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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77화 (77/241)

77화. 시리온 공국 (3)

“무슨 박수까지 치고 그래요.”

호진은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 자신이 생각해도 제법 잘 싸우기는 했지만, 도훈이 남을 칭찬하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새삼스러웠다.

“……아는 사람인가?”

그때 멀찌감치 들려오는 도훈의 긴장된 목소리.

‘……박수 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렸는데?’

호진이 눈을 번쩍 뜨자 푸른색의 갑옷이 눈에 들어왔다.

─파밧

재빨리 몸을 일으킨 호진은 대거를 역수로 쥐고 상대를 노려봤다.

상대는 여전히 건틀릿(Gauntlet)을 옆구리에 낀 채 박수를 칠 뿐이었다.

호진은 조금은 침착하며 상대를 응시했다.

상대는 이제껏 봤던 갑옷과는 전혀 다른, 게임 속에 등장할 법한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신체 곡선에 딱 맞는 늘씬한 형태의 플레이트 아머.

그 와중에 어깨의 견갑, 스파울더(Spaulder)는 쓸데없이 크다.

안에는 체인메일을 두른 건지, 갑옷 하반신은 체인메일이 치렁치렁 흘러나와있다.

투구는 얼굴을 완전히 가린 아흐메 스타일인데, 뒤쪽에 달린 푸른색 깃이 길게 휘날렸다.

그리고 몸 전체를 두르고 있는 푸른색 망토까지.

실전 갑옷 매니아로서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제껏 봤던 어떤 갑옷보다 화려하고 멋있었다.

‘실용적인 거랑 멋은 다르긴 하네.’

괜히 갑옷이나 무기에 의전용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럴 때가 아닌 걸 알지만 욕심이 나는 갑옷이다.

호진이 침을 꿀꺽 삼키던 그때였다.

박수를 멈춘 상대가 건틀릿을 손에 끼며 입을 열었다.

“멋진 싸움이었네. 귀공. 저 거북이 같은 기사들의 수비를 그런 식으로 파훼할 줄이야. 으하하하!”

“말…… 을 하시는군요.”

호진은 약간 긴장을 풀었다.

이제껏 상대의 강함은 그 화려함에 비례했다.

만약 눈앞의 기사가 적이었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호진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남자를 따라 미소 지었다.

“하하, 그럼. 내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지는 30년도 더 됐다네.”

“저쪽에 못 하시는 분들도 꽤 있더군요.”

“음, 그렇지. 이제 이곳에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귀하긴 하지.”

뭐가 그리 웃긴지 연신 웃음을 터트리는 기사.

목소리는 유쾌했지만 말투나 음색을 봐선 나이가 제법 있을 듯했다.

“그래서 자네는 이런 곳까지 무슨 일로 온 겐가?”

어느새 웃음을 조금 거둔 기사는 호진을 바라보며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대답에 따라 남자가 어떤 식으로 나와도 이상하지 않기에, 호진은 신중했다.

“글쎄요. 대답을 해야 할까요?”

“음, 대답하지 않으면 조금 곤란하긴 하지. 자네가 나온 곳이 나온 곳이다 보니까.”

호진은 고개를 돌려 도훈과 시선을 마주쳤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은 나란히 구멍 뚫린 바닥을 향했다.

“나름 왕가의 묘역인데. 거기서 올라왔으면 자기소개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

“…….”

왕가의 묘역.

생각보다 거창했다.

화려해서 뭔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왕가라니.

‘여기가 던전이 맞긴 한 건가?’

그러고 보니 들어올 때 항상 뜨던 던전 난이도 등급 표시도 없었다.

여긴 어쩌면…….

호진은 당황을 가까스로 숨기며 입을 열었다.

“불사의 신의 봉사자들로부터 묘역을 지켰으니,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을까요?”

호진의 말에 기사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곤 팔짱을 끼더니 결국…….

“으하하하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참 맞는 말이군. 하기야 이미 망해버린 왕국의 묘역이 무슨 소용일까. 나중에 이곳의 왕이라도 만나면 금일봉이라도 달라고 해보게나. 의외로 선뜻 내줄지도 모르지. 남은 건 돈과 명예뿐일 테니.”

‘망해버린 왕국, 이라…….’

흥미로운 키워드다.

호진은 떠보듯 질문을 던졌다.

“시리온 공국의 기사들이 전부 저렇게 됐을 줄은 몰랐군요.”

“기사뿐이겠는가. 공국의 모두가 이단에게 홀렸네. 남은 건 왕궁 정도겠지.”

‘성공이다.’

기사의 입장에서 불사의 신은 이단인 모양.

그리고 이곳은 시리온 공국이 분명했으며 이미 거의 멸망한 듯했다.

“그러는 기사님께서는 이곳에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음, 자세한 건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황제 폐하의 명을 이행하는 중이라네. 황제 폐하의 말씀이 곧 여신 ‘릴리’ 님의 뜻일 테니.”

말을 마치며 손으로 허공을 긋는 기사.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으며 손을 모았다.

그 모양이 다소 생소했지만 성호를 그은 모양이다.

‘황제와 여신인가.’

군주를 황제라 칭하는 국가는 ‘제국’뿐일 터.

여태 아이템 설명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제국’을 떠올릴 수 있었다.

또한 릴리라면 분명 성국 릴리온의 주신이자, 지구에 일어난 사태의 주범이라는 여신.

울타에게 인간 왕국이 ‘릴리’를 섬긴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제국 역시 ‘릴리’를 주신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마…….’

이곳은 던전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정보들을 취합한 결과와, 던전과는 이질적인 느낌까지.

‘이곳은…… 다른 차원의 세계군.’

흥미로운 정보투성이였지만 이제는 정말 떠날 때였다.

눈앞의 상대는 위험했다.

아까부터 ‘감시자의 눈’을 사용하는데도 뭔가에 막힌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정체는커녕 경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상대를 상대로 더 이상 뭔가를 캐내려는 건 어리석었다.

기사를 따라 성호를 긋고 손을 모은 후 호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기사가 투구 너머로도 흐뭇함이 묻어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신실한 친구였군.”

“여신께서 제게 복을 주시고 여신께서 저를 지키시니 어찌 소홀하겠습니까.”

“오오! 정말 멋진 말이군.”

기사는 감명받은 듯 다시 한번 성호를 그으며 기도를 올렸다.

얼마나 감동받은 건지 호진의 말을 나지막하게 다시 중얼거릴 정도였다.

‘……어릴 때 떡꼬치 먹으러 교회 가길 잘했네.’

역시 뭔가 배워둬서 나쁠 건 없었다.

대충 기억나는 문장을 인용했을 뿐인데 기사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풀어졌다.

“자네가 이곳에 무슨 일로 왔는지 궁금하지만…… 말할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이니. 자네가 가는 길을 축복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구먼. 으하하하!”

웃음을 터트린 기사는 경건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왔다.

“귀공이 걷는 길에 여신의 축복이 늘 함께하시길.”

“기사님께서도 여신의 축복이 늘 함께하시길.”

호진은 몸을 돌리다 문뜩 용재를 떠올렸다.

“아, 마지막으로 혹시 근처에 남자 한 명 못 보셨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자네도, 저 뒤에 있는 일행도 남자다만?”

“아, 짧은 머리 스타일에 커다란 도끼를 들고…….”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사내 말인가? 마치 자네처럼.”

“아, 예. 맞습니다.”

“흠, 역시 생김새가 비슷해서 혹시나 했다만, 신실한 모습에 깜빡 속아버렸구먼.”

“예?”

호진이 어리둥절하던 그때, 기사가 견디기 힘들 정도의 기세를 내뿜었다.

주변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 속에서 기사는 위엄이 서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제국 푸른 늑대 기사단의 단장 다니엘 에우리우스. 황제 폐하의 명에 반하는 그대들을 제압하겠네. 순순히 무기를 내려놓게나.”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냐고, 호진은 뒷말을 내뱉지 못했다.

호진이 검 자루를 잡은 그 순간.

무언가 뒷목을 치는 듯한 감각과 함께 사방이 어두워지고 소리가 점점 멀어졌기 때문이다.

어두워진 시야 속 도훈과 기사의 말소리가 작지만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항복이다.”

“훌륭한 판단이군.”

“괴물을 이긴 괴물에게 덤빌 생각은 없다.”

누구보고 괴물이라는 거야.

아무튼 용재는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기사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그때 문득 뜨끈한 액체가 볼에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 질감이나 냄새.

내 침이 분명했다.

“이 친구 아주 푹 자는군. 피곤했나?”

“요즘 무리하긴 했다.”

“이렇게 기절할 줄은 몰랐는데, 보기보다 허약하구만. 으하하하하!”

“나도 조금 실망이군.”

……뭐?

지금 설마 실망이라고 한 건가?

배신감이 물밀 듯이 들이닥쳤다.

지금 자신의 상태를 잘 알 텐데.

요 며칠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으며 함께 싸운 도훈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두고 보자.

그나저나 저 기사, 아니 저 아저씨는 사람을 이렇게 패놓고 한다는 말이 기절할 줄 몰랐다라고?

진짜 까딱 잘못 맞았으면 세상 하직할 뻔했는데.

완전 사이코패스가 따로 없다.

뻔뻔한 게 기사가 아니라 정치나 도박을 했어도 대성했을 듯싶다.

일어나기만 하면 아주…….

아주…….

뭔가 같은 말이 반복되며 떠오르다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푹신하고 따듯한 느낌에 호진은 기분 좋게 눈을 떴다.

그러자 푸른색의 털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음? 여긴……?”

호진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키던 그때 청랑이 몸을 좌우로 사납게 털었다.

순간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호진은 신음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큭, 이게 무슨 짓……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

마치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청랑.

이에 호진은 미간을 좁혔으나, 이내 자신이 당해서 기절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청랑의 시선을 회피했다.

“일어났나? 잘 자더군.”

마침 고개를 돌린 방향에서 도훈이 손을 내밀며 물었다.

“아, 크흠. 잔 게 아니라 적을 방심시키기 위해 척을 한 겁니다.”

“입에 침이나 닦아라.”

“음…….”

침음을 흘린 호진은 그제야 입가에 굳은 침과 청랑은 털을 툭툭 털어냈다.

“마침 잘 일어났다. 거의 다 도착했다더군.”

“도착이요? 여기가 어딥니까?”

“직접 봐라.”

도훈이 손가락을 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를 따라 호진이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 거대한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대망루라고 하네.”

호진의 물음은 옆에서 들려왔다.

저번과도 같이 인기척이라곤 느낄 수 없는 기사의 접근에 호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스스로가 한심했기 때문이다.

자만하고 오만했다.

‘차원문에 들어오자마자 이 정도의 강자와 맞닥뜨릴 줄은…….’

제국의 무슨 기사단장이라 했던 걸로 보아 평범한 인물은 아닐 테지만,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여긴 왜 데려온 겁니까?”

호진의 질문에 기사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하! 역시 재밌구만. 질문은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

호진은 그제야 자신이 차고 있던 진검이나 롱소드가 모두 압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손만 자유로울 뿐, 자신의 입장은 명백히 포로였다.

그러나 기사는 이내 한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말 못 해줄 것도 없지. 저기, 자네의 이단 친구 때문에 데려온 거라네.”

“……?”

호진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돌리자, 망루의 초입 족쇄와 수갑을 찬 채 퍼질러 자고 있는 용재가 눈에 들어왔다.

“쟤는 이 상황에 잠이 오나?”

호진이 중얼거리자 도훈이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봤다.

“아, 저는 자는 척한 거라니까요.”

“……그래 알았다.”

“그리고. 진짜 만약에 잤다고 해도, 도훈 씨는 절 이해해줘야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도훈.

“나도 졸리다. 세상이 멀쩡했으면 단장은 악덕 고용주로 깜빵에 갔을 거다.”

“제가 제일 못 잤고, 제일 힘들었는데요?”

“그러니까 다들 참는 거다. 아니었으면 사달이 나도 한참 전에 났을 거다.”

“……그 정도로 캠프 분위기가 흉흉한가요?”

“궁금하면 계속 지금처럼 해봐라.”

“……복지에 신경 쓰도록 하죠.”

호진은 숙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캠프를 위해서라지만 훈련이고, 농사고, 연구고 모든 부분에서 사람들을 조금 닦달하기는 했다.

돌아가면 조금 풀어줘야겠다.

강화도만 안정되면 한시름 놓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어느새 엎어진 용재의 앞까지 도착했다.

호진이 용재를 발로 툭툭 건드리자 용재가 비몽사몽 몸을 일으켰다.

그것도 잠시, 호진을 보더니 몸을 벌떡 일으키며 반갑게 외쳤다.

“역시 형이야! 구하러 왔구나!”

“아니. 나도 잡혔어.”

호진의 대답에 용재는 짜게 식은 눈으로 한숨을 쉬었다.

“……뭐 그야 그렇겠지.”

“……?”

“그냥 분위기 좀 띄워봤어. 형 민망할까 봐.”

─으득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문 호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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