 방패를 옆으로 들고 있었다.
그것은 방패라고 하기엔 너무 두껍고 거대했다.
차라리 성벽이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에 가까웠다.
통짜 철로 만들어진 방패를 바닥에서 들어 올리자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인은 다른 한 손에는 자신의 키보다 길고 몸만큼이나 두꺼운 검을 쥐고 있었다.
두껍고 커다랬으며 거칠기 짝이 없는 검이 왕성 바닥에 긁히며 불똥이 튀고 바닥에 돌들이 가루가 됐다.
거무칙칙한 검의 도신.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으면 저런 색이 되는 걸까.
마지막으로 놈은 전신에 물 샐 틈도 없이 두꺼운 철갑을 두르고 있었다.
그가 움직이자 마치 철로 된 동상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건…… 예상과는 조금 다른데.”
녀석을 마주한 순간, 일렁이던 투쟁심이 훅하고 꺼졌다.
마치 미지의 존재를 만났을 때 나 느꼈던 허무감이나 절망의 감각이 목 밑까지 차올랐다.
호흡이 가빠지는 느낌에 호진은 심호흡을 했다.
그러곤 손에 쥔 노획한 롱소드를 다잡았다.
놈이 바닥에 검을 끌며 호진을 향해 다가오고 이에 호진은 천천히 놈을 향해 다가갔다.
─쿵 쿵 쿵
놈이 달려오는 속도를 높이자 바닥이 작게 흔들렸다.
느리진 않지만 그렇다고 민첩하다고 할 수는 없는 상대.
속도에서만큼은 자신이 우위를 지녔을지도 몰랐다.
호진은 허벅지에 힘을 주고 놈을 항해 뛰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거리를 좁힘과 동시에 거검이 날아들었다.
호진은 놈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고 뒤를 잡았다.
아무리 튼튼한 갑옷이라도 이음새는 약할 수밖에 없다.
호진은 목엽참과 기를 두른 검을 놈의 겨드랑이 사이로 휘둘렀다.
─쾅!
─삐이이이이!
‘……어?’
폭발음과 함께 이명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