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시리온 공국 (2)
인기척이 들리는 순간, 호진은 검 자루에 재빨리 손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조용히 석실의 모퉁이 뒤로 물러나 몸을 벽에 붙였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계속 노출된 곳에 서 있는 것보다는 나을 듯했다.
호진이 몸을 숨기던 바로 그 순간.
구멍 뚫린 천장으로 무엇인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역광 때문에 한순간 못 알아봤지만, 금방 자세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철제 투구를 뒤집어쓰고 방패와 스피어로 무장한 병사.
흐릿하게 보이는 외관이지만 인간이 분명했다.
갬비슨(Gambeson)과 비슷한 천 갑옷을 입은 녀석은 무언가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마 나 때문이겠지.’
석관을 열 때 제법 소리가 컸다.
인기척을 느끼고 다가온 듯했으나 다행히 모습을 숨긴 호진을 눈치채진 못한 모양이었다.
호진은 모습을 드러내고 말을 걸어볼까 고민해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우선 교전이 벌어졌을 때 위치가 불리했고, 밖의 상황을 몰랐다.
무엇보다 지하 묘지에 숨어있는 자신의 정체를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틀림없이 싸움이 날 것 같아…….’
속이 쓰렸다.
‘하필 이동을 해도 지하 묘지라니.’
심지어 주변 상태를 보니 보통 지하 묘지가 아니었다.
주변 벽면에 양각된 문양이나 고풍스러운 글자들, 화려한 석관까지.
보아하니 함부로 들어올 만한 곳은 아니었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안치된 곳이 분명했다.
저번 하픈덤 때 마을 주민들도 그랬지만, 던전에도 문명이 존재했다.
이곳은 그중에서도 수준이 높은 편이었고.
‘왜 이런 곳이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진은 뚫린 천장을 힐끔 바라봤다.
비라도 온다면 온통 물이 들어차 엉망이 될 거다.
그런 생각을 하기도 잠시.
보병은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고개를 갸웃하고 몸을 돌렸다.
호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천천히 밖의 상황을 살피며 정보를 모으면 되겠…….’
─덜컥 드르르르륵
호진이 모퉁이에서 나가려는 찰나,
근처에 있던 석관 중 하나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뒤돌아서던 보병이 석관을 내려다봤다.
반쯤 열린 관에선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흠, 여긴…… 묘지인가.”
인상을 찌푸린 도훈이 손으로 빛을 가리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아직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지 보병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보병은 금방이라도 스피어를 내찌를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사정거리가 아슬아슬하지만 창 자루의 끝을 잡고 내지르면 도훈의 머리쯤은 쉽게 꿰뚫을 듯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었다.
“잠시만요.”
호진이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보병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호진이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말하자 상대의 움직임이 멈췄다.
‘됐나?’
호진이 반쯤 뽑은 검 자루를 다시 집어넣었다.
움직임을 멈춘 녀석은 창을 슬쩍 거두더니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바라봤다.
뭐 하는 짓인가 잠시 고민하던 그때.
─오오오오오오!
보병의 입이 열리며 짐승같이 울부짖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호진은 황당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봤다.
설마 저게 이쪽 세계 언어일 리는 없을 것 같고…….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였나.”
‘감시자의 눈’ 한 번이면 확인이 가능한데, 사람처럼 생겨서 안일하게 굴었다.
‘후회는 나중에.’
호진은 재빨리 달려 도움닫기를 한 후 석관을 밟고 도약했다.
순식간에 카타콤의 뚫린 천장으로 뛰어오른 호진은 주변이 확 밝아짐을 느꼈다.
그럼에도 호진의 시선은 보병에 고정된 채였다.
소리를 지르던 녀석은 호진이 뛰어오른 것을 보고 흠칫 뒤로 물러났다.
밝은 데서 보니 보병의 썩어 문드러진 피부와 텅 빈 눈동자가 너무 잘 보였다.
“쯧.”
이렇게 보니 대놓고 몬스터다.
호진은 가볍게 혀를 차며 녀석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녀석은 방패를 들어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분리된 머리만이 뒤늦게 바닥에 떨어졌는데, 철제 투구 탓에 그 소리가 꽤 요란했다.
“내가 실수한 모양이군. 그래도 정리는 끝난 듯해서 다행이다.”
뚫린 구멍 아래에서 도훈이 이쪽을 보며 말했다.
이에 호진은 잠시 고개를 돌려 도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잠시 들어가 계시죠.”
“음?”
“끝나기는커녕 이제 시작이에요.”
호진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캬아아아아악!
이미 반파돼 터만 남은 기도실 주위로 수백의 인영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굉장히 낯이 익은 상황이다.
“감염자들.”
김포에서의 일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라 호진은 웃음을 흘렸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사람들의 복장이다.
천과 가죽 혹은 갑옷을 두른 전형적인 중세 유럽의 복장들.
이곳이 다른 세계임을 너무나 잘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었다.
무섭거나 하진 않지만…….
“귀찮네.”
호진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한 병사의 검을 피했다.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른 녀석의 몸 전체가 빈틈투성이였다.
인상을 쓴 호진은 활짝 내보인 녀석의 손목을 그대로 올려 벴다.
손을 잃은 녀석은 횡으로 그어진 호진의 검을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호진은 빙글 돌아 떨어지는 놈의 검을 낚아챘다.
이 낡아빠진 진검을 더 휘둘렀다간 검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낚아챈 검은 평범하디 평범한 롱소드다.
‘조금 짧나?’
평소에 자주 쓰던 롱소드, 성검에 비하면 검이 조금 짧게 느껴졌다.
그래도 쓸 만한 수준이었다.
검을 가볍게 휘둘러보니 파공음과 함께 검이 가볍게 진동했다.
“잠깐 빌릴게.”
호진은 쓰러진 감염자에게 웃어 보이며 이어 달려드는 감염자들을 베었다.
김포와는 달리 하나씩 무기를 든 감염자들은 그래도 상대하는 재미가 있었다.
우선 각자 무기의 길이가 달랐고, 무엇보다 복장에 따라 그 강함이 달랐다.
한눈에 봐도 더 좋은 갑옷을 걸친 녀석들이 더 빠르고 더 위협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하지만 그뿐.
─서걱
이미 너무나 벌어진 실력 차이에 호진은 조금 신기한 감각으로 놈들을 벨 뿐이었다.
개중 아무리 강한 녀석을 상대로도 검을 3번 이상 휘두를 필요가 없었다.
‘고작 몇 개월 전 일일 텐데.’
김포에서의 일이 왠지 까마득히 오래된 시절의 일 같았다.
마치 어린 시절 못했던 것을 잘하게 되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받아쓰기가 그랬고 구구단이 그랬지.’
처음엔 그렇게 어려웠던 게 나중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할 수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호진은 바닥에 뚫린 구멍 주위를 맴돌며 숨 쉬듯이 적들을 베었다.
얼마나 그렇게 검을 휘둘렀을까.
검이 검고 찐득한 체액으로 무뎌졌다.
호진은 달려오던 녀석의 팔을 베고 롱소드를 뺏었다.
벌써 다섯 개째 검을 노획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는 없을 듯했다.
“마지막이요.”
호진이 창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감염자의 공격을 피한 뒤, 옆구리를 걷어차자 구멍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콰직
이어 구멍에서는 도훈이 떨어진 녀석의 두개골을 부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염자들을 상대하던 도중 생각해보니 좋은 경험치 수급원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씩 도훈에게 던져준 것이다.
“끝났다. 레벨도 올랐군.”
도훈이 구멍을 기어오르며 말했다.
호진처럼 한 번에 뛰어오르기엔 조금 높았던 모양이다.
이에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네요. 이제 이 정도 높이는 한 번에 뛰어오를 수 있게 단련해 보죠.”
주변을 잠시 둘러본 도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하지.”
도훈은 이런 풍경을 만들어낸 사람에게 말대꾸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역시 괴물이군.’
거의 단칼에 양단된 감염자들 시체 수백 구가 기도실 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호진의 검 앞에선 어떤 갑옷을 둘러도 의미가 없는 듯했다.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매번 놀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호진도 만족스럽게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나저러나 도훈도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청랑과 함께라면 용재보다 강할 거다.
‘뭐, 그건 청랑이 너무 강한 거기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문득 희미한 인기척이 귀에 잡혔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누군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이때까지 팔다리를 휘저어가며 달려오던 보통 감염자들과는 달랐다.
자신이 있는 기도실 터로 이어지는 계단을 한 걸음씩 천천히 딛고 올라오는 녀석은 뭔가 위험한 느낌이 났다.
무엇보다.
“화려하네.”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풀 플레이트 아머.
은색의 기사는 은빛으로 빛나는 흉갑과 매끄러운 견갑, 바르뷰타(Barbuta) 양식의 투구를 썼다.
녀석은 말에 타는 기사들이나 입을 만한 갑옷을 전신에 두르고도 가볍게 계단을 올랐다.
손에 든 것은 두꺼워 보이는 카이트 실드와 아밍 소드(Arming sword)다.
갑옷과 마찬가지로 단아하지만 은빛으로 번쩍이는 게 아름다웠다.
‘감시자의 눈.’
─띠링
「불사의 신의 봉사자」
「전(前)시리온 공국의 왕실기사」
「종족: 언데드」
「특징: 한손검과 방패를 다루는 시리온의 기사들의 수비 능력은 타국에도 유명하다.」
“위험한 녀석인가?”
도훈의 질문에 호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부탁하지.”
도훈이 미련 없이 물러나자 호진이 기사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기사는 잠시 멈칫하며 앞으로 나선 호진을 바라봤다.
순간 호진은 시선이 교차한 느낌을 받았다.
그 즉시 기사의 몸에서 짙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녀석은 곧장 방패를 들어 상반신을 가리고 기수식을 취하며 호진을 향해 쇄도했다.
‘빠르네.’
호진도 롱소드를 다잡고 기를 흘려보냈다.
전력을 다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실력을 숨기고 상대할 정도도 아니었다.
녀석이 검을 휘둘러오자 호진은 이를 양단할 기세로 맞받아쳤다.
─캉!
쇠붙이와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호진의 몸이 살짝 뒤로 밀렸다.
이에 호진의 눈이 놀라 커다래졌다.
‘기를 썼는데 내가 밀렸다고?’
상대의 검을 부러뜨리거나 최소한 밀어낼 수는 있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뒤로 밀린 건 자신뿐이었다.
기사는 첫 공격이 막히자 방패를 들어 올리고 호진과의 거리를 천천히 좁혔다.
얼마든지 공격해보라는 듯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렇다면.
‘해주지.’
호진은 뒤로 물러나며 재빨리 무기를 교체했다.
이를 놓치지 않고 녀석이 달려들었지만, 호진은 손엔 이미 묵직한 감각이 전해져왔다.
곧장 투핸디드 소드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스킬을 발동했다.
‘투구 가르기’
파괴력만이라면 이 두 조합을 따라올 수 있는 게 없었다.
기를 제외하면 호진이 가할 수 있는 최강의 공격 중 하나였다.
호진이 검을 내려찍자 달려들던 기사가 황급히 방패를 들어 올렸다.
─쾅
도저히 검과 방패가 부딪쳐서 날 수가 없는 소리와 함께, 기사가 서 있던 가도가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하지만.
“이거 미친놈이네.”
녀석의 방패도 팔도 모두 멀쩡했다.
‘고대종 콜드 블러드조차 양단할 수 있는 공격이었는데…….’
호진은 혀를 차며 후속타를 휘둘렀다.
그래도 충격은 피할 수 없었던 듯 아슬아슬하게 검을 받아내는 녀석.
그러나 이번 공격 역시 방패를 뚫어내지 못하고 막혀버렸다.
아무래도 방법을 바꿔야 할 듯했다.
그때 기사가 정비하기 위함인지 뒤로 물러났다.
호진이 따라붙자 견제용으로 검을 휘둘렀다.
다행히 이전 공격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는지 놈의 손이 약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이에 호진은 물러나지 않고 검을 맞부딪히며 놈과 밀착해 코등이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호진은 검에서 손을 놓았다.
왼손은 곧장 힘을 겨루던 녀석의 검을 움켜쥐고, 오른손은 인벤토리에서 대거(Dagger)를 뽑아 들었다.
그러곤 곧장 투구 사이에 보이는 눈자위에 대거를 쑤셔 박았다.
그 동시에 경직된 녀석의 다리에 발을 걸어 넘어트린 뒤 위에 올라타 재차 대거를 휘둘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어느 순간 기사의 몸이 축 처지며 힘이 빠졌다.
그걸로 녀석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물론.
호진도 일어나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
호진은 그대로 놈의 위로 엎어졌다가 뒹굴 몸을 굴려 바닥에 누웠다.
‘꽤나 성가신 상대였네.’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