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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78화 (78/241)

78화. 시리온 공국 (4)

“그래서 넌 여기 왜 잡혀있는 건데?”

호진의 질문에 용재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차원 문을 넘어와서 길을 헤매고 있는데, 마침 여기가 보여서 걸어왔지.”

“이 근처로 넘어왔다고? 언제?”

“음, 한 3시간 전쯤?”

어떻게 된 일일까.

들어온 건 같은데, 도착한 시간과 장소가 다르다.

어쩌면 차원 문을 넘으며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이 뒤틀린 건지도 몰랐다.

그래도 아직 퀘스트에 적시된 제한 시간은 29일.

다행히 지구와 크게 뒤틀리진 않았다.

잠시 접어둬도 되는 문제라 판단한 호진은 우선 작금의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냥 왔을 뿐인데, 저 기사가 갑자기 널 묶어뒀다고?”

호진이 인상을 찡그리며 묻자 뒤에 있던 노인이 다가오며 답했다.

“그럴 리가. 저자는 나의 충고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고대신의 종복이었기에 제압을 한 거라네. 자네는 몰랐나?”

“……예?”

용재가 종교 같은 게 있던가?

호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용재를 보자 용재가 한숨을 푹 삼키며 답했다.

“아니, 그러니까 전 고대신이고 연대신이고 그게 뭔지 모른다니까요?”

“자네가 섬기는 게 고대신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뭐라고 했는데요?”

호진의 질문에 기사는 참혹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종교가 뭐냐는 내 질문에 저자가 답하길, 자신이 모시는 신은 하늘을 날아다닌다더군. 몸은 수백 개의 기다란 촉수들로 이루어져 있고, 거대한 고깃덩어리 두 덩이가 그 촉수들을 지탱한다지.”

……그런 끔찍한 신이 있을 리가.

호진은 기사의 오해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며 용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말없이 설명을 요구하자 용재가 당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이야.”

“……?”

“……?”

호진과 도훈의 의문 가득한 시선이 서로 교차했다.

그리고 이내 그런 건 모르는 게 정상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결과를 도출하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다른 신들에 비해 스파게티 님은 우리에게 바라시는 게 없지. 오직 우리를 다른 종교 권유로부터 해방시키시고, 그리고 자신의 몸을 희생해 우리들의 배를 불리는 게 전부시거든.”

호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반면 이야기를 듣던 기사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무리 이단이라지만…… 자신들의 신을 먹는단 말인가?”

“그럼요. 아주 맛있으시죠. 미트볼이랑 스파게티를 포크로 찔러 돌돌 말아 입에 넣으면…… 아, 침 고인다.”

경악하는 기사의 표정을 보며 호진은 그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진정하시죠. 기사님. 저 애가 말하는 건 진짜 신이 아닌, 음식을 신격화한 농담입니다.”

호진의 말을 들은 기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 질문에 대답한 건 용재였다.

“저희가 있던 곳에서는 흔한 일이죠. 대부분 하루에도 10번씩 종교가 바뀝니다.”

“그런 불경한…….”

“너만 그런 거라고, 이 자식아. 제발 싸잡아 욕먹게 하지 마.”

호진은 고개를 도리질하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기사는 아까의 호쾌함은 거의 남지 않은 듯, 지친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들이 온 곳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 자네의 말과 저자의 말 중 난 뭘 믿어야 하는 겐가?”

호진은 재빨리 도훈과 시선을 교환했다.

적당히 말을 맞추라는 신호를 보내자 도훈은 믿고 맡기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호진은 경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믿는 건 오직 주신이신 여신 ‘릴리’ 님뿐입니다. 저와 제 삼촌이 여정을 떠나온 것도 모두 여신을 찾기 위함이고요.”

“……정말인가?”

기사가 확인하듯 도훈을 쳐다보자 도훈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고말고. 이 애의 엄마 즉, 내 누이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쓰러진 지도 수년째. 약을 구하기 위해 떠난 매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추운 겨울이었지.”

‘언제 적 설정이야 그게!’

갑자기 말을 쏟아내는 도훈.

호진이 당장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봤지만, 안타깝게도 도훈에겐 닿지 못한 듯 계속해서 설정에 살이 붙었다.

“가산을 다 털어도 차도가 없는 누이를 위해 결국 우리는 여신을 직접 찾아뵙기로 한 거다.”

“…….”

말을 마친 도훈을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기사.

끔찍한 적막이 흘렀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망했다는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뭔 전래동화도 아니고…….’

저런 성의 없는 설정이라니.

없던 의심마저 생겨날 듯했다.

잠시간의 침묵을 깬 기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다니…….”

말문이 막히는 듯 침을 삼키는 기사를 보며 호진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하나. 의심했던 내가 다 미안해지는군.”

“……예?”

“이 친구는 그럼 어디 문제가 있는 건가?”

기사가 용재를 바라보며 묻자 호진은 재빨리 상황 파악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 동생인데, 애가 어릴 때 쥐약을 쳐놓은 걸 잘못 먹어서 그만…….”

“그런 안타까운 일이…….”

슬픈 분위기 속 용재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아니, 뭔 헛소리야. 내가 이래 봬도 초등학교 때 영…… 흡!”

호진은 용재의 다리를 재빨리 밟으며 말을 이었다.

“영 글러먹었다는 선생님의 말과 함께 학교에서도 쫓겨났죠.”

“크흡.”

이제 기사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다 넘어왔다.

이제 쐐기를 박을 타이밍이었다.

호진은 인벤토리에서 성검을 뽑아 들었다.

“아니, 그건?”

“제가 진작 이걸 보여드렸어야 하는 건데…….”

“그걸 어찌 자네가?”

기사가 놀란 목소리로 묻자 호진은 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저희가 있던 곳의 신전에서 받은 겁니다.”

“……자네, 팔라딘이었군. 진작 말하지 그랬나.”

“제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신앙심과 효심 그리고 겸양까지 갖추다니. 참된 신도로다. 으하하하.”

감동한 듯한 기사는 웃음을 터트린 후 성호를 긋고 손을 모았다.

이에 호진도 재빨리 그를 따라 기도하는 시늉을 했다.

잠시 후, 용재를 풀어준 기사는 호진을 향해 물었다.

“여신을 찾는 여정이라……. 한데 이곳에 온 이유는 뭔가? 혹시 내가 또 자네들의 여정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지녔을지도 모른다네.”

“그럼 염치불고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호진은 약간 이야기를 각색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여신을 찾기 위한 여정 중 만난 괴물과 동료들의 희생.

그리고 괴물의 추격까지.

그 말을 들은 기사는 잠시 뭔가 생각하듯 입을 닫았다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하얀 가면, 얼굴을 갈아 끼우고 목소리를 모방, 피를 이용한 능력이라…….”

“뭔가 아시는 게 있습니까?”

“……결국 300년 역사의 공국도 이걸로 끝이군.”

“예?”

괴물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공국이라니 무슨 소리인 걸까?

호진이 고개를 갸웃하자 기사는 침울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자네도 이 시리온 공국 왕가에 대한 말을 들어본 적 있겠지. 스스로를 신격화한 암살교단의 교주이자 ‘얼굴 없는 자’에 대한 소문을.”

“아, 예.”

호진이 다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사는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원래는 제국의 일부였던 이곳, 시리온을 다스리던 아셀라이트 가(家)의 8번째 영주는 자신의 혈통에 새겨진 능력과 기술을 연마하던 중, 그것이 암살에 더할 나위 없다는 걸 깨달았지.”

“능력이라 하시면 설마……?”

“타인의 얼굴과 목소리를 흉내 내며 천 명이 넘는 적을 암살한 그는 시리온 공국의 초대 공왕이 되었다네. 소문에는 제국의 황제마저 두려워했다지.”

“하지만 그건 사람 아닙니까?”

“지금의 11번째 ‘얼굴 없는 자’, 즉 현 공왕은 물론 사람이네. 아니 정확히는 사람이었지.”

기사의 말을 듣던 호진은 무언가 깨닫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불사의 신의 봉사자.”

“바로 맞췄네.”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악한 신에게 홀린 자들은 생전의 능력을 사용하기 마련이지.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자네가 말해준 능력을 지닌 자는 현 ‘얼굴 없는 자’뿐이네. 무엇보다 그 하얀 가면.”

잠시 말을 멈춘 기사는 허리에 찬 검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공국이 무너지고 불사의 신의 봉사자가 늘어난 곳엔 늘 그자가 있었다고 하네. 아마 분명 관련이 있을 걸세.”

“하얀 가면…….”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가 적이라는 사실이다.

‘아니, 근데 왜 그런 놈이 강화도에서 얼쩡거리는 거야.’

호진은 놈에 대한 적의를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겨 넣었다.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었습니다.”

호진이 인사와 함께 몸을 일으키려 하자 기사가 호진의 팔을 잡았다.

“그만두게.”

“예?”

“방금 이야기를 듣고도 모르겠는가. ‘얼굴 없는 자’는 지금 자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네.”

호진은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했다.

공국의 왕, 얼굴 없는 자.

사실 어느 정도일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보다 지금까지의 정보를 취합했을 때, 다음 목표는 녀석이 분명했다.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든, 하얀 가면의 경고를 파훼하기 위해서든.

녀석을 해치워야 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 아닙니까.”

“아니, 알 수 있네.”

기사는 말과 함께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자네는 뭐가 보이는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길가에 난 버섯을 뽑아 들고 먹을까 말까 고민 중인 용재가 보였다.

‘쟤는 또 왜 저러고 있냐.’

호진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소같이 불쌍한 제 동생이 보이는군요.”

하지만 호진의 답변에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가지 말게. 보아하니 견습 팔라딘 신분인 듯한데, 단장급이 온다 해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게 이곳의 공왕일세.”

뭔가의 시험이었던 걸까.

하지만 이미 호진은 마음을 굳힌 뒤였다.

그런 표정을 읽었는지, 기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흘렸다.

“어쩔 수 없나. 그럼 길이라도 안내해 주겠네.”

“기사님도 임무가 있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사실 이 망루를 지키는 게 내 임무네. 하지만 또 다른 임무는 공국의 이상 현상의 해결이니, 어찌 보면 자네의 목적이 나와 관련이 없지는 않지. 공왕마저 당했다면 이곳만 지킨다고 능사가 아닌 게지.”

기사의 대답에는 오류가 있었다.

“그럼 이곳이 비지 않습니까?”

“그렇지도 않다네. 나 혼자 온 것이 아니니.”

말을 마친 단장이 허공에 손을 휘젓자, 굳게 닫혔던 대망루 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척 척 척 척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한 쇳소리가 웅장하게 주변에 울려 퍼진다.

이윽고 푸른 망토를 두른 50인의 기사들이 문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척

가장 선두에 선 자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다른 기사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께 무한한 영광을! 부단장 데미안이 단장을 뵙습니다.”

““단장을 뵙습니다.””

어쩌면 호진과 비슷하거나 더 강할지도 모르는 그들의 기세에 호진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반면 호진의 옆에 선 기사, 에우리우스는 여유롭게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았다.

“황제 폐하께 무한한 영광을.”

그가 손을 내리자 기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호진의 몸에 전율이 흘렀다.

자신의 옆에 있는 기사의 위치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호진의 반응을 지켜보던 기사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부하들이 조금 유난이기는 하지. 으하하하.”

“아닙니다. 대단하십니다.”

호진이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훈과 용재는 서로 작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표정 보니까, 우리한테도 저런 거 시키려나 본데요?”

“난 할 수 있다.”

“아저씨는 군인 출신이었잖아요. 전 미필이라 저런 거 오글거리는데.”

“미필이었나. 그래 보이긴 했다. 원래 군인은 까라면 까는 거다.”

“전 군대 가기 전에 게이트가 터진 게 다행인 것 같아요. 제대 날 게이트가 터졌으면 얼마나 억울할까.”

“……그게 나다.”

“……아.”

용재는 조용히 입을 틀어막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도훈은 슬쩍 고개를 치켜 올렸다.

왠지 그런 그의 눈가가 촉촉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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